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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sy Aug 05. 2024

내가 있는데 어떻게 없어지나?

영화 <엑스 마키나>

파르메니데스가 말했다.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 

굳이 파르메니데스가 말하지 않아도 '있는 것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동어반복 아닌가? 100% 참인 명제이다.


문제는 있는 것이 없어질 때 생긴다. 여기서 '없어지는 것'은 단순한 부재(不在)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집에 있던 여자친구가 없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없어진 것이 아니다. 그 장소에 부재한 것이다. 

그렇다면 있는 것이 완전하게 없어지는 경우는 어떤 것일까? 


맛있는 사과를 남김 없이 먹어서 없어졌다. 완전히 없어졌나?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사과의 성분이 소화기관에 머물다가 마지막 잔여물이 뱃속을 나와서 땅으로 돌아가고 분자단위까지 분해된다. 원래 사과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졌으니 없어졌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사과를 이루고 있던 구성성분이 여전히 지구에 존재하고 있다는 점에서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불타버린 페라리, 조각난 고려청자, 이런 것들은 없어졌지만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다. 

다시 완전히 없어진 것을 찾아보자. 


사랑은 어떤가? 사랑이 끝나면 사랑한 마음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진다. 있는 것이 없어진 사례라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랑이 원래 '있는 것'인가에 대한 논란의 여지가 있다. 기쁨, 슬픔, 상실감, 행복과 같은 감정은 관념일 뿐 존재론적 의미에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있는 것이 없어지지 않았다.  


'나'를 생각해보자. 죽음과 함께 내 육체는 없어진다. 이 없어짐은 다 먹은 사과와 비슷한 없어짐이다. 형체는 완전히 사라져도 분자단위의 구성성분은 남아 있다. 그러니 있는 것이 없어지는 것에 해당하지 않는다. 

내 정신은? 내 의식은? 내가 나라고 생각하는 자의식이 바로 문제다. 내 죽음이 일어나면 자의식은 없어지나?


자의식이 있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오죽하면 데카르트는 생각하는 나, 의심하는 나를 존재론적 근간으로 삼았다. 모든 것을 의심할 수 있어도 '생각하는 나'의 존재는 절대 의심할 수 없다는 논리다.


역설적이게도 내 의식의 존재는 더 없이 확실하지만 타인의 의식은 여전히 의심의 대상이다. 심지어 타인에게 나와 유사한 자의식이 존재한다는 것은 추측 가능해도 증명은 어렵다. -최근까지 불가능하게 여겨지고 있다.


뇌과학에서는 자의식의 존재를 '어려운 문제'로 규정한다. 예를 들어 빨간 사과를 볼 때 뇌의 어떤 부분이 활동하는지는 MRI 촬영 등을 통해 간단하게 분석할 수 있다. 그래서 '쉬운 문제'라고 한다. 

그러나 빨갛다는 느낌이 어떻게 발생하는지는 바로 의식의 문제로 '어려운 문제'에 속한다. 아무리 물리학이 발전한다고 해도 어떻게 자의식이 발생하는지는 영원히 규명할 수 없을 것이라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인간의 뇌에는 대략 천억 개의 뉴런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1000억 개의 신경세포가 서로 신호를 주고 받으면서 자의식을 생성할 것이라고 추측되지만 실험적으로 증명할 방법은 아직 없다. 만약 자의식이 신경세포들로 인해 발생한 것이라면 인간이 죽어 신경세포가 활동하지 않을 때 자의식이 홀로 존립할 가능성은 없다. 자의식은 죽음과 동시에 없어진다. 있는 것이 없어지는 것이다. 패러독스다. 


그러나 있는 것이 없어지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둘 중의 하나다. 자의식은 원래 없거나, 죽어도 없어지지 않거나. 


먼저 자의식은 원래 없다는 가설부터 검토해 보자. 자의식은 없지만 인간이 자의식이 있다고 착각한다는 가설이다. 어떻게 없는 자의식을 있다고 느끼나? 자의식이 없다면 자유의지가 어떻게 가능하나? 사과를 집어 입에 넣고 깨무는 행위는 명확하게 내가 의도했기 때문인데 의식이 없는 것이라고? 그럼 내 의식은 뭔데?


이때의 '의식'이 뇌가 꾸며낸 환상이라는 주장이 있다. 즉 '내가' 사과를 먹으려고 했다고 의식하지만 그 의식은  인과성을 결여한 착각이다. 나는 의도하지 않았다. 의도했다고 생각할 뿐이다.   


말도 안된다고 생각하겠지만, 슬프게도 자의식이 환상에 불과하다는 실험적 증거가 존재한다. 

벤자민 리벳이라는 뇌과학자는 다음과 같은 실험을 시행했다. 먼저 인간이 손가락을 움직이려 한 시각을 재고, 뇌에서 운동 신호가 발생한 시각을 재고, 실제 손가락이 움직인 시각을 측정했다. 


자유의지가 있다면 그 시간적 순서는 움직이려 한 시각이 제일 빠르고 그 다음 운동신호가 발생하고 움직임이 일어나야 한다. 하지만 실제 결과는 달랐다. 실제 실험 결과는 운동신호가 먼저 발생하고 움직이려 의도하고 손가락이 움직인 것이다. 설명하자면 손가락을 움직이려 한 내 의식은 뇌에서 이미 발생한 운동 신호를 해석하거나 검토한 것에 불과하다.  


이런 식이라면 몸이 아파서 휴가를 내기로 결정했을 때, 이것도 내 의식의 결과가 아니라 이미 두뇌는 휴가를 결정했고 그것을 내 의식이 사후 보고를 받았다고 해석해야 한다. 수학문제를 풀 때도 내 의식이 푸는 것이 아니라 내 의식과 상관없이 두뇌가 알아서 풀고 내가 풀고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는 것이다.

또한 내가 그녀를 사랑하는 것도 두뇌가 사랑하기로 결정하고 행동에 옮기면서 내 의식에게 통보해 주는 것이다. 와, 신경질 난다. 내 생각이 뇌에서 발생한 전기신호의 해석에 불과하다니.. 그러나 내가 죽으면 내 의식이 없어지는 것은 깔끔하게 설명된다. PC 본체를 없애면 모니터의 글씨가 모두 없어지는 것과 유사하다. 


반대로 자의식은 있고 죽어도 없어지지 않는다는 가설을 검토해보자. 시작부터 마음이 힘들다. 죽어도 없어지지 않는 자의식이라... 

영화 <엑스 마키나>에서 인공지능 휴머노이드의 튜링테스트를 위해 비밀산장에 초대된 케이럽은 이렇게 말한다. 


"If you've created a conscious machine, it's not the history of man. That's the history of gods."

 

인류가 자의식을 가진 기계를 창조하게 된다면 그것은 단순한 기술적 진보가 아니라, 신의 영역에 도달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바꿔 말하면 죽어도 없어지지 않는 자의식이란 인간의 영역에서 이해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뇌과학 실험은 얼마든지 부정할 수 있다. 손가락을 움직이려 한 시각을 체크했다고 하는데 겨우 뇌사진 몇 장으로 그 시점이 내 의지가 작동한 시각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나? 기본적으로 의식이 전기신호로 환원된다는 가설을 부정한다. 


또 자의식은 신경세포들의 상호작용으로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물리학자들은 아직 의식이 어떻게 발생하는지 프로세스를 규명하지 못했다. 의식의 메커니즘은 당연히 모른다. 인간의 기억을 백업하는 것도 영화에서나 가능하다. 


자의식은 미지의 영역, 신비의 영역이기 때문에 육체와 함께 소멸되지 않을 가능성이 남아 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을 하기 위해서는 자의식이 육체에 의지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가정을 해야 한다. 

육체와 독립된 별도의 자의식이라.. 심신이원론이라는 힘겨운 질곡으로 빠져들 수 밖에 없다. 


인간의 의식은 어떤 방식이든 감각과 연결돼 있다. 육체를 떠난 의식은 눈이 없어 볼 수 없고 귀가 없어 듣지 못한다. 다른 감각도 사용할 수 없다. 그럼에도 자의식이 구천을 떠도는 귀신처럼 보고 듣고 말할 수 있다면 우리의 의식은 처음부터 감각기관을 필요로 하지 않아야 한다. 뭐, 가능하다.

  

컴퓨터 게임 속 캐릭터들이 모든 감각기관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실제 그들은 아무 것도 감각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 인간도 그렇지 않다고 확신하기 어렵다. 인간이 눈으로 보는 것처럼 보여도 그렇지 않다고 주장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내가 사과를 볼 때마다 상위의 존재가 내 의식에 시각을 구현해 줄 수 있다. 내가 보는 행위와 실제 시각을 의식하는 것은 인과관계가 없을 수도 있다. 


다른 설명은 없을까? 자의식이 뇌가 만들어 낸 환상이라거나, 죽어도 없어지지 않는 영혼 같은 것이 있다는 믿기 힘든 주장 말고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설명은 없나?


오케스트라 이론이 있다.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끝나면 음악이 끝나는 것처럼 인간의 의식도 음악과 같아서, 육체라는 악기가 소멸되면 함께 자의식이 사라진다는 가설이다. 슬프지만 아름다운 설명이다. 얼마나 직관적이냐?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부정하고 싶다. 어떻게 있는 것이 없어지나? 어떻게 내가 사라지나?  


나는 내가 없는 세계를 결코 상상할 수 없다.  


"We are the universe becoming conscious of itself."

- 앨런 와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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