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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sy Aug 12. 2024

아무 것도 믿을 수 없는 시대가 온다.

시뮬라르크와 시뮬라시옹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책과 글쓰기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하 대화체는 모두 이해를 돕기 위한 작가의 픽션입니다.)


"제자야, 그거 손에 들고 있는 네모나고 두툼한 종이 뭉치가 뭐지?"

"최신 발명품인데요, 책이라고 부릅니다."

"책이라고? 뭐에 쓰는 물건인데?"

"이 안에는 각종 지혜과 이야기가 글로 쓰여 있어서 언제 어디서든 지식을 습득할 수 있습니다. 굉장한 물건이에요."

"헐, 나도 그런 게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내 제자 중에도 책 같은 걸 읽는 놈이 나타날 것이라고는 생각 못했구나. 이게 다 스승이 못나서다. 내가 죽어야지. 죽자. 죽어."

"스승님. 아닙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이딴 책, 당장 내다 버리겠습니다."


항상 열린 마음으로 새로운 것에 개방적인 태도를 보였던 소크라테스가 유독 책을 싫어했던 이유는 뭘까?  


플라톤은 <대화편> 「파이드로스」에서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다음과 같은 이집트 신화를 말해준다. 

이집트의 신 토트(Thoth)는 파라오 타무스(Thamus)에게 여러 발명품을 자랑하면서 그중 문자가 으뜸이라고 자랑했다. 왜냐하면 문자와 책이야 말로 인간의 기억을 보존하고 지혜를 전파할 수 있는 도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파라오 타무스는 불경하게도 신 토트의 견해에 반대했다. 


"존경하는 토트여, 제 생각은 다릅니다. 사람들이 글쓰기와 책에 익숙해지면 일견 지혜가 보존되고 널리 확산될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는 다를 것입니다. 지혜를 글로 남길 수 있다면 인간들은 애써 기억하려 하지 않을 것이고 자연히 기억력이 나빠질 것입니다. 또한 글을 통해 배우는 지혜가 어찌 참된 지혜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무릇 지혜란 현명한 스승의 말을 귀로 듣고 머리로 이해하는 과정에서 습득되는 것이지 단순히 글을 읽는 것만으로는 절대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글은 저자와 대화할 수 없기 때문에 오해나 잘못된 해석이 발생할 것이고 혹여 책을 통해 잘못된 지혜가 전파된다면 그 후환은 어찌 감당하려 하십니까?"


소크라테스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한마디 덧붙였다.


"제자야. 책에 의존하면 모르는 것도 아는 체하게 된다. 책만 펴면 나오니까 이미 지혜가 자기 머릿속에 있다고 믿는 것이지. 그딴 백해무익한 것은 당장 태워버려라. 아무데나 버렸다가 누가 줍기라도 할까 두렵구나."


처음에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나도 웃어 넘겼다.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구나. 소크라테스의 주장 이면에는 책으로 인해 지식이 대중화되는 것을 꺼리는 귀족주의가 있었겠구나 하면서. 

하지만 책의 부작용이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플라톤의 대화편을 보면 당시 인간의 기억력은 엄청났던 것으로 보인다. 며칠 전에 A와 B가 이야기한 내용을 토씨하나 안 틀리고 줄줄 외우는 것을 보면..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기록 매체가 없었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기억해야 했을 것이고 지금보다 기억력이 더 발달했을 것이다. 


그런데 소크라테스가 책의 단점으로 지적한 두 번째 내용은 디지털 시대에도 여전히 참고할 만하다. 책이나 글로 얻게 되는 지식은 오해의 소지가 있으며 해석의 문제도 적잖이 발생한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작정하고 속이는 글들은 더 큰 문제를 발생 시킨다. 이른바 가짜뉴스나 찌라시, 퍼온글 등등.

 

요즘은 정치적 편향성이 심해 정규 뉴스조차 믿을 수 없게 됐다. 팩트 사이에 거짓을 교묘하게 섞거나 사실관계를 왜곡하거나 일부 빼먹는 방식으로 독자와 시청자를 속인다. 미디어의 폐해인 것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쟝 보드리야르는 그의 저서 <시뮬라르크와 시뮬라시옹>에서 미디어의 폐해를 예견했던 것 같다. 


시뮬라르크는 '원본이 없는 복제'를 의미하는데 다음 네 가지 단계를 걸쳐 발전한다. 


1. 진실된 반영: 시뮬라르크는 원본의 진실된 복제물로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다. 이 단계에서 복제물은 원본과 매우 유사하며, 원본의 본질을 유지한다.

2. 현실의 왜곡:          이 단계에서 시뮬라르크는 현실을 약간 왜곡하거나 변형시킨다. 복제물은 여전히 원본을 반영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원본과는 다르다.

3. 원본이 없는 복제:          이 단계에서는 시뮬라르크는 원본을 대체한다. 원본은 사라지거나 중요성을 잃고, 복제물이 실재(reality)로 인식된다.

4. 하이퍼리얼리티:          시뮬라르크가 원본이 없는 상태에서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복제물이 현실보다 더 실재처럼 인식되는 상태. 이 단계에서는 원본과 복제의 구별이 무의미해진다. 


우리는 미디어를 통해 사회현상을 습득하지만 그 지식이 실재를 반영하는지 검증할 방법은 없다. 기껏해야 다른 미디어와 비교해야 하는데 그 미디어 역시 100% 믿을 수는 없다. 보드리야르 역시 현실을 대체한 시뮬라르크의 강력한 예시로 미디어를 들었다. 


뉴스를 통해 여러 소식을 접하다 보면 실제 저런 일이 벌어지는지 의심되고 상식과 동떨어져 아예 나와는 상관없는 일로 치부하기도 한다. 그저 미디어 속에서 벌어질 뿐이고 내 세계에는 없는 일인 것처럼. 

너무 많은 드라마를 보다 보면 가끔 현실과 픽션의 경계가 느슨해져 가치관이나 세계관이 혼돈될 때도 있다. 

컴퓨터나 스마트폰 속에 세계가 너무 상세하게 구현되고 있으니 고개를 들어 진짜 세계를 올려다 보면 오히려 한숨이 나온다. 가상현실 게임이라면 로그아웃하면 그만이지만 우리가 사는 세계는 교묘하게 진실과 허구가 뒤섞여 있다. 

어쩌면 이 세계의 실재는 이미 사라지고 복제가 현실을 대체한 단계에 접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이퍼리얼리티, 누가 이것을 아니라고 검증할 수 있을까? 모두 이 세계라는 울타리 속에 살고 있는데.


보들리야르는 현실이 복제되고 대체되고 마침내 소멸되는 과정을 시뮬라시옹이라고 칭했다. 시뮬라시옹이라는 과정이 끝나면 우리가 알던 세계는 완전히 없어진다. 그 단계에 이르면 우리의 인식은 불안정해지며 얼마든지 조작될 수 있다.  


더 무서운 일은 아무도 진실을 원하지 않는 것이다. 이유는 다양하다. 진실이 뭔지 모르거나 영원히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라면 다행이다. 하지만 진실이 주는 이득이 적어서, 복제나 가짜가 주는 이득이 더 크기 때문이라면 우리 사회는 희망이 없다. 

가짜뉴스와 괴담을 퍼트리는 인간들을 보라! 가짜라는 것을 알면서도 환호하는 대중을 보라! 그들의 논리는 이렇다. 가짜면 어떤가? 보는 내가 즐거운데, 쾌감만 있으면 충분하지 않나? 


영화, 만화, 소설처럼 거짓이라는 것을 알고 수용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차이가 있다. 최소한 수용자 입장에서는 사실인지 거짓인지 알 권리가 있다. 그럼에도 요즘은 뭐가 사실인지 구분하기 힘들다.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 가끔은 내가 하는 말의 진위도 자신없다. 나는 사실을 말하고 있을까?   


도대체 사실과 진실의 힘은 어디에 있을까? 사실과 진실이 무엇인지 모르는데 힘이 있다 한들 무슨 소용일까?

힘겨운 세상이다. 그저 살아남기 위해, 남보다 조금 더 잘 살기 위해, 나 보다 더 잘 속는 다른 인간을 찾아나설 시대가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런 시대가 오면 거짓과 사실을 구별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결국 소크라테스가 맞았다. 언어는 있어도 기록하는 문자는 발명되지 말았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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