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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sy Jul 29. 2024

목숨 걸고 달려서 무엇을 얻을 수 있나?

<F1 본능의 질주>와 <프리솔로>

일요일 오전 11시 20분, 기온은 이미 영상 30도를 가볍게 넘었다. 비가 온다더니 햇살이 살인적이다.

"꼭 이런 날 뛰어야겠어?"

"어떡해? 체육관 쉬는 날인데."

아내의 핀잔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늘상 있는 일이다. 성격상 하루도 운동을 쉬지 못하는 나는 2주에 한번 체육관이 쉬는 날이면 밖에서 뛴다. 아무리 더워도, 반대로 아무리 추워도 예외는 없다.


매번 죽기야 할까, 생각하고 시작한 런닝은 죽을 것 같다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끝난다.

1.5km 코스를 4바퀴 도는데 한 바퀴를 돌기도 전에 후회가 시작된다. 내가 미쳤지. 국가대표도 아니고, 이 날씨에 뛰어? 모델할 것도 아닌데 왜 뛰고 있지?

두 바퀴가 끝날 때쯤이면 이미 체력은 바닥이나 다름없다. 땀이 흘러내려도 팔이 안 올라가서 닦을 엄두가 나지 않는다. 땅을 차고 있는 것인지 땅이 나를 밀어내는지 알 수 없는 절묘한 균형이 이어지며 그저 앞으로 달린다.

세 바퀴째, 멘탈이 나가고 삶이 공허해진다. 뛰는게 인생 같다는 생각이 든다. 목적이 있어 사는 게 아닌 것처럼 목적이 있어 뛰는 게 아니다. 다리는 거들뿐, 실제 뛰는 건 심장이다.

네 바퀴째, 이러다 죽겠다는 생각보다 죽어도 상관없겠다는 생각이 지배한다. 왜 달리는 것인지, 왜 사는 것인지 이유가 궁금할 뿐이다. 'God, give me a reason.'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F1 본능의 질주>를 보다가 뜨끔했다.


"죽는 건 조금도 두렵지 않아요."

"엔진이 폭발하든 말든 전혀 상관없어요!"

"무섭다는 생각이 들면 은퇴해야죠."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포뮬러 원 레이서들은 인터뷰마다 비슷한 말을 내놓았다. 죽는게 두렵지 않다고. 너무 당연하게 말하니 또 믿어진다. 말하는 순간만큼은 진심이겠구나. 저런 진심으로 달리는구나.

시속 300km의 속도로 차를 몰면서 다른 차와 거리는 1미터도 되지 않는다. 추월하다가 옆차와 부딪히는 것도 예사로 벌어진다. 머신이 벽을 들이박아 박살이 나고, 공중으로 떠오른 차체가 빙글빙글 도는가 하면, 곧 터질듯 불이 붙기도 한다. 그러다 실제 죽는다. -브라질 출신 전설의 레이서 아일톤 세나가 레이싱 사고로 죽었다.


전 세계 10개 팀, 스무 대의 머신과 스무 명의 드라이버, 한 시즌에 21번 그랑프리에 참가하니 매년 21번 목숨을 건다. A급 드라이버의 연봉은 수백 억원을 가볍게 넘는다. -레드불의 막스 베르스타펜의 지난 시즌 연봉은 대략 500억원이다.

포뮬러원의 드라이버가 됐다는 건 이미 갑부의 레벨에 올랐다는 의미다. 그들에게 돈은 부산물에 불과하다. 그들의 관심사는 오직 하나, 포디움(시상대)에 올라가는 것뿐이다.


객관적으로 모든 인간은 생명을 가장 소중히 여긴다. 그 어떤 가치도 자기 생명보다 우선할 수는 없다. 우리의 뇌는 생명유지를 목적으로 설계됐다. 애초에 목숨 걸 일을 만들지도 않으며 치명적인 위기는 알아서 회피하는 방향으로 진화했다.   

그런데 이들은 왜 이럴까? 나라를 구하는 것도 아니고 자식을 위한 희생도 아니다. 아무리 좋은 말로 포장해도 F1 레이스는 스포츠일뿐이다. 누가 스포츠에 진짜 목숨을 거나? 저리 쉽게 죽을 수 있는데.


프리솔로, 등산용 로프하나 없이 맨손으로 절벽을 오르는 사람들. 발을 헛디뎌 떨어지면 예외없이 죽는다. 사망확률이라 할 것도 없다. 전성기를 지나 살아있는 프리솔로 등반가를 손에 꼽기도 어렵다. 누구나 그렇지만 그들은 '아직' 살아있을 뿐이다.  


확실한 것 한 가지는 이들이 스포츠에 목숨을 거는 이유가 돈은 아니라는 것이다. 불가능에 대한 도전도 아니고 자기와의 승부는 더더욱 아니다. 이유는 모른다. 아마 시속 300km로 머신을 운전하는 중에도, 지상 500미터 위에 맨손으로 매달려 있을 때에도 이유를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혹시 과시욕일까?

F1 포디움에 올라 샴페인을 터트리는 맛, 관중들의 환호는 마약과 같다고 했다. 정상에 올라 작은 산들을 내려다보며 세상을 정복한 느낌, 그 짜릿함일까? 그것도 전부가 아니다.


히말라야 14좌를 모든 정복한 한 등산가는 설산에 있을 때는 끝없이 후회하며 집을 그리워하다가도 집에 온 순간 이미 산에 있는 자신을 상상한다고 했다.


"왜 이런 미친짓을 계속 하는 겁니까?"

"자연과 하나가 되는 느낌입니다. 상상해보세요. 극한의 정신을 집중해 산을 오르면 최상의 자유를 맛볼 수 있습니다."

조그만 암벽의 끄트머리라도 찾아 어떻게든 살아 올라가겠다고 집중할 때, 시속 300km의 속도로 벽을 스치며 질주할 때, 그는 무념의 상태에 도달할 것이다. 집에 빚이 얼마가 있든, 가족 중 누가 아프든, 전쟁으로 고국이 망해가든, 그 어떤 생각도 나지 않고 오직 나아갈 뿐이다. 순수한 무념무상의 상태가 아닐까?

거기서 얻어지는 자유, 그것은 목숨과 바꿀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


가부좌를 틀고 허리를 곧게 펴고 숨을 모아 머리 위로 끌어 올린다. 눈은 절반쯤 감아 시선을 1.5미터 앞의 허공에 던진다. 전신을 순환하는 호흡을 느끼며 생각을 끊는다. 이런 식으로 수행하다 보면 우주와 하나가 된 느낌을 받으며 깨달음을 얻는다고 하는데.. 바로 물아일체의 경지다.


인간은 생각하지 않고 생존할 수 없다. 생각은 인간이 다른 종을 압도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다. 그러면서 어떤 이들은 무념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목숨을 건다.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많은 이들이 무관심하고 부정한다해도 인간은 결국 나아가는 존재다. life goes on.

모든 순간 우리는 과정에 있고 멈추지 않으며 끝나지 않는다. 죽음에 이르면 더는 인간이 아니기에 '인간'이라는 의미 집합 속에 '끝'은 포함되지 않는다. 우리는 결코 죽음을 경험할 수 없다.


나아가는 방향이 어디인지 차이가 있어도 속성은 비슷하다. 궁극의 경지.  

어떤 사람은 돈이고, 어떤 사람은 권력이고, 명예다. 예술인이면 미의 궁극, 학자면 진리의 끝, 수행자라면 깨달음 그 자체.


나는 어디로 나아가고 있을까?

친구가 물었다.


"굳이 소설을 쓰려는 이유가 뭐야? 내가 보니 너는 에세이가 더 나은 것 같은데. 요즘 소설 쓴다고 누가 알아주기나 하나?"


인간이 하는 행위 중에 이유가 명확한 것이 몇 개나 있을까? 원인은 있어도 이유는 지어내기 나름이다. 배고파 밥 먹는 것은 원인이지 이유가 아니다. 올림픽 대표도 아닌데 달리는 이유, 팔리지도 않는 소설을 쓰는 이유.. 애초에 그런 것이 있기나 하나?


"카프카가 문학이어서 다른 어떤 것도 될 수 없다는 것처럼, 내가 소설이야. 쓰려고 쓰는 게 아니야. 돌아보면 소설을 쓰고 있어. 나도 진절머리 나. 헤어졌다 싶으면 또 찾아오고, 이별하면 보고 싶고, 질척되고 미련만 남은 그런 관계야. 나와 소설은."


지겹다. 지겨워 미치겠다.

해야 할 말은 이미 다 했고, 쓰여 질 것은 모두 쓰여졌다. 그럼에도 다시 말하고 반복해서 적는 이유는 망각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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