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나쁜여자 박지나

by 시sy

지현우도 끊임없이 걸었다. 박민혁이 시킨 대로 샤워도 하고 잠도 충분히 잤다. 이제 쇼핑할 순서, 하지만 택시를 타려는 순간 눈물이 나와 택시를 탈 수 없었다.


끝내 지호를 찾지 못했다. 서울시내를 아무리 걷는다 해도 지호를 찾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찾을 수만 있다면 지구 한 바퀴도 걸어서 돌 수 있겠지만, 어떻게 걸어도 이곳에는 없다. 기껏해야 건물 1개 층을 차지하고 있는 수퍼컴퓨터 안에서 그녀를 찾을 수 없다니. 걷다보니 쇼핑몰 앞에 도착했다. 자동문이 스르르 열린다.


‘내가 뭐하는 거지? 그자가 쇼핑하라 했다고 쇼핑을 오다니..’


문이 열렸는데 들어가기 망설여진다. 이제 뭘 해야 할까? 지호가 아프기 시작하면서부터 지현우의 인생은 오직 그녀를 살리는 것에만 초점이 맞춰졌다. 지호가 시한부 판정을 받았을 때도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포에버월드가 있었으니까. 그런데 이제 끝이라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컴퓨터는 실수하지도 거짓말하지도 않는다. ‘전송완료’라고 했으면 윤지호의 의식은 포에버월드로 전송됐다. 다만 못 찾을 뿐. 희망이 충분하지만 현우는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녀의 실종이 이별을 의미하는 것 같다.


“지현우씨.”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니 처음 보는 젊은 여자가 정확하게 지현우를 불렀다.


“맞죠? 모털 컴퍼니 기술팀장, 지현우씨. 반가워요. 난 박지나라고 해요.”


정신이 돌아왔다. 누구지?


“네 그런데요.”


박지나는 무척 반가운 표정으로 손 내밀었다. 현우는 습관적으로 손을 맞잡았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어디 가서 커피 한잔 하실래요?”


잘 아는 사람 같다.


“전 그쪽이 누구인지 모르겠는데요?”

“괜찮아요. 내가 아니까. 저쪽으로.”

“네?”

“쇼핑몰 들어가려던 거 아니었어요? 이 안에 괜찮은 커피전문점이 있는데. 사양하지 말고 가요.”


현우는 박지나가 이끄는 데로 따라갔다. 박지나는 자기가 알아서 커피 두 잔을 들고 현우의 맞은편에 앉았다.


“마셔봐요. 죽을 것 같은 얼굴인데. 커피가 직장인들에겐 생명수라고 하잖아요.”


커피향은 좋은데 마실 기분은 아니다.


“무슨 일인지 용건을 말해주시죠.”

“우와. 굉장한 단도직입이네. 딱 내 타입, 결혼 안 했죠?”


박지나는 혼자서 커피향을 음미하면서 천천히 커피를 마셨다. 현우는 영문을 몰라 눈치를 보고 있었다.


“좋아요. 나도 본론부터 얘기하는 거 좋아하니까 바로 말할게요. 난 박민혁씨 동생이에요.”

“네?”

“오빠가 내 얘기 안 하죠? 그럴 줄 았았어. 사이가 좋진 않거든요. 우리가 좀 엉킨 집안이라서.”


현우는 놀랐다. 얼마나 놀랐는지 잠시지만 지호 생각을 잊었다. 박민혁의 여동생이 왜 자기를 찾아왔을까?


“그러면 박장우씨의..?”

“맞아요. 딸.”


“그런데 박민혁 사장님은 그런 말 안 하던데요?”

“그랬겠죠. 우린 엄마가 다르니까. 하지만 나도 엄연한 박장우씨의 유산 상속자죠.”


유산상속? 결국 이런 것으로 얽히는 것이다.


“그걸 왜 저에게 말하는지 모르겠네요. 무슨 상관있다고.”


현우는 일단 잡아뗐다. 박민혁과 함께 박장우의 스위스 은행 계좌를 알아내려고 하는 중이라는 말은 둘만 알고 있는 일이었다.


“상관이 있을 거 같은데. 아닌가요?”


박지나가 지현우를 쳐다보며 사실을 말하라는 표정을 지었다. 현우는 담담하게 말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요.”

“요즘 오빠한테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 생겼다기에 좀 알아봤더니 모털 컴퍼니 기술팀장이더라구요. 오빠는 자기한테 필요없는 인간하고는 아예 상종도 안하는 사람인데 이상하잖아요. 뭘로 봐도 두 사람은 공통점이 없는데. 그러다 이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아버지가 꽁꽁 숨겨놓고 가버린 스위스 은행 계좌. 맞죠? 그거 알아내려고 둘이서 어울리는 거 아니에요?”


너무 직접적으로 물어보니 지현우는 할 말을 잃었다. 뭐라고 해야 하나?


“뭐라고 말해야 할지. 자꾸 모르는 말을 하니까 그냥 좀 화가 나려고 하네요. 안 그래도 기분이 뭣 같은데 모르는 사람 붙잡고. 이게 무슨 행동인가요?”


현우는 일어났다. 지호의 행방을 찾아야하는데 자꾸 유산 얘기만 꺼내는 인간들 틈바구니에 끼어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더러워졌다.


“가게요? 커피 다 안 마셨는데.”


대답할 가치도 없다. 현우가 커피전문점을 나가는데도 박지나는 말리지 않았다. 대신 현우를 따라 나왔다.


“어디 가요?”

“알거 없습니다.”


“이왕 가는 거 알고 가면 좋잖아요.”

“네?”

“같이 가요. 나도 다 마셨어요. 커피는 분위기인데 분위기가 싸해서 맛이 싹 달아났어.”


기가 막히다.


“그쪽은 내가 어디 가는 줄 알고 같이 가겠다는 거에요?”

“그쪽 아니고, 박지나.”

“네, 박지나씨. 왜 날 따라오냐구요?”


현우는 짜증을 냈다.


“따라가는 게 싫으면 그냥 같은 방향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내가 많이 별로인가? 이렇게 대놓고 까여도 괜찮을 스타일은 아닌데.”


말하면서도 박지나는 계속 지현우를 따라왔다. 자기발로 따라오는 걸 못 오게 할 수도 없고 현우의 마음은 불편하기만 했다. 그래서 걸음을 빨리했다. 그런데 박지나의 걸음걸이가 더 빨라지더니 바로 옆에서 걷는다.


“나도 걷는 거 좋아해서 하루에 한 시간은 꼭 걸어요. 오늘은 현우씨 덕에 낮에 많이 걸었으니 밤에는 안 걸어도 되겠다. 그런데 진짜 어디가요? 혹시 목적지가 없는 거에요?”


현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도 박지나는 혼자서 말했다.


“원래 이렇게 마구잡이로 걸을 때는 두 가지 중에 하나인데. 실연당했거나, 빚을 너무 많이 졌거나. 어느 쪽이에요?”


따지고 보니 둘 다에 해당된다. 처음 본 여자에게 속마음을 들켰다. 그래도 대답하고 싶지는 않았다. 어떻게 말하나? 둘 다라고.


“설마 둘 다는 아니죠? 그래도 이렇게 걷다가 저쪽으로 뛰어들거나 하면 안돼요.”


박지나는 걷는 속도를 늦추지 않으면서 한강 쪽을 가리켰다. 꼭 한강물에 뛰어들라는 소리처럼 들리기도 했다.


“이봐요. 그만 좀 따라오면 안돼요?”

“왜요? 그만 걷게? 벌써 힘들어요?”


한계다.


“도대체 이러는 이유가 뭡니까? 당신 같은 사람들은 나 같은 사람이 사람으로도 안 보이나본데 이쪽도 사정이 있고 기분이라는 게 있어요. 그러니까 제발.”

“제발,.. 뭐?”


“꺼져요.”

“와, 이런 말 처음 들어. 신선해. 알았어요. 꺼지면.. 가면 되는 거죠?”


현우는 대답하지 않고 걷기 시작했다. 따라오지 말라는 의사를 확실히 전하면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박지나가 현우에게 외쳤다.


“당신 내 타입이야!”

이전 11화11. 그녀를 만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