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그녀를 만나다.

by 시sy

처음 눈을 뜬 포에버월드의 공기에서 솜사탕 맛이 났다.


현실세계에서 마지막 느낌은 답답함이었다. 마취성분이 섞인 공기를 들이마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포에버월드의 공기는 아무리 들이쉬어도 허파에 바람이 가득 찬 느낌이 들지 않는다.


윤지호는 숨을 멈췄다. 그녀가 듣기에 이곳은 수퍼컴퓨터 안의 디지털 세상이다. 애초에 산소를 호흡하게 설계되지 않았다. 30초가 지나자 답답함이 느껴졌다.


‘진짜? 나 죽었는데 숨 쉬어야 해?’


어떻게 되나 볼 요량으로 더 참았다. 얼굴이 빨개지고 답답해 미칠 것 같은 고통이 몰려온다. 그러자 곧 그녀의 상태창이 머릿속에 뜨며 묻는다.


system>> 지호님, 고통 강도를 줄일까요?


지호는 고개를 흔든다. 마음속에서 ‘싫다’는 생각을 하자마자 상태창이 사라지고 고통이 계속된다. ‘이렇게 계속 참으면 진짜 죽는 걸까?’


아니었다. 2분이 지나자 숨 쉬지 않아도 다시 편해졌다. 고통은 사라졌다. 숨 쉬지 않는데도 죽지 않고 답답하지도 않다니.. 더는 참을 이유가 없기에 다시 공기를 들이켰다. 역시 달콤하다.


포에버월드에서 살아있다는 느낌은 달콤함이었다. 현실세계와는 정반대다. 그곳에서 살아있다는 느낌은 씁쓸함이었으니까.


침대에서 나와 앞으로 살게 될 집안을 살폈다. 침실에서 거실로 나가자 바다같이 큰 강이 넘쳐흐른다. 저녁 어스름에 짙푸르게 채색된 대형 유리창 밖으로 꿈꿔왔던 파란색 풍광이 펼쳐졌다. 조그만 1인용 식탁 위에는 와인병과 와인잔이 놓여있고, 창문이 조금 열려있지만 전혀 춥지 않다.


얼마나 실제 같은지 보기위해 와인을 따라 조금 마셨다. 향긋하고 텁텁하고 조금 달다.


‘이런 게 와인 맛이었나?’


진짜 와인 맛이 기억나지 않았다. 실제 좋은 와인을 마셔본 기억도 없다. 그러니 뭐가 진짜 와인 맛인지 알 방법이 없다.


서재로 보이는 방으로 들어갔다. 자신의 취향을 알고 있는 지현우의 꼼꼼한 배려가 보인다. 3면이 책으로 가득한 책장이 있고 책상 위에 아이보리색 노트북이 있었다. 노트북을 켜보니 똑같이 윈도우가 뜨고 한글이 있다.


‘컴퓨터 안의 컴퓨터라니.. 여기서도 글 쓸 수 있겠구나. 조금은 살아갈 만하려나..’


지호는 책장 안의 책들을 구경하다가 한권을 뽑았다.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원작은 모두 7권이지만 국내번역은 12권으로 예정돼 있었다. 원작의 마지막 3권이 작가가 죽고 출판된 것처럼, 국내번역 마지막 4권이 번역되지 못하고 번역가가 중도에 바뀌었다. 그 탓에 다 읽지 못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책장에는 12권 모두 꽂혀있었다.


‘이것만 다 읽고 죽을까’


산책을 나섰다. 해가 지고 가로등이 없는데도 완전히 깜깜해지지 않는 건 이상했다. 무작정 강변을 따라 걸었다. 손에는 처음 뽑은 책 한권을 들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권. 다음 번역이 나오길 기다리며 몇 년을 쉬었더니 책의 내용이 가물가물해 처음부터 다시 읽기로 한 것이다.


걷다가 발이 아프면 잠시 쉬었다. 이렇게 오래 걸어본 것도 얼마만인지 몰랐다. 그녀가 이렇게 잘 걸을 수 있는지도 몰랐다. 계속 걷다보니 배고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는데 정확하지 않았다. 죽기 전 몇 달 동안 음식을 씹어 삼켰던 기억이 없다. 병원에서 수액을 맞다보면 허기도 없고 식욕도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배고프다는 배를 잠깐 만져주자 금세 허기가 사라진다. 포에버월드, 여러모로 이상한 곳이다. 발 아픈 것도 마찬가지다. 더는 걷지 못할 것처럼 아프다가도 조금만 쉬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하나도 아프지 않고 몇 킬로는 거뜬히 걸을 수 있었다.


그렇게 걷기만 하다 해가 뜨는 것을 보게 됐다. 강 위로 해가 뜬다. 서울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가짜라는 것을 알면서도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일출을 천천히 구경하고 다시 걸었다. 강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길고 장대하다. 한강보다 큰 것 같다.


오전이 끝나갈 무렵 창공의 태양이 딱 책읽기 좋을 각도로 햇빛을 뿌린다. 마침 벤치가 보인다. 생전에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강변에서 책을 읽다니..


그렇게 만났다. 박장우라는 거주민을. 나름 호감 가는 외모의 남자. 그래봐야 더는 살아있지 않은 영혼의 부산물이다.


“안녕하세요.”


남자가 말을 걸어온다. 현실세계였다면 무시하고 일어나서 가버렸겠지만 지호는 그러지 않았다. 자신은 더 이상 살아있는 인간이 아니니 이제까지 해왔던 모든 습관은 버려도 된다. 금기되는 건 없다. ‘죽기밖에 더 하겠어’라는 말은 ‘죽었는데 뭘 더해’라는 말로 바뀌었고 ‘죽었는데 뭘 못해?’라는 말도 가능하게 했다.


“안녕하세요.”


똑같이 인사했다. 남자의 얼굴을 한번 보고, 살짝 웃음 짓고, 읽고 있던 책의 부분으로 돌아갔다.


“그리하여 눈을 뜨는 순간 그는 자신이 몇 달 전에 다른 나라에서 잠이 들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권>


지금 이 순간 윤지호가 경험하고 있는 것을 백년도 더 전에 저자는 경험한 것일까? 지호는 백일몽에 빠졌다. 자신이 마르셀 프루스트가 되어 자기 방 침대에 누워 온갖 상상을 하고 있다. 지금의 윤지호는 프루스트의 상상 속 인물이다. 상상 속 인물이 저자에게 말을 건넨다.


“읽고 있는 책이 뭐요?”


백일몽이 깨졌다.


“네?”


독서가 방해 받았지만 화내지 않았다. 이곳은 화낼 가치가 있는 곳일까?


“못 들었소? 읽고 있는 책 제목이 뭐냐고 묻지 않소?”


그는 30대 외모에 비해 말투가 노인 같았다. 얼굴이 조금 화난 표정이다. 지호는 책을 덮고 표지를 보여줬다. 제목이라면 말해주지 않아도 충분히 크게 적혀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들어본 것 같은 제목인데. 이런 걸 왜 읽어?”


처음에는 ‘안녕하세요’로 시작해서, ‘책이 뭐요’라고 말 걸더니, 이제 반말로 말한다.


“왜 함부로 말하는 거죠? 예의가 없나요? 아니면 이곳에서는 예의 같은 건 필요없다는 건 가요?”


지호는 화난 표정으로 박장우를 노려봤다. 포에버월드에서 처음 지어본 표정이 화난 표정이다. 자연스럽지 않다.


“어, AI 아니야?”

“AI요? 인공지능 말이에요? 그러는 그쪽은 AI인가요?”


지호는 상황을 파악하고 박장우에게 물었다.


“이거 미안합니다. 내가 착각했습니다. 아침부터 계속 짜증나는 일만 나다보니 나도 모르게 예의를 못 지켰소. 그런 의미에서 차 한잔 사고 싶은데.”


참으로 고전적이다. 80년대 소설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남자가 여자를 만날 때 하는 수작.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됐어요. 착각했다면서요. 이곳에 온지는 오래됐나 봐요? 성함이...?”

“아, 내 이름은 박장... 아니.. 박시후요. 박시후입니다. 그리고 여기 온지는 햇수로 4년 정도 됐구요..”


박장우는 너무 당황해서 어떤 방식으로 말해야 할지도 까먹었다. 자기 실제 나이가 70이 넘지만 30대 중반은 어떻게 말해야 자연스러운 것인지 생각하느라 정신없다. 그런데 이 여자 자신을 불쌍한 눈으로 쳐다본다.


“그럼 지금 제 나이 때 정도에 이곳에 온 거네요.”


젊어 죽어 안됐다는 뜻이다. 자신도 마찬가지면서. 누가 누굴 안타깝게 보는 것인지, 박장우는 헛웃음이 나왔다.


“여기서는 나이를 먹지 않소. 않아요. 그러니까 그쪽만큼 젊은 나이에 온 것은 아니지. 나도 그쪽 이름을 알았으면 하는데.”


박장우가 말하는 것을 듣고 있던 윤지호는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가만히 보더니 또 웃었다.


“말하는 게 진짜 이상해요. 여기서는 그렇게 어중간하게 말해야 하는 건 아니죠? 그리고 내 이름은 윤지호에요. 남자이름이죠.”

“윤지호? 예쁘기만 한데. 이름에 남자이름 여자이름이 어딨어요? 잘 어울립니다.”

“예뻐요? 호호.”


지호는 웃었다. 웃는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지현우에게 웃는 얼굴 한번 못 보여주고 떠나왔다.


박장우는 지호의 웃는 얼굴에 홀딱 반했다. 젊은 여인의 자연스러운 웃음에서 이렇게 밝고 긍정적인 에너지가 나온다니.. 왜 몰랐을까? 그가 만났던 어떤 여자도 이렇게 웃어주지 않았던 것일까? 아니면 자신이 못 보았던 것일까?


‘이런 게 삶의 에너지다. 죽어서야 알게 되다니’


윤지호는 박장우가 그녀를 뚫어지게 보고 있는 것을 알고 웃는 표정을 지웠다.


“미안해요. 내가 웃어본지가 너무 오랜만이라서요. 어색하죠?”

“아뇨. 아주 자연스러워요. 덕분에 나도 오랜만에 즐거웠소. 그럼 방해하지 않게 그만 가보겠습니다.”


박장우가 일어났다. 진심으로 이 여자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집에 가면 자신도 같은 책을 읽어보리라 다짐했다. 남는 게 시간이다. 영화도 드라마도 다 봤는데 이제부터 독서를 한다? 좋은 생각이다. ‘왜 이 생각을 못 했지?’


“벌써 가시게요? 조금만 더 이곳에 대해 알려주세요. 전 이곳에 온지 하루밖에 안 됐거든요.”

“겨우 하루? 그러면 아무것도 모르겠구려. 아니. 모르지요?”


박장우의 이상한 말투에 지호가 또 웃었다. 박장우는 미칠 것 같았다.


“내가 원래 말투가 이상합니다.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말고. 자 뭐부터 한다? 그럼 이곳에서 아무것도 안 먹어봤겠네. 내가 좋아하는 레스토랑이 있으니 그곳에서 음식부터 맛보는 게 어떨까요? 아무래도 이곳에서 가장 많이 하게 될 일이 먹는 일이니까.”

“식사요? 좋은 생각이에요. 아까부터 배고픈 것을 참고 있었거든요.”


지호도 일어났다. 박장우의 기분이 좋아진다.


“배고픈 걸 참아요? 그러면 안 되지. 갑시다. 저쪽으로 조금만 가면 됩니다. 아니면 택시 부를까요?”

“택시도 있어요?”

“당연히 있지요. 원하면 인력거도 부를 수 있소. 아니면 헬리콥터?”

“호호호. 재밌는 사람이네요. 박시후씨.”


드디어 누군가가 그의 새 이름을 불러줬다. 박시후,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박시후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이전 10화10. Missing. 사라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