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장우는 어젯밤도 잠을 오래 잤다. 자겠다고 마음 먹고 침대에 누우면 순식간에 잠이 들고, 별다른 조치를 하지 않았다면 20분에서 40분 사이에 저절로 눈이 떠진다. 그러면 필수 수면은 마친 것이다. 만약 조금 더 자고 싶다면 알람을 맞추면 된다.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는 알람이 아니라 정해진 시간까지 잠자는 알람이다.
몸은 죽고 의식만 남은 상태인데도 꿈을 꾼다. 포에버월드 생활이 단조롭다보니 살아있을 때만큼 버라이어티하게 꿈꾸진 않지만 잔상은 확실히 남는다. 좋은 꿈, 나쁜 꿈.
무려 5시간을 잤다. 잠이 긴 만큼 꿈도 길다. 기껏 생을 연장하겠다고 포에버월드까지 오고서 잠으로 시간낭비하고 싶진 않았다. 그런데 신체가 젊어지니 잠도 더 자고 싶다.
‘젊어져서 그런가? 늦잠은 젊은 놈들의 특권이니 말이야’
하긴, 앞으로 원하는 만큼 더 살 수 있는데 시간 아까울 것도 없다. 스위스 은행에 신탁으로 맡겨둔 재산은 저절로 불어나고 있고 ST시스템이 존속만 한다면 돈 없어서 영면에 드는 일은 없을 것이다.
문제는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인데... 몸이 젊어졌어도 그다지 생활이 바뀌지 않았다. 알고 지내던 거주민들이 난데없는 ‘박시후’의 등장에 낯설어하는 것을 빼면.
“그럼 박회장님은 어디 가셨소?”
“영면에 드셨습니다. 여기 생활도 지겹다면서.”
“그쪽은 박회장님의 아들이고?”
“네.”
“거참, 젊은 양반이 안 됐네. 어째 부자(父子)가 몇 년 상관에 그런 일을 당했을꼬?”
같이 죽은 처지에 자기보다 얼마 못 살고 죽었다고 우월감을 느끼는 것 같다.
“결대로 사는 거죠. 운명이라 생각하면서.”
“젊은 사람 말하는 게 중늙은이구만. 운명이 어딨어? 죽어도 죽지 못하는 게 요즘 세상인데.”
꼭, 죽고 싶은데 억지로 포에버월드에 온 것 같이 말한다. 하고있는 꼴을 보니 기본계약 거주민이다. 영면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몰라도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식들 등골 빼먹고 있을 게 뻔하다.
“네. 그럼 노세요.”
예전 같으면 아침에 만난 기념으로 F머니 좀 줘서 보내겠지만 그러지 않았다. 고작 외모가 바뀌었을 뿐인데 예전의 짠돌이로 돌아간 것인가?
“허, 예전 그 양반은 손이 커서 좋았는데. 자식은 자식인가 보네. 갑시다.”
끝까지 아쉬워한다. 박장우는 고소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몸이 젊어진 뒤 운동을 시작했다. 조깅코스는 강변공원 한바퀴, 실제로 뛰는 느낌을 받고 싶어서 통증 강도를 살아있을 때와 같은 ‘일반’ 모드로 맞췄다. 운동한다고 근력이 붙지도 않고 더 건강해지는 것도 아니지만 운동이 주는 쾌감이 좋았다.
‘이 맛이지!’
젊어진 뒤 거의 유일하게 좋은 것 같다. 젊은 여자를 꼬시는 건 일찌감치 포기했다. 우선 홈타운에 40대 이하 여자는 몇 되지도 않고 취향도 아니었다. 게다가 대부분 결혼한 채로 죽어서 아웃라인으로 면회하는 남편이 있다. 저승에 면회라니.. 환장할 일이다. 하긴 박장우 본인도 누구보다 자주 아들과 면회하고 있지만.
=아버지 몸은 좀 맞으세요?
“맞고 할 게 어딨어? 내 몸인데. 너도 내 몸 보이지? 어때 보여?”
=좋네요. 잘 기억 안 나지만 아버지 젊을 때와 똑같아요.
“당연히 똑같지. 마음 같아서는 박보검처럼 만들어달라고 하려다 참은 거야. 넌 잘 있냐?”
꽤 오랫만에 아들의 안부를 물었다. 죽은 주제에 산 사람을 걱정하는 게 너무 말도 안돼서.
=감동입니다. 아버지. 제 걱정을 다 하시고. 뭐 더 필요한 건 없어요?
“없어. 필요한 거 있어 봐야 여기서는 안 되는 거뿐이고. 이제 드라마, 영화도 다 봐서 밤에 뭐해야 할지 모르겠네. 그거 빼고는.”
=좀만 더 기다리세요. 내년에는 안나푸르나 등반코스 신설된대요. 거기 눈구경이 스위스하고는 차원이 다르다는데.
“스위스? 넌 머릿속에 스위스 은행밖에 없지?”
=아니에요. 우연이에요. 여튼 잘 지내세요. 또 연락할게요.
오늘 조깅은 꽝이었다. 나름 페이스 조절해 가며 잘 뛰고 있는데 나이도 어린 것들이 빠르게 옆을 지나치며 박장우에게 시비 걸었던 것이다. 얼굴이 실제 죽은 나이대로라면 40대 후반에 불과한데 박장우가 어리다 생각해 함부로 대했다. 게다가 통증 강도를 최하로 낮췄는지 조깅을 100미터 경주하듯 내달리며 주변에 온갖 민폐를 끼치고 있다.
“어린놈! 저리 비켜!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게.”
“뭐야?”
매너 없는 건 이승이나 저승이나 똑같다. ‘저런 것들은 포에버월드에 올 게 아니라 지옥에 직행해야 하는데. 돈 있으면 개나 소나 이곳으로 오니’
입맛이 쓰다. 젊음이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긴 커녕 짜증만 증폭시킨다. 박장우는 조깅을 포기하고 터벅터벅 걸어 자주 가는 식당으로 향했다.
홈타운에서 가장 좋아하는 한식당인데 이곳의 장점은 진짜 사람 종업원이 있다는 것이다. 할 일 없는 거주민이 소일거리도 하고 F머니도 벌 목적으로 직접 음식을 가져다준다. 그런데 그마저도 틀렸다. 오늘은 종업원 중 진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대신 젊고 예쁘장한 AI 종업원이 그에게 다가왔다.
“어서 오세요. 손님. 뭘 준비할까요?”
여기까지는 비슷하다. 그러나.
“오늘 뭐가 좋아?”
“네에. 오늘은 신선한 명태알로 만든 알탕과 송로버섯으로 향을 낸 대구머리찜, 그리고 투플러스 등급 한우 등심이 좋습니다.”
“아주 메뉴를 읽어라 읽어!”
“네에. 1번 9첩반상에 고등어 구이, 2번 된장찌개 백반, 3번 갈치 조림...”
진짜 읽는다.
“그만!”
밥맛도 떨어졌다. 밥 안 먹는다고 진짜 배고픈 것도 아니다. 포에버월드에 사는데 음식은 기호품이지 필수품이 아니다. AI 종업원은 뭘 해야 할지 몰라 무표정하게 서있기만 한다.
“꺼져!”
말 그대로 촛불 꺼지듯 AI는 사라졌다.
집으로 걸어오는데 햇볕이 따갑게 느껴졌다. 이곳의 시간은 현실과 똑같이 흐른다. 날짜도 똑같고 서머타임도 있다.
‘11월에 웬 햇볕이 이리 따가워. 프로그램 오류는 아니겠지?’
손으로 햇볕을 가리며 다시 걷는다. 그러다 노인들 쉬어가라고 만든 벤치가 보였다. 강이 내려다보이는 곳이다. 강물은 잔잔하게 흐르고 있다. 무한 리플레이처럼 보이지만 들어가면 차갑고 물에 빠지기도 한다. ‘쓸데없는 것만 디테일하게 만들었어’
그런데 어떤 젊은 여자가 벤치에 앉아 책을 읽고 있다. 포에버월드에 와서 처음 본 광경이다.
‘벤치에서 책 읽는 여자. 오 참신한데?’
박장우는 슬그머니 그녀 옆에 앉았다. 어차피 포에버월드 시스템이 만들어 놓은 AI라고 생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