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지호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그곳은 집도 병원도 아니었다. 천장도 벽도 출입문도 온통 하얀색, 꼭 천국에 온 것 같다. 그러나 지호는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미래는 항상 기대만 못하기 때문이다. 죽음은 하얗지도 그렇다고 검지도 않을 것이다.
정신을 차려보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려다보는 지현우가 있다.
“여긴?”
“모털 컴퍼니 클리닉이야.”
“너 진짜..”
지호는 말할 힘이 없다. 죽음이 닥쳐왔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다. 감각세포 하나하나가 죽어간다.
“말 하지마. 안 해도 알아. 그러니까 내가 말할게. 이제 다음번은 없어. 의사가 한번만 더 정신 잃으면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거래. 지금이 마지막이야.”
지현우는 윤지호의 얼굴을 부드럽게 만졌다. 지호는 간신히 힘을 짜내 현우의 손을 밀쳐냈다.
“그러니까... 이대로 죽게... 놔둬. 부탁...이야.”
“나도 부탁이야. 날 위해서 내가 하자는 대로 동의만 해줘.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게.”
지호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현우를 노려봤다. 싫다는 뜻이다. 계속 현우가 말했다.
“고백할 거 있어. 싫은 니 병원비 마련하느라 여기저기서 돈을 빌렸는데 이 방법 아니면 갚을 방법이 없어. 갚지 못하면 나도 어떻게 될지 몰라. 그러니까 날 위해서, 널 위해서가 아니라 날 위해서는 해줄 수 있잖아?”
“뭐..? 어떻게..”
“잘 들어봐. 어떤 부자가 있는데 그 사람이 포에버월드 거주민만 할 수 있는 일거리를 부탁했어. 니가 그 일만 들어주면 니 병원비는 물론이고 의식전송에 들어가는 비용도 모두 마련할 수 있어. 그러니까 넌, 진짜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살아있는 날 위해 한 가지만 해줘. 그리고 나서도...”
지현우는 말을 잠시 끊었다. 말뿐이라도 그녀가 죽는다는 말을 자기 입 밖으로 내고 싶지 않았다. 호흡을 가다듬고 마른 침을 삼켰다.
“그리고 나서도 니가 정말 죽고 싶다면 포에버월드 안에서 영면에 들어가면 돼. 약속할게. 그건 진짜 죽음이니까. 또 언제든 할 수 있고.”
전부 거짓말은 아니다. 병원비 때문에 빚을 진 것도 맞고, 박민혁이 원하는 일만 해주면 의식전송 비용뿐 아니라 포에버월드에서 원하는 만큼 살 수 있는 돈을 받을 수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유일한 거짓말은 ‘날 위해서’가 아니라는 것.
윤지호는 생각했다. 아직도 생각만큼은 자력으로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도 정신이 맑을 때뿐이다. 원인 모를 두통이 찾아오면 생각도 자유롭지 않다. 다행히 지금은 정신이 맑다. 현우 말대로 죽기 전에 잠깐 깨끗한 정신이 돌아온 것이다.
현우는 사실을 말하고 있을까? 모르겠다. 오직 그녀를 잃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빚을 졌다’는 거짓말을 하고 있을 수 있다. 그런데 거짓말이 아니라면? 그녀 때문에 그녀가 죽고 나서 현우가 고통을 겪어야 한다면?
지현우가 말했다.
“이제 여기 다른 사람들이 들어올 거야. 그때 그들이 묻는 말에 니가 동의한다는 의사표시만 해줘. 그러면 끝나는 거야. 알았지?”
윤지호가 누워있는 방에 의사와 변호사가 들어왔다. 변호사는 법적 동의절차를 진행하고 의사는 사망선고를 하기 위해서다. 변호사가 물었다.
“윤지호씨는 본인의 자유의사로 모털 컴퍼티가 시행하는 의식전송절차에 동의하십니까?”
지호는 꼼짝도 않고 가만히 있다. 지현우는 애가 탄다.
“동의하십니까?”
응답하지 않는다.
“이제 두 번만 더 묻겠습니다. 그때까지도 동의표시를 하지 않으면 동의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하겠습니다. 동의하십니까?”
‘제발’ 지현우는 소리내서 윤지호에게 부탁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동의절차상 누구도 간섭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지막입니다. 동의하십니까?”
“네.”
지호가 대답했다. 고개를 끄덕인 것도 아니고 눈동자를 움직인 것도 아니다. 또렷한 목소리로 대답한 것이다.
“의식전송 절차에 동의하신 거 맞죠?”
변호사가 다시 묻는다.
“네.”
지호는 마지막 대답을 끝으로 눈을 감았다. 지현우가 외쳤다.
“이제 두 분은 나가주시죠. 시간이 급합니다. 의식이 완전히 끊기기 전에 진행해야 합니다. 어서!”
의사와 변호사는 클리닉 병실을 나갔고 지현우는 윤지호의 입에 플라스틱 투명마스크를 씌웠다.
“지호야. 고마워. 정말 고마워. 이제 한숨 잔다고 생각해. 일어나면 내가 전화할게. 자세한 건 그때 얘기해.”
지호는 현우의 말을 이해했다는 뜻으로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이승에서의 마지막 몸짓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