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11시, 눈을 떴다. 박장우가 가르쳐준 대로 알람을 11시에 맞추니 정확하게 눈이 떠진다. 눈을 뜬 채 침대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천장을 본다. 아무 느낌 없다. 정말 아무것도.
몸을 누르는 피곤함이 없는 대신 상쾌한 기분도 들지 않는다. 그냥 온 세상이 쾌적한 병실 같은 느낌이다.
‘지금 난 뭘까? 난 살아있는 걸까?’
몸을 일으켰다. 차분하게 온몸의 감각을 느끼려고 노력하면서 사뿐히 걸어 거울 앞에 갔다.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지만 내 몸같이 느껴지지 않는다. 꿈과 비슷하다. 손발이 보이지만 내 몸에 붙어있는 것 같지 않다. 가끔은 그녀가 3인칭으로 보이는 것 같다.
노트북을 켰다. 부팅시간이 없다. 켜는 즉시 화면이 들어오고 프로그램이 시작되는 느낌도 없이 창이 열린다. 모든 게 번쩍하면 나타나고 번쩍하고 사라진다.
‘신기루 같아’
지난 번에 쓴 마지막 문장부터 다시 시작하려는데 한 글자도 쓸 수 없다. 이유를 모르겠다. 살아있을 때와 똑같이 생각할 수 있고, 모두 기억나는데 소설만 쓸 수 없다는 건 이상하다.
전화벨이 울렸다.
=박시후입니다. 지금 그리 가도 될까요?
좀 딱딱하지만 자꾸 들으니 그의 말투에 적응된다.
“그럼요. 오세요.”
얼마 안 있어 박장우가 도착했다. 멋지게 차려입었다.
“어서 오세요. 소설 때문이라면 실망할 거에요. 그 뒤로는 한 줄도 못 썼거든요.”
“그래요? 실망입니다. 하지만 괜찮아요. 오늘은 다른 목적으로 왔으니까. 나랑 어디 좀 갑시다.”
“어디를.. 요?”
“작가여행 같은 거라고 칩시다. 마침 소설도 안 써진다고 하니 좀 다른 풍광을 보면 도움되지 않겠소?”
그러면서 윤지호의 아래위를 훑어봤다.
“아무리 더러워지지 않는다 해도 매일 같은 옷만 입으면 지겹지 않아요? 옷장에 보면 옷이 더 있을 거요. 여행가기 좋은 옷으로 입고 나와요.”
지호는 망설였다. 이제 좀 아는 사이라고는 하지만 같이 여행이라니.. 그러나 동시에 안 될 게 뭐 있나 생각했다. 꿈같은 세상, 꿈속의 꿈, 한번 더 꾼다고 무슨 상관있을까?
“이 중에서 가고 싶은 곳을 골라봐요.”
박장우가 내민 팸플릿을 보니 갈 수 있는 여행지 목록이 적혀있다. 세계 어지간한 도시는 다 있었다. 지호는 거의 안 가본 곳이다.
“파리 어때요?”
“짜증나는 인간들이 너무 많소.”
“베니스는..요?”
“너무 가짜 티가 나요. 만들 거면 제대로 만들 일이지.”
“모스크바.”
“원래도 볼 것 없는 곳인데..”
지호가 말하는 것마다 퇴짜 놓다보니 박장우가 민망해졌다. 다음번에는 뭐든 오케이하겠다고 다짐하는데.
“프라하도 있네요?”
“탁월한 선택이오. 거기로 갑시다.”
프라하 구시가지 광장을 지나 카를교를 향했다. 이곳까지 여행 온 거주민은 많지 않았다. 비교적 새로 생긴 곳이라 여행경비가 비싼 탓이다. 현실세계에서 여행 가는 것과 비교해도 싸지 않다.
“내가 예전에 실제로 가봤을 때 이 다리 위에는 사람들이 늘 바글바글해서 건너가기도 싫었는데 여긴 한산해서 좋습니다.”
“그래요? 전 사람 많은 거 좋은데, 절대 못 가보겠네요.”
실제 프라하는 못 가봤다는 말이다. 박장우는 조금 씁쓸해졌다.
“여기와 별로 다를 것도 없어요. 프라하는 정말 똑같이 만들어놨네. 정말 똑같아. 이쪽으로 와봐요.”
박장우는 카를교 위의 여러 조각상 중 성 요한 네포무크의 동상에 지호를 데려갔다.
“여기만 이렇게 깨끗한 이유를 모를 거요.”
박장우가 가리킨 곳은 네포무크의 동상 제단에 부조로 새겨진 그림이었다. 다리 위에서 사람이 떨어지는 모양인데, 다른 곳은 녹슬어도 유독 그 부분만은 노랗게 반들반들하다.
“여기에 손을 대고 소원을 빌면 소원이 이뤄진다고 하니 사람들이 하도 만져 대서 이렇습니다.”
“그래요?”
소원이라는 말에 지호는 자기도 모르게 손을 가져다 댔다. 동상의 차가운 느낌과 맨질맨질한 느낌이 동시에 든다. ‘이렇게 느껴지는데 살아있지 않다’
“뭘 빌었소?”
지호가 소원을 빌었다고 생각한 박장우가 물었다.
“그냥 꿈이 깨지 않게 해달라고..”
“꿈이라니, 설마 지금이 꿈이라고 생각합니까? 나도 꿈이고?”
“아닌 것은 알지만, 꿈 같고 꿈이라고 믿고 싶어요. 난 죽었으니까.”
지호는 카를교 난간에 기대 다리 밑으로 흐르는 블타바 강을 내려다봤다.
“레테의 강이라고 알아요? 그리스신화에서 하데스가 있는 저승으로 가기 전에 레테의 강물을 한 모금 마시면 과거의 모든 기억이 지워진대요.”
“기억을 모두 지우고 싶소?”
“네.”
“왜?”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면 지금 살아있다고 생각할 테니까요.”
박장우도 지호와 같이 블타바 강을 쳐다봤다.
“저 강이 진짜 강이라고 생각하면 진짜고 가짜라고 생각하면 가짜가 되는 거요. 지금 생활도 진짜라고 생각하면 진짜인 것이지 굳이 가짜라고 생각할 건 없지 않을까 하는데. 내 말이 틀렸나요?”
“맞아요. 신들이 보기에 인간의 삶은 전부 가짜일 수도 있으니까.”
지호가 조금 목소리를 밝게 하며 대답했다.
“재밌는 얘기인데. 사는 게 가짜라니. 하긴 내가 좀 많이 살아봐서 아는데 진짜 사는 건 참 엿같아요.”
엿같다는 말에 지호가 돌아본다.
“어떤 점이요? 아, 그냥 지금 말한 걸 내 소설에 쓸 수 있을까 해서..”
박장우는 머뭇거렸다. 이 여자에게 과거를 얘기해도 될까?
“젊었을 때는 남의 것을 뺏으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나이 들고 나니 내걸 지키려고 난리였지. 이렇게 말하고 나니 내 인생 참 간단하네. 허허.”
지호가 이상하다는 얼굴로 쳐다본다.
“도대체 시후씨는 나이가 몇이에요? 얼굴은 그렇지 않은데 말하는 것만 보면..”
“나이 들어 보인다고요? 원래 사람은 겉만 보고 모르는 겁니다.”
박장우의 대답을 들은 지호가 건조하게 웃는다.
“상관없어요 그냥 얼굴이랑 말투가 매치가 안 돼서 그렇지. 그것도 적응되니까 괜찮아요. 우리가 뭘 할 것도 아니고.”
“뭘 말이요?”
“몰라요.”
말하다말고 지호는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뭘 찾아요?”
“돌멩이 같은 거 없나 해서.. 강물에 던져 보려구요.”
카를교 위는 방금 청소한 것처럼 완벽하게 깨끗했다. 돌멩이는커녕 휴지조각 하나 없다. 당연하지만.
박장우는 주머니를 뒤적거리다 휴대폰 모양의 물건을 꺼냈다.
“이걸 던져요.”
“네? 휴대폰 같은데?”
“비슷하지만 그냥 콜센터에 전화하는 용도밖에 안 돼요. 난 또 사면 되니까. 자.”
지호는 망설였지만 또, 같은 생각이 났다. ‘안 될 게 뭐 있어? 꿈같은 건데’
휴대폰을 받아 있는 힘껏 던졌다. 하지만 그리 멀리 날아가지 않고 강물에 풍덩 빠졌다.
“거봐요. 진짜랑 똑같지. 아니면 들어가 볼래요? 좀 춥지만, 센서티브 낮추면 수영도 가능하고요.”
지호는 방금 빠트린 휴대폰을 계속 보고 있었다.
“그러게요. 못 할 거 없죠.”
난간 위로 기어 올라간다.
“어, 어?”
박장우가 말릴 새도 없이 지호는 카를교 난간 위에 비틀거리며 섰다. 바람이 불지 않아 그렇지 바람만 세게 불어도 떨어질 듯 위태하다.
“위험해. 어서 내려와요!”
지호는 위험하다 외치는 박장우를 돌아보며 슬프게 미소지었다.
“이번엔 정말 끝이면 좋겠는데요. 아니겠죠?”
뛰어내렸다. 박장우의 눈에는 그녀가 떨어지는 모습이 슬로우비디오처럼 느껴졌다. 강에 빠지는 소리는 들리지 않고 그녀가 강물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 위로 하얀 물거품이 부서진다. 꿈속 인어공주는 거품으로 사라진다.
박장우는 순간 이곳이 포에버월드라는 것도 잊고 그녀를 구하기 위해 강물에 똑같이 뛰어내렸다. 강물의 차가움에 머리끝이 쭈뼛 서는 순간, 그가 수영을 잘했었는지 잠깐 생각했다. 기억나지 않았다. 지금은 강에 빠진 윤지호를 구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물속에서 눈을 뜨고 지호를 찾아 두리번 거렸다. 강물은 생각 이상으로 깊어서 바닥은 보이지 않고 물밑은 까맣게만 보였다. 물속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숨 막힌 것 같이 답답해졌다. ‘이 여자 어디에 있는 거야? 추워 죽겠네. 먼저 통증 센서티브를 낮춰야 하는데’
뭐부터 해야 할지 몰라 정신없이 지호를 찾는데 어느 순간, 태양빛이 블타바 강물 속을 비추면서 뮤지컬 조명같이 느껴지는 수면 아래에서 윤지호가 꼿꼿이 몸을 세운 채 둥실 떠 있는 것이 보였다. 허우적 거리지 않고 너무나 자연스럽게...
박장우는 그녀가 괜찮은지 보려고 온 몸을 헤저어서 지호에게 가까이 갔다. 가까이서 보니 그녀는 물속이 아닌 것처럼 눈을 뜨고 있고 그를 발견하자 반갑게 웃기까지 했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물의 흐름에 맞춰 물결치면서 흔들리고, 입고 있던 옷도 꼭 춤을 추는 것처럼 팔랑 거렸다.
‘어떻게?’
박장우는 도저히 숨을 참지 못하고 수면 위로 올라갔다. 두 팔로 퍼덕대며 가슴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다시 그녀를 찾아 물속으로 들어갔다. 윤지호는 수면 아래로 들이치는 햇빛을 조명삼아 여전히 같은 모습으로 떠 있었다. 게다가 춤을 추듯 팔을 움직이며 천천히 돌고 있었다. 믿어지지 않았다. ‘정말 꿈이라도 꾸는 건가?’
지호는 그를 보더니 손가락으로 수면 위를 가리켰다. 올라가라는 것이다. 그가 먼저 올라가고 그녀가 천천히 따라 올라왔다. 그리고 그녀는 정말 인어처럼 부드럽게 헤엄치면서 강가로 향했다. 박장우도 뒤처지지 않게 있는 힘을 다해 물장구치며 그녀를 따랐다.
블타바 강과 카를교가 멀리 보이는 노천카페에서 둘은 젖은 옷이 마르게 난로를 쬐며 앉아있다. 테이블 위에는 석양처럼 붉은 와인이 있고, 멀리 프라하성의 뾰족한 첨탑이 보였다.
“오길 잘한 거 같아요. 정말 감사해요.”
왜 그랬냐? 미쳤냐? 어떻게 한 거냐? 할 말이 너무 많았지만 지호의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에 박장우는 할 말을 모두 잊었다.
“별걸 다... 쑥스럽게. 대신 다음에는 다른 데 갑시다. 강 없는 곳으로.”
“시후씨는 안 추워요?”
“별로 안 춥소. 아까부터 감도를 낮춰놔서.”
강물에서 나오자마자 그는 센서티브부터 낮췄다. 그런데 윤지호는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얼굴은 백지장처럼 하얗고 입술마저 창백하다.
“왜 떨고 있어요? 센서티브 조정할 줄 몰라요?”
“알아요.”
“그런데 왜?”
“살아있는 기분을 느끼고 싶어서요.”
이 여자, 할 말 없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난 추운 건 딱 질색이라...”
그러면서 담요를 가져와 그녀에게 덮어줬다.
“이래야 더 살아있는 거 같지. 이게 실제라면 당신은 벌써 얼어 죽었소. 이 계절에 강물에 뛰어들다니..”
“고마워요.”
“제발 그렇게 고맙다고 하지 말아요.”
“왜요?”
“그러니까.. 그런 게 있소. 제기럴.”
박장우는 앞에 있던 와인을 벌컥벌컥 마셨다.
“다른 건 몰라도 술은 확실히 가짜 같아요. 포에버월드를 만든 자식은 술을 별로 안 마셔본 게 분명합니다.”
“진짜 술은 어떤데요?”
“마시면 취하죠.”
“여기는요.”
“어지럽고 졸리기만 합니다. 큭큭.”
“호호호.”
지호는 즐겁게 웃었다. 물속에서 본 풍경은 살아서는 절대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하늘에서 투명한 빛이 쏟아졌다. 헤엄치지 않아도 떠 있을 수 있고, 숨 쉬지 않아도 괜찮았다.
“아직도 과거를 잊고 싶습니까?”
박장우가 물었다.
“아뇨. 부질없는 생각은 그만 둘래요. 할 수 있는 일을 하려구요.”
“소설 쓰는 거 말이요?”
“네.”
“그 소설 말이요. 뭘 쓰려는 겁니까? 내 말은, 재미없다는 게 아니라 재미는 있는데 읽다보니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 싶어서. 꼭 말해주지 않아도 됩니다. 그냥 궁금해서.”
지호도 두 손으로 와인잔을 잡고 조금 마셨다. 여전히 진짜 술과 구분되지 않는다. 그녀로서 진짜와 가장 비슷한 게 술 같다.
“르상티망.”
“르상.. 뭐요?”
“르상티망. 질투, 시기심, 그로 인한 복수 같은 거에요.”
“그러니까 복수 이야기라는 거군.”
“네. 세상에 대한 복수죠.”
“어떤 사람이 아니라 세상에 대해 복수를? 그런 게 가능할 리 없잖소?”
“그래서 르상티망이에요. 저 같은 약자는 실행에 옮길 힘이 없으니까..”
또 쓰게 웃는다. 그녀의 웃음을 맛본 것처럼 박장우의 입맛도 써졌다.
“어떤 놈인지 살아있을 때 내가 봤으면 가만두지 않았을 텐데.”
“또 들었어요.”
“들으라고 한 말이요.”
“살아있을 때 시후씨를 봤으면 좋았겠어요.”
“실망했을 겁니다. 그건 확실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