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이 써지지 않는 날에는 책을 읽었다. 소설은 늘 안 써지니 책 읽는 시간만 점점 늘어났다. 답답하게 긴 프루스트의 만연체를 읽어내는 것에도 요령이 붙었다. 파리, 게르망트 부인의 살롱에서 벌어지는 수다는 뭐 이리 길고 상세한지, 그네들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는 것 같다.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한 연회의 안주인은 좌우에 도열한 그저그런 귀족부인들의 입발린 아첨을 무성의하게 받아넘기며 가식적인 미소를 띄우고 있다. 파티에 초대 받아 방금 살롱에 들어온 신사는 모자를 벗어둘 곳을 찾아 두리번거리지만, 은쟁반에 파티음식을 받쳐온 시종은 신사의 부름을 무시하며 제 갈 길을 찾아 총총히 사라진다.’
프루스트는 뭘 쓰려던 것일까? 인생의 마지막 3년을 병원에서 죽어가며 오직 기억에 의존해 글을 쓰고 있는 모습이 상상된다. 평생 구현되지 않은 스스로의 욕망과 기존 문인들에 대한 질투, 어머니와 과거에 대한 동경, 그리움. 그러한 것들도 결국 세상을 향한 르상티망 아니었을까
“의사들의 그 저주받을 바보 같은 소리에 기죽지 마시오. 멍청한 자식들이오. 당신은 퐁뇌프 다리만큼 오래 버틸 거요. 당신이 우리 모두를 묻어 줄거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6권>
잃어버린 시간 속의 ‘스완’이 죽었고 지호는 6권을 다 읽었다. 절반이 넘은 것이다. 포에버월드에서 생활이 절반이 지났고 절반이 남았다.
책을 덮고 노트북을 열었다. 이제 소설을 써야 한다.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냈다. 검지손가락 끝으로 캔을 따려는데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여러 번 만지작거리다가 어설프게 뜯어낸 캔맥주 입구에서 거품이 새어 나왔다. ‘치익’하고 흘러나온 거품이 테이블 위에 지저분하게 퍼졌다. 모든 게 엉망이다.
간신히 쓰다 만 소설 끝에 한 문장을 더 보탰다. ‘왜 아무 생각 안 나지?’ 지호는 생각을 쥐어짜기 위해 눈을 찡그리며 키보드의 ESC버튼을 노려봤다. 그때,
머리가 아팠다.
심한 건 아니지만 생각지도 못한 두통이 생기자 놀랐다. 놀랐는데도 소름이 끼치거나 심장이 두근대지는 않았다. 생경하다. 그리고 두통을 인식하자 두통은 곧 사라졌다.
지난 몇 년을 이유도 없이 그녀를 괴롭혔던 두통, 그녀를 죽음에 이르게 한 고통이 다시 시작되는 걸까?
산책을 나섰다.
얼마나 홀가분한가? 준비도 필요 없이 미닫이문을 열기만 하면 나갈 수 있다. 화장할 필요도 없고 옷을 신경 쓸 필요도 없다. 그냥 숨만 쉬고 사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이 필요한 이승과 다르다. 유지보수가 필요없는 육체, 이걸 육체라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의식만 존재하는 삶도 이럴 때는 꽤 괜찮다.
넘어질 걱정 없이 눈 감고 길을 걸으며 마르셀 프루스트처럼 가장 아름다웠던 기억을 꺼내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그녀의 첫 작품이 공모전에 당선돼 시상식에 갔을 때다. 심사위원 중 한 명이 운영하는 미술관의 1 전시관, 좌우 벽면에는 빨갛고 파란 대형 추상화가 걸려있고 전면에는 작은 연단과 의자들이 놓여있다. 그녀는 3명의 당선자 중 장편소설, 시(詩)에 이어 두 번째로 수상할 참이었다.
목재 천장 구조물에 매달린 조명은 은은한 불빛을 밝히고 있고, 비록 빌린 옷이지만 그녀의 드레스는 마음에 꼭 들었다. 다소 흥분해 홍조가 오른 얼굴, 부담스럽게 세팅된 머리, 화창한 미래를 보채는 두근거림. 지난한 무명생활과 이별을 앞두고 있었다.
그녀가 신고 있던 메리제인 슈즈가 딱딱한 대리석 바닥에 부딪혀 냈던 경쾌한 소리를 기억한다. 그날이후 미술관과 같은 바닥을 밟기만 하면 발바닥 느낌이 소환하는 그날의 추억에 잠겨 몇 번이나 행복해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행복은 너무 짧다. 대부분 영화와 소설이 그렇듯이 행복했던 장면은 여지없이 끝나고 편집됐다. 공모전 당선작가와 무명작가의 차이는 자존감뿐, 읽히지 않는 글을 쓰는 것도 똑같고, 그런 글밖에 쓰지 못하는 것도 같았다. 글이 밥이 되기를 원해 타협해서 쓰기라도 하면 글도 밥도 아닌 이상한 원고가 튀어나왔다. 그리고 3류 드라마의 클라이맥스 같이 병(病)이 찾아왔다.
눈을 떴다. 더 진즉에 떴어야 했다. 행복했던 추억이 끝나기 전에, 행복하지 않았던 대부분 인생이 스멀스멀 따라 나오기 전에.
“작가 선생, 산책 중이요?”
박장우다. 그는 아까부터 눈 감고 길을 걸어오던 윤지호를 보고 있던 중이었다.
“이거 우연이에요?”
지호가 묻자 박장우는 고개를 저었다.
“기다렸습니다.”
“언제부터요?”
“그냥 대충 매일, 시간 날 때마다. 시간은 거의 나니까, 그냥 우연히 만날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왜요? 집으로 오면 되잖아요. 전화해도 되고.”
“우연히 만나고 싶어서. 소설 쓰는데 방해하고 싶지 않기도 했고. 이렇게 만났으니 난 또 성공이요.”
“축하해요. 그럼 만난 기념으로 부탁 하나 해도 돼요?”
지호가 친근하게 묻자 박장우는 반색했다.
“부탁? 그거 아주 좋은 거요. 부탁해요. 어서.”
“병원에 좀 데려다주세요.”
“병원이라니 어디 아파요?”
“네, 머리가 조금.”
박장우는 어이없다며 쳐다봤다.
“내가 여기서 4년째 살고 있지만 아프다는 사람은 처음 봐서. 정말 머리 아픈 게 맞아요?”
“아까 좀 아팠는데 지금은 괜찮아요. 그래도 좀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박장우는 안도했다.
“여기 없는 게 몇 가지 있는데 대표적인 게 병원이요. 그다음 경찰서고. 시스템적으로 우리는 아플 수가 없다고 하던데. 어디 헛짓 하다가 팔다리가 부러져도 메인터넌스 받으면 몇 분 안에 멀쩡해지고, 속병이야 알다시피 있을 수가 없고. 그냥 착각 아닐까요?”
“그렇겠죠?”
지호는 별일 아니라고 생각하려했다. 그런데 아까 느낀 고통은 분명 두통이었다.
“그럼 다른 부탁이 있는데, 부탁이라기보다 해보고 싶은 것에 가깝긴 한데요.”
다른 부탁을 하겠다 하니 박장우의 표정이 다시 밝아졌다.
“뭐든 부탁하라니까. 말만 해봐요.”
“살아있을 때는 절대 할 수 없는 일을 해보고 싶어요.”
“그게 뭐냐니까요? 사람 복장 터지겠네.”
지호는 말하려다 말고 또 박장우의 눈치를 봤다. 박장우는 답답해 미친다.
“부탁, 뭐? 뭐? 말해봐요. 윤지호씨.”
“범죄요.”
“범죄?”
“네. 살아있을 때는 범죄 못 저지르잖아요. 그런데 여기는 괜찮지 않나 해서.”
“그것도 소설 때문이요? 소설 보니까 총도 쏘고 사람도 납치하고 하던데, 그거 실감나게 쓰려면 해 봐야하는 거 맞죠?”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그래도 고개를 끄덕였다.
“까짓, 그럽시다. 범죄. 뭘로 할까요? 살인? 강도? 사기?”
“에이, 그런 거 말구요. 그냥 도둑질 정도만.”
박장우는 안도의 한숨을 쉬웠다.
“다행이오. 사실 여기서도 살인 같은 건 문제가 크거든요. 사소한 건 대강 물어주고 하면 상관없지만 다른 거주민의 정신에 상처를 주면 오프라인으로 손해배상이 크게 들어올 수 있어서요. 보호자들끼리 정신적 피해보상 소송도 벌어지고.”
“살인하면 죽지는 않아도 정신적으로 힘들다는 거네요. 정신적 피해보상, 정말 말 되네요. 그래도 그냥 도둑질 정도는 괜찮겠죠? 살짝.”
박장우는 손사래를 쳤다.
“아무 문제없소. 나도 해보진 않았지만. 재미도 있을 것 같고. 계획을 제대로 짜서 영화처럼 멋지게 해봅시다. 그러다 잡히면 다 물어주면 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