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사후세계 1호 도둑

by 시sy

대부분 거주민들에게 포에버월드의 일상은 지루함의 연속이다. 돈 벌어 와야 할 직장이 없고 생존을 위한 위생 걱정이 없으며 먹는 즐거움을 포기하면 안 먹어도 의식 자체는 유지된다. 머리카락이 자라지 않으니 미장원에 갈 일도 없고 살찌지 않으니 운동할 필요도 없다.


입고 먹고 자고, 살아있는 인간에게 필수적인 대부분 행위는 육체와 관계있다. 의식만 존재하는 포에버월드에서 육체에 꼭 필요한 일들을 제외하고 나면 실상 남는 건 유흥뿐이다. 정신적 쾌락을 위한 오락에 모든 시간을 쓰다 보니 24시간은 너무 길다.


거주민 대부분은 남아도는 시간을 어떻게 써야할지 모른다. 거금을 들여 죽음을 연기하고 포에버월드에 존재하면서 하는 일이라는 게 시간낭비다.


“그럼 이렇게 집을 나갈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어요?”

“그렇죠. 밤이라고 해서 잔다는 보장이 없으니. 몰래 들어갔다가 거주민을 마주치면 우린 도둑이 아니고 강도가 되는 거요. 뭐 그것도 작가선생이 원한다면 같이 할 수 있지만.”

“아니에요. 그런데 이 집을 고른 이유가 있어요?”


박장우가 목표물로 잡은 집은 개인 수영장이 딸린 꽤 큰 저택이었다.


“도둑질이 해보고 싶다면서요? 뭐라도 훔칠 게 있어야 도둑질을 성공할 것 아니요? 가난뱅이 집에 들어가 봤자 기본계약에 포함된 생필품뿐인데 뭘 훔칩니까?”

“아.. 그렇구나.”


“거참 기본이 돼있지 않으니 도둑질도 못하고, 천상 작가선생은 글이나 쓰고 살아야겠소.”

“그런데 이 집 주인이 안 나가고 계속 있으면 어떡해요?”


“이 집 여자는 돈이 좀 있는 집 여자라서 이틀에 한번은 골프 치러 가니까 걱정 말아요. 노인들 전부하는 게이트볼이야 게임하다가 중간에도 돌아올 수 있지만 골프는 나가면 몇 시간은 기본이니까 우리가 여유있게 훔치고 나올 수 있을 겁니다.”

“어떻게 잘 아세요?”

“거야, 여기 오래 살다보니 어쩌다 좀 알게 돼서...”


박장우는 호기심 가득한 지호의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여자가 나오는지 집 안쪽 동향을 살폈다. 죽어서도 살다보니 별일이 다 생긴다. 돈 많이 벌려고 안 해 본 짓 없는 것 같았는데 도둑질을 해보게 될 줄이야. 상상도 못했다. 그런데 거사(?)를 앞두고 있으니 흥분되고 재밌다. ‘왜 진즉 이 생각을 못 해 봤지?’


마침 집주인 여자가 골프가방을 들고 나오는 것이 보인다.


“저기 봐요. 나오네. 준비됐죠?”

“네.”


지호는 목소리를 낮추고 여자가 나가는 것을 훔쳐봤다. 여자는 캐디백을 자동차에 싣고 출발했다. 작전개시 시간!


“자 이거로 얼굴 가려요.”


박장우가 검정색 복면 2개를 꺼내 한 개를 지호에게 줬다.


“이게 뭐에요?”

“보면 몰라요? 도둑질하면서 얼굴 훤히 드러내고 들어가게요? 도둑질의 기본은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는 것이지. CCTV가 있을 수도 있고.”

“CCTV가 있어요?”


그런 게 있을 리 없다. 도둑질 자체가 포에버월드 1호 도둑질이 될 것이었다. 사실 박장우는 이 도둑질 놀이가 끝나면 자진해서 배상할 생각이었다. 시스템 관리자가 로그기록을 살펴보면 거주민의 위치와 동선이 나오는데 어떻게 완전범죄가 가능할까? 그냥 지금은 윤지호가 하자는 대로 맞춰주다가 그녀 모르게 사건을 덮으려는 의도였다.


도둑질도 오락의 개념으로.. 현실세계에서는 돈으로 안 되겠지만 포에버월드에서는 돈으로 해결된다. 홍콩 클럽에서 술과 마약에 취해 돈 쓰나, 도둑질로 돈 쓰나, 같은 것 아닌가?


그래서 복면을 제안한 것이다. 이왕이면 실감나게 놀고 싶어서.

복면 쓴 지호의 얼굴을 보니 박장우는 실소를 참을 수 없었다. ‘너무 귀엽다’


집안에 들어간 지호는 뭘 훔칠 것인지 생각했다. 박장우의 말대로 특별한 건 보이지 않는다. 옷장에 다양한 옷이 걸려있는데 그녀 취향은 아니고, 화장대 앞에 화장품이 잔뜩 있지만, 그녀에겐 아무 소용없는 것들이다.


그러나 보석함 속의 주얼리가 눈에 들어왔다. 포에버월드에서도 다른 거주민을 만나니 귀금속으로 치장하고 싶은 욕구는 이해하지만 실제 없는 육체의 과시를 위해 이진수에 불과한 허상을 비싼 돈 주고 구입하다니.


‘허영에는 징벌이 필요하다’


지호는 보석함을 통째로 챙겼다.


“뭐 좀 훔칠 만한 걸 찾았소?”

“아뇨. 정말 별 거 없네요. 그래도 기분은 느낄 수 있으니까.”


지호는 훔친 보석함을 등 뒤로 숨기며 말했다. 박장우는 모르는 척했다.


“그럼 천천히 더 많이 훔쳐보시오. 시간 많으니.”


박장우는 도둑질에는 관심없고 지호를 보는 것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훔치는 물건도 취향, 그녀의 취향을 알아야 앞으로 더 잘해줄 수 있으니까.


지호는 작은 방에 들어갔다. 방에 가구는 하나도 없고 벽장만 있다. 벽장을 열었더니 여행가방과 모자, 각양각색의 여자구두가 있었다. 돈이 많다하더니 여행도 많이 다니는 모양이었다. ‘그래 여행밖에 없을 테지. 이 많은 시간을 뭐하겠어?’


그러다 태블릿처럼 보이는 조그만 장치를 찾았다. 켰더니 지도가 나온다.

‘여행용 전자 지도인가?’

훔쳤다. 그리고 방을 나왔다.


“이제 나가요.”

“벌써? 더 훔치지 않고? 뭔 도둑이 끈기도 없구만.”

“불량 도둑이니까요. 헤헤.”


윤지호와 박장우는 성공적인 도둑질을 기념하기 위해 조그만 파티를 열었다.


“도둑질 도와줘서 고마워요.”

“공범끼리 고맙다는 말하지 맙시다. 하하.”


박장우는 기분이 최고였다. 목표가 뚜렷한 나쁜 짓을 하고 나니 묘한 동지의식이 느껴진다.


“집주인이 돌아오면 깜짝 놀라겠죠?”

“당연히 그렇지 않을까? 누가 포에버월드에서 도둑 맞을 거라 생각하겠소?”


그러나 놀라움은 잠시일 것이다. 내일이면 박장우가 알아서 다 변상할 것이었다. 윤지호가 훔친 것보다 더 많은 F머니로.


“그런데 지호씨는 별로 신나 보이지는 않는데.. 이유가 있나요?”


박장우가 지호의 속마음을 들여다본 것처럼 말하자 지호가 힘없이 웃었다.


“그러게요. 불가능하다 생각했던 것도 해봤는데 좀 허무하고 그러네요. 원래 그런 거겠죠?”

“자꾸 허무하다고 그러는데, 사는 건 안 그런가? 사는 것도 늘 허무의 연속이지.”


“그런가요?”

“지호씨는 허무한 적 없었소? 목적을 이루면 이룬 대로 허무하고, 못 이루면 못 한 대로 허무하고, 애당초 불가능하면 그건 또 불가능해서 허무하고.”

“시후씨 말은, 살아있을 때도 허무했으니 이곳도 허무한 게 당연하다는 말 같아요.”


같은 또래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실상 박장우는 그녀보다 30살 이상 많다. 허무를 느껴도 그의 몫이 더 클 것인데 어찌 젊은 여자의 허무가 저리 크고 어두울까? 허무는 이룬 것보다 이루지 못한 것에 느끼는 것인가?


박장우가 죽음 대신 포에버월드를 택한 이유는 꽤나 단순했다. 더 살고 싶어서.

부친의 재산을 10배로 불렸는데, 그가 쓴 건 그 10분의 1도 되지 않았다. 두 번의 결혼은 모두 실패, 위자료를 많이 주지 않았다는 것이 그나마 성공.

수집한 최고급 승용차만 10대가 넘었지만 운전해 본 차는 2대, 그의 인생은 전부 이런 식이었다. 가진 건 많아도 해본 건 적다.

다 해보리라. 다 써 버리겠다고 선택한 것이 포에버월드인데, 고작 4년 만에 더 할 것이 없었다. 허무하다.


“소설 잘 안 써진다고 했죠?”

“네.”

“그럼 쓰지 마시오.”


박장우는 차마 그녀 얼굴을 보지 못하며 제법 단호하게 말했다. 지호는 그런 박장우를 보고 말한다.


“난 소설 안 쓰면 할 일이 없는 걸요.”

“이곳 사람들 대부분 할 일이 없소.”


“그럼 왜 굳이 이곳에 왔어요? 아무 의미 없잖아요?”

“사는데 의미가 필요하다는 건 편견이요. 누구는 안 그런가? 모두 의미 없이 사는 건데. 이제와 옛날 얘기를 하는 게 무슨 소용인가 싶지만, 나도 의미없이 살았소. 나뿐 아니라 내 주변 모두가 의미없이 살았소.”


뭔가 짠하다. 지호는 박장우의 손을 ‘톡’ 치면서 말했다.


“그래서 또 여기에 와서 무의미하게 살고 있다, 그런 말인 거죠?”

“나라고 무의미하게 사는 게 좋은 줄 압니까?”

“얘기해 봐요. 여기서 4년이나 지냈다면서요. 그동안 뭘 했어요?”


박장우는 지호가 건드린 손을 조금 움츠렸다. 마음 같아서는 콱 잡고 싶다.


“여행하고.”

“그리고요?”


“영화 보고.”

“또?”

“드라마도 보고.”


지호가 픽 웃었다.


“네, 여행, 영화, 드라마, 그 다음은요?”


박장우가 찡그렸다. ‘뭘 했지?’ 생각나지 않는다.


“영화를 좀 많이 봤소.”

“얼마나 많이요?”


“재미없는 거 빼고, 거의 다 봤소. 2번 본 것도 많고. 하루에 5개씩은 봤으니까. 한 5천 개는 봤을 거요.”

“우와. 그럼 거의 전문가겠네요. 가장 좋았던 영화는?”

“지금 뭐하는 거요?”


묻는 대로 대답하던 박장우가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지호를 바라봤다.


“그냥, 남들은 뭐하고 사나 해서요. 나보고 소설 쓰지 말라면서요. 그럼 나도 새로 할 걸 찾아야 하니까. 그래서요. 어떤 영화가 제일 좋았어요? 재밌는 거 말고.”

“재밌는 것 말고 좋은 것?”


“네, 좋은 것.”

“모르겠소.”


“설마 좋아하는 감정을 모르는 건 아니겠죠?”

“그럴 리가. 난 지호씨가 좋은데.”


박장우는 또 얼굴을 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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