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방해하려구요.

by 시sy

호텔 레스토랑 안에 들어가자 입구가 잘 보이는 위치에 앉아있던 박지나가 지현우에게 손을 흔들었다. 남들이 보면 연인을 부르는 것 같다. 지현우는 주변에 보는 사람 없는지 살핀 뒤 앞에 가서 앉았다.


“중요한 일이 뭡니까?”


박지나는 굳은 표정의 지현우를 보고도 방긋 웃었다.


“저녁 안 먹었죠? 식사하면서 얘기해요.”

“밥 생각 없어요. 얘기나 해요.”


주변을 둘러보니 한눈에도 비쌀 것 같은 곳이다. 이런 곳에서 밥 먹어본 적은 없다. 박지나는 종업원을 불러 식사를 주문했다. 2인분.


“밥 안 먹는다니까요?”

“나는 먹을 건데. 그리고 어떻게 1인분만 시켜요? 억지로 먹으라는 말 안 할 테니 앞에 놓고만 있어요.”


박지나의 행동을 뜯어보니 부잣집에서 자기 마음대로 하면서 살았던 게 확실하다. 어느 한 구석도 맘에 들지 않는다.


“중요하게 할 말이 뭐냐구요?”

“밥 먹고 말할게요. 좀 기다려요. 그 정도도 못 기다려요?”

“됐습니다. 더는 속지 않습니다.”


지현우는 일어났다.


“걸리는 게 있으니까 나온 거 아니에요?”


박지나의 얼굴을 보니 뭔가 알고 있는 건 분명해 보인다. ‘다시 앉아야 하나?’ 현우는 망설였다.


“그러지 말고 앉아서 같이 식사해요. 난 그쪽이 너무 딱해서 도와주려는 거니까. 요즘 거울 안 보죠? 마지막으로 제대로 식사한 게 언제에요?”


기억나지 않았다. 지호 문제로 밤낮없이 궁리하다보니 시간 내서 밥 먹은 기억은 없다. 허기지면 빵이나 과자를 먹었다. 다리에 힘이 빠진다. 현우는 다시 앉았다.


“잘 생각했어요. 요즘 누가 따라다니지 않아요?”

“그게 무슨...?”

“아니면 됐구요. 오빠 성격에 그냥 있지 않을 것 같아서.”


돌이켜보니 누가 따라다닌 것 같기도 했다. 그럴 리 없다고 무시했지만, 그게 그거였나?


“날 왜 따라다녀요?”


현우가 물었지만 식사가 나오는 바람에 대화가 멈췄다. 안 먹어도 된다던 박지나는 스테이크가 나오자 자기 것까지 덜어서 더 먹으라고 현우 접시에 올려준다.


“자, 먹죠.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산 사람은 살아야죠.”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 지호도 했던 말이다. 누굴 위해 그녀를 포에버월드에 보냈을까? 진정 그녀를 위해? 그녀를 볼 수 없다 생각하니 죽을 것 같은 자기 자신 때문이 아니고?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데, 잘 살고 있나?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매 순간 불안에 쫓기며..


내키지 않지만 박지나가 썰어준 스테이크부터 한 조각 입에 집어넣었다. 아무 입맛이 없을 줄 알았는데 고기 육즙이 혓바닥 가장자리에 닿자 벌써 기운이 나는 것 같다. 천천히, 조금씩 빨리 고기를 씹어 넘겼다.


“거봐요. 먹어야 뭐든 한다니까요. 여긴 포에버월드가 아니잖아요.”


볼수록 궁금한 여자다. 이 여자 목적이 뭐지? 당연히 박장우의 유산이겠지? 스위스 은행.


“아무리 이래도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없어요. 궁금한 게 있으면 그쪽 오빠하고 얘기하든가. 제발 난 빼줘요.”

“오빠하고 얘기가 되면 내가 이러고 있겠어요? 그쪽이 굶어 죽거나 말거나 신경도 안 쓰지.”

지나치게 솔직하다. 박민혁도 돌려 말하는 걸 하지 못하더니, 돈이 많으면 솔직해지는 걸까? 거리낄 게 없으니까.

“윤지호라고 알죠?”


윤지호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고기를 썰던 현우의 손이 멈췄다. 조금 전 씹어 삼킨 고기조각이 식도에 걸린 것 같다. 대답 못 하고 박지나의 얼굴만 봤다. 눈이 반짝인다.


“그걸 어떻게...?”


박지나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짓더니 그녀의 접시에 마지막 남았던 스테이크 조각을 입에 넣고 오물거리며 먹는다. 그리고 물을 조금 마시고 냅킨으로 입 주변을 천천히 닦았다.


“나는 뭐 모털 컴퍼니에 아는 사람 하나 없을 거 같아요? 최근에 오빠가 웬 모르는 여자를 포에버월드에 넣었다면서요?”

“네...”


그녀가 아는 것은 거기까지인가? 현우는 남은 음식을 마저 먹는 척했다.


“남을 위해 땡전 한푼 안 쓰는 그 인간이 자선사업을 했을 리는 없고, 숨겨놓은 애인인가 했더니 그것도 아니고. 그럼 남은 건 한 가지인데..”


현우는 다시 멈췄다.


“스위스 은행하고 관련 있겠죠?”

“나한테 묻지 말라니까요? 알아도 답해줄 수 없는 거 알잖아요?”


“호호, 긍정으로 알겠어요.”

“그게 답니까? 그럼 나는 가도 되는 겁니까?”


“아뇨. 진짜 재밌는 건 이제부터인데. 내가 겨우 그거 확인하자고 그쪽을 불렀겠어요? 나도 오빠랑 같은 피가 흐르고 있어요. 이유 없이 이런 곳에서 돈 쓰지는 않는다구요, 물론 그쪽은 예외지만.”

“예외요?”


“말했잖아요. 내 타입이라고.”


현우도 나이프와 포크를 들어 접시 옆에 놨다. 식사는 끝났다.


“다 먹었어요? 더 먹어도 되는데.”

“충분합니다.”


박지나는 종업원을 불러 접시를 치우게 하고 디저트를 주문했다. 지현우는 말리지 않았다. 어떻게 해도 그녀는 하고 싶은 대로 할 것이다. 주도권을 뺏긴 그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디저트가 나올 때까지 둘은 아무 대화도 하지 않았다. 박지나는 커피와 함께 치즈케이크를 조금 베어 먹으며 진심으로 맛을 음미하는 듯했다. 부자의 여유는 저런 것인가? 부자면서 강자여서 그런가?


“그런 눈으로 보지 말죠? 아까도 말했지만 난 도와주려는 거에요.”

“자꾸 뭘 도와준다는 겁니까?”

“윤지호씨가 그쪽 애인이죠?”


심장이 두근대고 머리가 멍하다. 이대로 있다가는 그냥 멈출 것 같다.


“괜찮아요. 나만 알고 있으니까. 아직은.”


아직은? 그렇다면 박민혁도 곧 알게 될 것이라는 뜻? 현우는 박지나를 노려봤다. 노려본다고 이 여자의 속을 알 수는 없다.


“계속 아무 말 안 하고 있을 건가요? 그럼 이것도 사실이라고 하고. 이제부터가 문제인데, 지현우씨의 여자친구를 오빠가 포에버월드에 넣은 이유가 뭘까요? 스위스 은행 계좌 때문이라면 어떻게 하려는 걸까. 내 머리가 그리 좋지 않아서 창의적인 생각은 안 나고, 이 여자를 통해서 계좌를 알아내려고 하는 것 같은데 그게 그리 쉽나? 더구나 이 여자는 지현우씨의 애인인데. 미인계를 쓰려는 건 아닐 테고.”


현우의 표정이 찡그려졌다.


“설마 그런 거에요? 아무리 죽었다지만 자기 여자친구를 돈 때문에 늙은이한테 붙여서 계좌를 알아내려고?”

“아닙니다. 그런 거 아니에요!”


부정했다. 남의 입을 통해서라도 그런 얘기는 듣고 싶지 않다. 사실이 아니라도.


“그럼 다행이고. 그렇게까지 쓰레기라면 더 얘기하고 말 것도 없었는데. 이제 뭘 말하려고 했더라?”

눈을 깜박이며 고민한다. 정말 잊은 건가? 아니면 잊은 척하는 건가?

“난 그냥 지호를 살리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대로 보낼 수는 없어서.”

“하긴 포에버월드가 돈이 많이 들긴 하죠. 유지비도 비싸고.”


사실이다. 기본계약으로 포에버월드에 입주시키는 것만이라면 고급 수퍼카 한 대 값이니 무리하면 못할 것도 없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F머니 충전하고 각종 업그레이드 비용을 감당하려면 매년 비슷한 비용을 투입해야 하는데, 어지간한 재력으로는 유지하기 어렵다. 그래서 꽤 많은 보호자들이 계약기간을 채우지 못하고 중도에 해지한다. 해지는 곧 거주민의 영면을 뜻한다.


“계획이 뭐에요? 오빠 돈으로 포에버월드에 넣었으면 그 다음 계획이 있었을 거 아니에요?”

“없습니다. 다 엉망이 됐어요.”


현우는 고개를 숙였다. 말 상대가 없어서 하지 않았다뿐이지 망쳤다고 고백하고 보니 전부 끝난 것 같다. 박지나는 불쌍하게 쳐다봤다.


“곧 죽을 사람처럼 왜 그래요? 죽은 사람들도 멀쩡하게 살아있는 세상에서. 그러니까 내가 도와준다고 했잖아요.”

“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직 윤지호씨에게 아무 말 안 했죠? 계속 말하지 말아요. 윤지호씨를 사랑하잖아요.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런 말을 했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실수가 될 거에요. 같은 여자 입장에서 내 남친이 그런 말을 한다면, 나라면 다시는 보지 않을 거에요.”


“그럼 박민혁 사장은 어떻게 합니까?”

“그건 나도 생각해봐야죠.”


박지나에게도 뾰족한 수가 있는 건 아니다. 그냥 미루기만 하자는 건데.


“그쪽은 목적이 뭐에요? 날 도와준다고 하면서 실은 그냥 방해하려는 거잖아요.”

“맞아요. 난 오빠가 하려는 걸 방해하는 게 목적이에요.”


“왜요? 그런다고 그 돈이 그쪽 돈이 되는 건 아닌데.”

“스위스 계좌를 오빠가 알아내면 오빠가 전부 가지겠지만, 그냥 있으면 나한테도 기회가 있으니까. 아니면 끝까지 아빠가 쥐고 있든가. 둘 다 못 가지면 몰라도 오빠가 홀라당 다 가지는 건 절대 안 돼요. 그건 못 참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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