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완전판)
** 연재했던 단편소설을 조금 수정해서 완전판으로 재업로드 한 것입니다 **
"오랜만이다. 그동안 잘 지냈어?"
"응.. (생각한다) 아니, 넌 친구니까 솔직하게 말할게. 사실 잘 못 지내."
"흠, 별로 새롭지는 않군. 지난번에도 그랬잖아. 석 달 전인가?"
"맞아. 그때부터 계속 이래. 이런 상태야."
"한결같다는 측면에서는 그 정도면 잘 지내는 거야. 음식 주문했어?"
"어? 아니. 네가 주문할 거잖아."
"그렇지. 뭐 먹을래? 뭐 먹지?" (메뉴를 뒤진다)
"나한테 물어보는 거야?"
"혼잣말이야. 너야 늘 똑같잖아. 아무거나. 그런데 그런 메뉴는 어디에도 없거든. 보자. 그냥 정식 먹을까?"
"응."
"스페셜시켜도 되지?"
"응."
"그럼 일단 스페셜로 2개. 디저트는 나중에 시키자. 오케이?"
종업원을 불러 능숙하게 주문한다.
"어디까지 이야기했더라. 그래 네가 잘 못 지낸다고 그랬어. 그래 이번에는 어떤 고민이야?"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아."
"뭐가?"
"그녀."
"그녀? 아, 그녀? 잘 되고 있던 거 아니었어? 그때 같이 저녁 먹었다고 좋아라 했잖아."
"응, 밥만. 그다음에 진도가 안 나가. 계속 밥만 먹어."
"같이 밥 먹으면 된 거지. 커피도 마시고, 술도 한잔 할 거고."
"밥 먹고, 커피 마시고, 술 마셔. 하지만 그대로야."
"너 설마, 아직 키스도 안 한 거야?"
"못 했어."
"시도는 했고?"
"아니."
"그럼 안 한 거네."
"해보나 마나 실패할 것 아니까 안 한 거지. 결과적으로 못 한 거야."
"아, 새끼 쫀쫀하긴. 지금 그런 거 구분할 때냐? (종업원을 부른다) 여기요, 와인리스트 가져다주세요."
"불가능할 것 같아. 차라리 로또 맞는 걸 기대하는 게 낫겠어."
"야, 그래도 로또보다는.. 힘내. 인마. 와인 뭐 마실래?"
"피노누아만 빼고 아무거나."
"피노는 왜? 옛날에는 피노 좋아하지 않았나?"
"그때는 희망이 있었고. 지금은 없어."
"오케이. 피노 빼고 메를로는 괜찮지? 보르도 생떼밀리옹 할까? 가격이 좀 비싸긴 한데. 괜찮지?"
"응."
"내가 재미없나?"
"누구 기준으로? 나야 재밌지."
"너 말고. 다른 사람."
"다른 사람 누구? 모르는 사람들? 그걸 어떻게 알아?"
"그래도 대충은 알 거 아니야? 넌 아는 사람도 많고."
"(고민하는 척) 재밌는 편은 아니지. 그래도 다른 장점이 있잖아."
"장점 뭐?"
"아는 거 많고, 나이도 많고."
"나이 많은 게 장점이야? 단점인 것 같은데."
"꼭 그렇게 볼 것도 아니야. 요즘 여자들은 좀 안정적인 것을 원하는 애도 많거든."
"안정 싫은데."
"안정이 왜 싫어?"
"안정되면 안정이 깨질까 불안하잖아."
"그럼 지금 불안정한 건 괜찮고?"
"불안하지는 않으니까. 늘 그래왔고."
주문한 와인과 음식이 나왔다. 둘은 말없이 식사에 집중한다. 와인도 마신다.
"그녀가 왜 좋은데?"
"찾고 있는 중."
"그걸 이제 찾으면 어떡해? 이유가 있으니까 좋아한 것일 거 아니야?"
"좋은 건 보자마자 알겠던데? 그런데 왜 좋은 지는 모르겠으니까 지금 찾고 있어. 이상해?"
"엄밀히 이상한 건 아니지. 하긴 좋아하는 데에 꼭 이유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니니까. 그냥 좋은 거지."
"내 말이."
"그래도 좋은 게 있을 거 아니야. 이뻐?"
"내 눈에는."
"사진 있어?"
"있지만 보여줄 수는 없어."
"왜?"
"사귀는 사이가 아니니까."
"그게 무슨 상관이야?"
"사귀는 것도 아닌데 다른 사람에게 사진을 보여주는 건 예의가 아니니까."
"사진 있다는 건 같이 찍었다는 것 아니야?"
"아니, 내가 찍은 거 아니야."
"그런데 어떻게 가지고 있어."
"카톡 프사."
"프사면 실제랑 많이 다른 거 아니야?"
"똑같아."
"어련하겠어? 디저트 뭐 먹어? 아이스크림?"
"커피."
"지금 커피 먹으면 잠 못 자는 거 아니야?"
"어차피 잠 안 와."
"그 정도야? 누워만 있어도 그녀 생각이 막 나고 그래?"
"그녀 때문 아니고."
"그럼 또 뭔데?"
"학교 일."
"아, 맞다. 이번 학기부터 개론수업 맡았다고 했지?"
"응. 그런데 수강생이 너무 적어."
"철학개론이면 필수 아니야? 필수가 어떻게?"
"올해부터 필수 아니래. 서양철학사랑 둘 중 하나만 들으면 돼."
"헐, 철학개론이나 철학사나 그게 뭐가 달라? 사내경쟁이라도 시키는 거야?"
"교내경쟁."
"그래, 교내경쟁. 너네 학교도 별 치사한 짓을 다한다. 강사들 불러 놓고 이긴 놈만 조교수 시켜주겠다는 거야 뭐야?"
"설마."
"넌 그 안이한 태도가 문제야. 큰 그림을 봐야지. 학과에서 그렇게 나오는 데에는 뭔가 구리구리한 속내가 있다고."
"그런가?"
"확실해. 그러니까 절대 지지 마."
"어떻게? 학생들이 수강신청을 안 하는 걸."
"세일즈를 하란 말이야. 요즘 학원선생도 세일즈, 출판작가도 세일즈, 심지어는 회사 간부도 상향평가 잘 받기 위해서 인사고과 시즌 되면 세일즈 한다는데 너도 뭐라도 해야지!"
"뭘 하면 되지?"
"그러니까. 그래, 소문을 내. 네 강의 들으면 A학점이 하늘에 별처럼 쏟아진다고. 학점 잘 준다고 하란 말이야. 요즘 대학생들 학점에 엄청 예민하잖아."
"소문을 어떻게 내?"
"인스타에 올려."
"팔로워 25명인데?"
"괜찮아. 그중에 한 명 정도는 너네 학생이 있을 것 아니야."
"그렇지. 아는 제자도 있고."
"그럼 됐어. 거기에 올리기만 하면 그 제자가 알아서 다 입소문 내줄 거야."
"뭐라고 쓰지? 그냥 학점 잘 준다고 할 수는 없는데."
"흐음. 고민이 필요한 과제다. 뭔가 확실하게 의미를 전달할 수 있으면서도 애매모호한 표현으로 다.. 야. 그건 네가 잘하니까 연구해 봐."
"알았어. 그런데 다른 문제가 있어."
"기다려봐. 여기서 계속 있을 거야? 종업원들이 눈치 보는 게 영업시간 끝나는 것 같은데. 우리 2차 옮길까?"
"응."
"2차는.. 배는 부르니까 간단히 위스키바 어때?"
둘은 일어나서 자리를 옮겼다. 장소는 칵테일과 싱글몰트 위스키를 전문으로 하는 '그라츠'라는 bar였다.
"대만 위스키 어때?"
"별로인데."
"마셔봤어? 마셔 봤구나. 하긴. 난 안 마셔봤는데 대만 위스키 마시면 안 돼?"
"그러던지."
"(바텐더에게) 여기 카발란 클래식으로 2잔. 사이드는 치즈플레이트 주시고. (시영에게) 치즈 좋지?"
"왜 하필 대만 위스키야?"
"넌 대만 위스키가 왜 싫은데?"
"값에 비해 별로라서. 특징도 없고."
"그래? 네가 가성비 따지니까 안 어울리기는 하는데. 여하튼 난 안 먹어봤으니까. 오늘 마셔보면 알겠지. 그런데 너 진짜 모르는구나?"
"뭘?"
"우리나라에서 대만 위스키가 왜 유명해졌는지."
"왜 유명한데?"
"<헤어질 결심> 안 봤어? 거기서 탕웨이가 죽인 남편이 마시던 위스키가 카발란이야."
"겨우 그런 것 때문에 유명해진다고?"
"BTS 알지?"
"나도 그 정도는 알아. 가수잖아."
"RM도?"
"FM?"
"아니 표준 FM 아니고 RM, BTS 멤버야. 봐. 모르면서. 그 RM이 카발란을 좋아한다고 하니까 아미가 좋아하고.."
"요즘 군대에서 술도 마셔?"
"군대? 아미? 아미가 그 아미가 아니고. 말을 말자. 여하튼 그런 것 때문에 대만 위스키가 뜬 거야."
"정말?"
"요즘이 딱 그렇거든. 아무것도 아니다가 한 순간에 확 뜨는 거야. 그러니까 네가 인스타에 학점 잘 준다고 슬쩍 올리기만 해도 상황 역전될 거야. 뭐 안되면 다른 수도 있고."
"그게 말이야. 아무래도 그건 아닌 것 같아."
"왜? 인스타에 그런 거 올렸다가 걸릴까 봐? 걱정 마. 너 팔로워 25명이라며? 누가 본다고?"
"아니라, 나한테 너무 수강생이 몰리면 서양철학사가 힘들어질 텐데 미안하잖아."
"뭐가 미안해? 어차피 경쟁인데. 너 아니면 그놈. 그놈이 살면 네가 죽고."
"누가 그놈이야?"
"서양철학사 강의하는 놈이 있을 거 아니야."
"여자인데."
"그럼 그.. 그 여자. 그 여자를 물리치란 말이야. 여자라서 그래? 요즘 그런 게 어딨어? 무한경쟁사회에 일단 이기고 보는 거지."
"안돼."
"왜 안돼?"
"그 여자가 그녀야. 내가 좋아하는."
"(할 말을 잊었다. 당황하다가 바텐더에게 말한다) 여기요! 뭐 좀 물어볼게요. 대만 위스키는 왜 비싼 거예요? 마셔보니 별로 대단한 것도 아닌 것 같은데."
"(바텐더 말을 가로챈다. 정작 본인은 가로챘다는 것도 모른다) 엔젤스 셰어 때문일 거야."
"엔젤스 셰어? 위스키에 천사 몫도 있어? 아, 나 알아. 들어본 것 같다. 엔젤스 셰어. 그게.. 그러니까.."
"대만은 스코틀랜드 같은 곳에 비해 온도가 높잖아. 그러니까 오크통에서 숙성할 때 알코올이 더 많이 증발하거든. 그래서 숙성도 오래 안 하는 편이고."
"아, 원가가 비싸다는 거구나. 그냥 그렇게 말하면 되지. 뭘 그렇게 어렵게. 넌 쉬운 것도 어렵게 설명하는 게 문제야. 그러니까 수강생이 없지."
"내가 언제?"
"지금도 그렇잖아. 처음부터 네가 좋아하는 여자하고 강의를 다투고 있다고 했으면 이렇게까지 복잡하지 않았을 것 아니야."
"처음에 말했어도 복잡함이 사라지지는 않아. 그녀와 경쟁해야 하는 상황. 머리 아파."
"하긴 그렇네. 그래서 어떻게 할 거야?"
"정정당당하게 해야지."
"정정당당 좋아하시네. 남녀 대결은 처음부터 정정당당할 수가 없어. 더구나 예쁘다며?"
"예쁜 게 왜?"
"야, 여교수가 예쁘기까지 하면 너보다야 훨 낫지. 평판은 어때?"
"나야 모르지."
"그녀에 대해 아는 게 뭐야?"
"내 얘기를 잘 들어줘."
"듣기만 해? 자기 이야기는 안 해?"
"별로. 아,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대. 그리고 유산을 받아서 자기 집이 있고. 어머니하고는 따로 살고."
"유산이 얼만데?"
"그것까지 알아야 해?"
"너하고 수준이 비슷한지는 봐야지."
"글쎄, 옷 입는 것 보면 명품도 더러 있고, 지갑이나 가방도 다.. 잘 사는 것 같아."
"모른다더니 꼼꼼히도 봤네."
"그리고 가끔 밥을 사줘."
"밥을 사? 너한테? 왜?"
"왜냐니, 그냥 내가 몇 번 돈 내면 그녀도 내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래서 얻어먹었어? 네가?"
"응."
"헐, 별일이다. 솔직히 말해봐. 너 살면서 밥 얻어먹은 적 몇 번이나 있어?"
"그녀 빼고?"
"당연히 빼야지."
"글쎄, 약속이 많지 않으니까. 잘 기억나지 않는데. 맞다. 너도 예전에 밥값 한번 내지 않았어?"
"내가? 그랬나?"
"기억 안 나? 아닌가. 너 맞는 것 같은데."
"봐. 기억조차 없잖아. 그런데 너한테 밥을 샀다? 이거 사건이다. 사건."
"무슨 사건?"
"너 좋아하는 게 확실해."
"진짜?"
"아니다. 반대일 수도 있겠다. 선 긋는 거지."
"헷갈려. 그만해."
"우리 그냥 병으로 시킬까?"
"왜?"
"벌써 3잔씩 마셨는데 계산해 보니까 한 병 시키는 게 훨씬 경제적이야."
"저번에는 다양한 위스키를 마셔보고 싶다면서?"
"그랬나? 취하면 어차피 다 똑같아. 계속 한 잔씩 시키려니까 바텐더 눈치도 보이고. 어때?"
"그러든지."
"그럼 뭘로 한병 시키지? 네가 골라봐."
"피트향 강한 걸로 하자. 라프로익이나 아드벡 같은 거."
"난 피트향 싫은데. 꼭 화장품 먹는 것 같잖아. 그냥 좀 달짝 지근한 맛이 있는... 글렌 모린지 어때? 나 오리지널은 먹어 봤는데, (바텐더에게) 저기 라산타는 뭐예요? 비싸요?"
바텐더가 글렌모린지 라산타를 병으로 가져와 오픈했다.
"시간이 이렇게 됐나? 계속 떠들었더니 배고프다. 라자냐 하나 더 시킬까?"
"마음대로."
"야, 넌 성의 없이 맨날 마음대로 하래. 그러니까 네가 여자들한테 인기 없는 거잖아."
"여자들만?"
"쓸데없이 따지기는. 그래, 남녀 할 것 없이 인기 없어. 좋냐? 인기 없다는데."
"나쁘지는 않아."
"나쁘지 않다니. 아까는 인기 없어서 싫다고 했잖아."
"내가 재미없냐고 물었지. 인기가 아니라."
"그거나 그거나."
"사실 모두에게 재밌지는 않아도 돼. 그냥 몇 명에게만 재밌으면 좋겠어."
"몇 명 누구?"
"그녀 하고, 또... "
말이 중단됐다.
"그게 다냐? 더 없냐? 나한테는 재미없어도 돼?"
"내가 재밌기를 원해? 재미로 나 만나는 거야?"
"그건 아니긴 하지."
"사람들이 아무 조건 없이 그 사람만 좋아할 수 있을까?"
"갑자기 뭔 소리야?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데 이유가 있어?"
"외모가 마음에 든다거나, 성격이 좋다든가, 아니면 조건이나 능력, 직업 같은 거."
"아. 그 조건. 그게 뭐 조건이야. 그건 그 사람에게 포함된 거지. 외모, 성격, 직업도 안 보면 뭘 보고 사람을 만나? 다 똑같은 인간인데."
"그렇긴 하네."
"솔직히 말해봐. 그녀한테 잘 보이고 싶은데 방법을 몰라서 그러는 거지?"
"...."
"맞잖아. 이 형아가 좀 가르쳐줄까? 네 매력을 어필할 수 있는 방법."
"내 매력이 뭔데?"
"그야 당연히.."
"당연히 뭐?"
"... 그건 최후의 비장의 카드로 남겨두자."
"뭘 남겨두는데?"
"아 쫌. 너 그 집요한 거부터 버려. 그냥 넘어가는 게 없어. "
"알았어."
"너는 일단 아는 게 많아. 그리고 아는 걸 말할 때 눈이 반짝반짝해."
"정말 그래?"
"거기다가 가끔은 재밌어. 자만하지 마. 아주 가끔이니까. 그리고 어려운 내용을 알기 쉽게 설명하는 능력이 있어."
"학과에서 수강생이 늘 적은데.."
"그건 인마. 네가 홍보를 못하니까. 그래도 강의평가는 좋다면서?"
"조금"
"그러니까 일단 듣게 만들어야지. 강의를 들어야 좋은 것을 알고. 더 집중하고. 아! 지금 내가 뭔가 되게 맞는 말 한 것 같은데. 그래, 네 매력을 어필하려면 어필할 기회가 있어야 하는데, 기회를 얻기 위해서는 좀 후킹 할 수 있는 건수가 있어야겠다."
"후킹?"
"그녀를 유혹할 수 있는 건수 말이야."
"내가 유혹하라고?"
"그런 유혹이 아니라 너의 매력을 캐치할 수 있는 기회를 먼저 줘야 하는 거라고."
"어떻게?"
"있어봐. 나라고 탁탁 방법이 떠오르냐? 일단 레스토랑을 통째로 임대해. 그 정도는 가능하지?"
"왜 그래야 하는데?"
"드라마 보면 있잖아. 레스토랑 전체를 빌려서 프라이빗한 분위기를 연출하면서 더럽게 비싼 음식과 와인을 주문하고. 그러면 그녀가 딱 알아볼 거 아니야."
"뭘? 내가 돈 많다고?"
"아니, 이 남자 진심이구나."
"아닌데. 속물 같다고 생각할 것 같은데."
"해봤어?"
"아니."
"그런데 어떻게 알아?"
"아무튼 안 할래."
영호는 시영의 표정을 보고 하려던 말을 도로 삼켰다. 저런 표정을 지을 때 시영은 고집불통이다.
"라자냐, 내가 알아서 시킨다. (바텐더에게) 여기 시그니처 라자냐로 주시고, 토마토소스를 좀 적게 넣어 줄 수 있죠? 전에 보니까 좀 신맛이 강하던데."
시영이 받아 놓고 만지작거리기만 했던 위스키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잔을 들어 남아있는 노란 액체를 슬쩍 흔들어 보고는 마실까 말까 망설였다.
"난 매력이 없어. 누가 날 좋아하겠어."
"..."
"내가 매력이 없으니까 내 글도 매력이 없고. 책도 안 팔리고."
"..."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그 사이 주문한 라자냐가 나왔다. 영호가 포크를 들고 게걸스럽게 먹기 시작한다.
"라자냐 안 먹어? 내가 다 먹어도 돼?"
"응."
"여기 시그니처 라자냐 맛있는데. 아, 넌 먹어봤나?"
그라츠 바에 처음 온 손님은 잘 눈치채지 못하는 게 있다. 그중 하나는 음악이다.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거의 들리지 않지만 확실하게 있다. 재즈 선율.
시영은 무심결에 재즈 선율에 맞춰 건반을 치듯 손가락을 토닥거렸다. 처음에는 오른손으로만, 그러다가 왼손까지 슬그머니 올라와서 정말 피아노를 치는 것처럼 바 테이블 위를 노닐었다. 하얗고 기다란 손가락이 조명에 반짝이는 것 같다.
"요즘은 피아노 안 치지?"
"그냥 가끔."
"하긴 비싼 피아노 놀리면 뭐 하냐?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음대에 갈 걸 그랬어. 그지?"
"음악 계속했어도 내 인생이 달라지지 않았을 거야. 그 점에서는 부모님이 옳았지."
"뭐래? 말도 없이 잘 다니던 공대 때려치운 게 누군데. 아직도 눈에 선하다. 집에서 쫓겨나서 한밤중에 나 찾아왔던 일이."
"쫓겨나지 않았어. 내가 나왔지."
"그거나 그거나. 등록금 마련하다고 겨울 내내 알바하더니 기어코 철학자가 되셨지."
"철학자는 아니고."
"그래도 교수잖아."
"강사."
"야, 학생들이 너한테 강사님, 이렇게 불러? 교수님이라고 불러?"
"교수님."
"그럼 교수지. 교수가 별거냐? 대학에서 가르치면 교수지."
"달라."
"모르겠고. 네 엑스는?"
"잘 있어."
"당연히 잘 있겠지. 그 여자는 처음 봤을 때부터 느낌이 쎄 하더라고. 이혼절차는 완전히 끝난 거지?"
"이혼신고 아직 안 했어."
"왜? 그거 석 달 안에 안 하면 말짱 도루묵인 거 알지?"
"그런가?"
"야, 정신 똑바로 차려. 이혼 확인서 언제 받았어?"
"지난달에."
"아직 여유 있네. 그래도 잊지 말고 이달 안에 꼭 신고해. 다시 그 여자랑 엮이고 싶지 않으면."
"나랑 엮이고 싶지 않은 거겠지."
"자학모드 그만해. 넌 아무 잘못 없어. 그 여자가 이상한 거지. 얘기 그만하자. 기분 나빠졌어. 술 마셔."
그라츠 바에 남은 손님은 시영과 영호 둘 뿐이었다. 영호가 사방을 둘러보다가 바텐더에게 물었다.
"여기 몇 시까지 해요?"
바텐더가 못 듣는 것 같자 시영이 대신 대답했다.
"손님 없을 때까지. 갈래?"
"아니. 그러니까 좀 부담된다. 우리 때문에 퇴근 못하는 건 아니겠지?"
"글쎄."
"늦게까지 일하면 돈 더 주겠지?"
"솔직히 자신 없어."
"왜 네가 자신 없어? 네가 여기 사장이야? 혹시 여기도 샀냐?"
"아니. 그녀하고 잘 돼도 또 잘 안될 것 같다고."
"아, 그 얘기? 야, 이시영, 그런 건 일단 사귀고 나서 고민해도 늦지 않아."
"아니야. 미리 고민하는 게 맞아."
"네 결혼 때문에 그래?"
"응. 결과적으로 잘 안 됐잖아."
"미리 고민하면 다 잘 될 것 같아?"
"좀 낫지 않을까?"
"XX 한다. 그게 고민한다고 답이 나오겠니? 너 말이야. 내가 1시간 후에 뭘 할지 알아?"
"몰라."
"당연히 모르지. 그럼 그녀가 10분 후에 뭐 하고 있을지 알아?"
"모르는데. 자고 있지 않을까? 논문 쓰려나?"
"거봐. 10분 후에 사람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데 지금 고민한다고 안될 인연이 잘 되겠냐고?"
"..."
"그건 그렇고, 너 결혼한 거 말했어?"
"아니. 그런 말하면 부담되잖아."
"요즘 세상에 한번 다녀온 게 뭐 대수라고 부담이 돼. 그래도 잘 안 했다. 그거 말하면 말하는 대로 유세 부린다고 생각할 수도 있어. 솔직히 돌싱이 훈장은 아니지. 그런데 그냥 알 수도 있겠다."
"어떻게?"
"다른 사람이 말했을 수도 있지. 아니면 뉴스에서 봤을 수도 있고."
"설마."
"모르는 일이다. 너한테 관심 있으면 인터넷에 검색할 수도 있고 검색하면 네 이름 나오잖아. 인터넷 뉴스에 너 결혼한 것도 나왔고."
"그런 것도 검색돼?"
"당연하지. 너 결혼할 때 인터넷 언론사 왔다며?"
"이름도 모르는 곳인데."
"요즘 누가 언론사 이름보고 기사 보냐? 여하튼 알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 신경 쓰라고."
"어떻게?"
"그건 네가 알아서 해야지. 그런데 혹시 너 결혼한 것만 알고 이혼한 건 모르는 거 아닐까? 그래서 철벽 치는 걸 수도 있잖아."
"아니야. 그런 사이 아니라니까."
"아니긴, 딱 보니 그렇네. 그런 거에 엄청 민감한 사람들 있어. 이상한 점 없었어?"
"전에 이런 말을 하기는 했어. 날 뭐라고 불러야 하냐고."
"그래서?"
"그냥 아무렇게나 부르라고."
"이 바보가? 그랬더니, 뭐라고 불러?"
"그냥 안 불러. 보니까 딱히 호칭이 필요 없어도 되더라고. 멀리서 부를 일만 없으면."
"너는 뭐라고 부르는데?"
"나도 별로, 그냥 선생님."
"선생님 같은 소리 한다. 너네가 무슨 초등학교 선생님들이냐? 이선생님, 김선생님 하게?"
"김 씨인 거 어떻게 알았어?"
"김 씨야?"
"응."
"이름은? 내가 아는 사람이야?"
"아닐 듯."
"누군데?"
"이름까지 말하는 건. 넌 모르는 사람이야."
"내 생각에는 말이야.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는 건 너네 관계에 대한 확신이 없다는 것 같아. 역으로 좀 더 진행하고 싶다는 의미도 있는 것 같고. 일단은 말이야. 너 이혼한 것부터 말하는 게 낫겠다."
"결혼도 말 안 했는데."
"그니까 한번 다녀왔다, 이런 식으로 가볍게 툭. 결혼해 봤는데 금세 끝났다. 혹시 알아? 그쪽도 한번 다녀왔는지."
"그럴 수도 있나?"
"당연하지. 요즘 결혼하고 3년 되기 전까지는 혼인신고도 안 한다더라."
"난 했는데."
"너네는 인수합병이나 다름없으니까 계약서 쓰는 거고. 어차피 집안끼리 정한 정략결혼이었잖아."
"그 정도는 아닌데."
"그럼 연애한 적 있어? 썸 탄 적은, 없지?"
"좋았을 때도 있어. 나 처음 책 냈을 때 그게 주간 베스트셀러에 올랐더라고. 잠시지만."
"그런 적이 있었어? 하긴, 네 책이 은근 읽는 맛이 있지. 그래서 나도 완독 했잖아."
"정말? 다 읽었어?"
"전부 다는 아니고. 대충은 봤어. 그리고 평상시 네가 했던 말들이 많아서... 여튼 그게 베스트셀러가 됐다는 거지?"
"알고 보니 와이프가 사람들 시켜서 아름아름 사 모으게 했던 거더라고. 눈치 못 채게 조금씩, 여러 곳에서."
"헐. 진짜?"
"요즘 책이 너무 안 팔리니까 1주에 몇 백 권만 팔려도 인터넷 서점에서는 베스트셀러에 오른다고 하더라. 나도 몰랐어. 그래도 감동이었어. 그 정도로 내 생각해 준 사람은 와이프가 처음이었거든."
"어떻게 알았는데."
"그냥 알게 됐어."
"그래서, 말했어?"
"왜 그랬냐고 물었지."
"뭐라는데?"
"책이 좋은데 너무 안 팔려서 화나서 그랬대."
"대박. 역시 스케일이 남 달라. 인정. 그 정도면 감동할 만하다."
"맞아. 그때 좋았어."
"결혼 잘했네. 근데 왜 헤어진 거야?"
"잘 모르겠어."
"모르다니. 이혼하는 사람이 이혼하는 이유를 모른다고? 그게 말이 돼?"
"처음에는 당연히 이혼해야 하는 거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지금은 모르겠어."
"또 답답한 소리 한다. 말하기 싫어서 그래? 말하기 싫으면 하지 마. (바텐더에게) 여기 초콜릿 좀 더 주세요. 갑자기 단 게 확 당기네."
시영이 입을 꾹 다물자 영호는 서비스로 나온 초콜릿을 한 움큼 쥐고 우걱우걱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위스키병에서 술을 따라 물처럼 꿀꺽꿀꺽 마셨다.
"아, 써. 초콜릿 먹고 마시면 좀 달까 했더니. 그냥 달달한 칵테일이나 마실까? 시켜도 되지? (바텐더에게) 여기요!"
바텐더가 오기 전에 시영이 말했다.
"너도 대충 알잖아."
"내가 뭘?"
"내가 전에 말했잖아."
"전에 뭘 말했는데? 우리가 이야기한 게 한 두 개야? 그렇게 말하면 내가 어떻게 알아?"
"결혼한 이유."
"그야 그 여자 집안에서는 유통 플랫폼이 필요하고, 너네 집은 투자가 필요해서 결혼했다는 거? 그거야 신문에도 난 거잖아."
"그거 말고. 약속 있잖아."
"무슨 약속? 너 나한테 말고 다른 사람한테 말한 거 아니야?"
"내가 이런 거 말할 사람이 누가 있어?"
"없지. 그럼 꿈꿨나 보지. 나는 전혀 몰라. 아니면 내가 취했을 때 말했거나."
"결혼 조건이 있었는데."
"결혼 조건? 그런 거 진짜 처음 들어. 그렇게 중요한 걸 내가 까먹었을 리가 없잖아."
"결혼하면 학교 그만 다니고 회사에 들어가서 일 배우기로 했거든."
"네가? 왜?"
"그쪽 집에서 내가 경영에 참여해야 결혼시키겠다고 해서."
"햐, 정략결혼이라고 하지만 별거 다 한다. 설마 계약서도 있어?"
"결혼 계약서에 적지는 않았어."
"진짜 결혼 계약서를 썼다고? 난 드라마에나 있는 줄 알았다.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그러기로 약속했어"
"회사 들어가기로?"
"응."
"헐. 진짜 몰랐다. 그런데 너 회사 가는 거 끔찍하게 생각했잖아. 경영 같은 거 싫다고. 그런데 어떻게 그런 약속을 했어?"
"조교수 임용이 안 되니까. 난 뭘 해도 안 되는 건가 싶어서."
"뭘 해도 안 되는데 기업 경영은 되고?"
"그건 망쳐도 상관없으니까."
"망치다니 미쳤어? 너네 집이 재벌은 아니라도 100대 기업에는 들어가는데 그게 얼마짜리인데 망쳐?"
"상관없어."
"이게 이게 굶어봐야 정신을 차리지. 야, 엄밀히 그 회사가 다 너네 집 거냐? 주주들이 있고 직원이 있고, 그 회사 잘못되면 같이 망할 사람이 한둘이 아닌데 그걸 그렇게 무책임하게.. 이거나 마셔!"
영호가 시영의 잔에 위스키를 절반쯤 채워 앞으로 밀었다.
"왜?"
"벌주야. 그리고 다시는 그런 소리 하지 마. 진짜 벌 받는다."
시영은 잠깐 생각하다가 주는 대로 위스키를 다 마셨다. 그러나 초콜릿은 먹지 않았다. 물도 마시지 않고 그대로 입안의 쓴 맛을 느꼈다.
"넌 말이야. 문제가 하나 둘이 아니지만 제일 나쁜 게.."
"??"
"가진 것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거야."
"내가?"
"그래."
"내가 뭘 가졌는데?"
"진짜 몰라서 물어?"
"우리 집안? 그건 내 거 아닌데."
"네 것도 있잖아. 주식도 있고. 네 명의의 건물도 있고. 니 건물에 내 책방도 있는데 잊은 건 아니지?"
"알고 있어."
"말 나온 김에 월세 말이야. 너도 알다시피 요즘 책이 너무 안 팔려서 그런데 연말까지만 미뤄 줄 수 있어? 사람들이 북카페도 아닌데 책은 사지도 않으면서 신간 뒤적거리다가 서비스 쿠키와 음료만 먹고 그냥 나간다. 그러면 안 쪽팔리나? 인간적으로 안 살 거면 쿠키는 안 먹어야지. 그리고 예의가 없어. 인터넷으로 살 거면 나가서 하든가, 뻔히 보는데서."
시영이 영호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설마 월세 미뤄달라는 것을 거절하지는 않겠지? 그럴 리 없다. 자기 통장에 돈이 얼마나 있는지도 모르는 자식이 그깟 월세 몇 푼이나 한다고. 그런데 왜 이렇게 보는 거지? 내가 실수한 게 있나?
"네 말이 맞아. 집에 돈이 있으니까 공부도 한 거지. 잘 안 됐지만. 또 그러니까 그런 약속을 한 거고."
"알면 됐어. 회사 들어가기로 약속했고 결혼했고 그런데 뭐가 문제야?"
"출근을 못 했어."
"출근을 못하다니, 하루도?"
"응."
"하루도 출근을 안 했다는 거야? 가보지도 않고 그냥 안 갔다고?"
"응."
"왜?"
"무서워서."
"미친다. 회사가 군대도 아니고 그게 왜 무서워? 더구나 너네 회사 아니야? 가기만 하면 알아서 굽신굽신, 어섭쇼 할 텐데 뭐가 무서워? 설마 너네 꼰대가 말단부터 차곡차곡 시작하래? 신분도 밝히지 않고?"
"그건 아닌데. 결혼할 때까지 계속 미루다가 신혼여행 다녀와서 출근하려니까 소화도 안되고 잠도 안 오고.."
"그래서?"
"계속 미뤘어. 하루만 더, 하루만 더 하면서."
"그렇게 얼마나 미뤘는데?"
"석 달쯤."
"이 답답이가 진짜. 너 경영대 나왔잖아. 철학은 부전공에 가깝고. 그런데 회사를 왜 못 가?"
"병 아닐까? 회사 못 가는 병."
"이 와중에 농담이 나오니? 회사 갈 생각 하니까 숨이 막히고 헛것이 보이고 그래?"
"그 정도는 아니고."
"공황장애라도 생겼어?"
"진짜 공황장애라고 할 걸 그랬나?"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 말고, 뭐라고 했어?"
"누구한테?"
"누구라니, 당연히 너네 부모지."
"아, 우리 부모? 처음부터 기대도 안 했다더라. 엄마는 좀 섭섭해했지만."
"그럼 투자는? 네가 경영에 참가하는 게 투자 조건이었다면서?"
"투자는 이미 받았으니까."
"그래도 돌려 달라고 안 해?"
"그것까지는 잘 몰라. 관심도 없고."
"잘하는 짓이다. 야, 말아먹으려면 네 인생이나 말아먹어. 너 망했다고 너네 집안까지 망하게 하지 말고."
"내가 망한 거야?"
"아직 망한 건 아니지만 망하는 쪽으로 가고 있다고 봐야지."
"내가 뭘?"
"네 입으로 말했잖아. '난 망했어.' 그게 한두 번이야?"
"그야..."
"아니야?"
"맞아. 내 인생은 망했지. 학교도 망했고, 책도 망했고."
시영의 목소리가 죽어 들었다.
"야, 말이 그렇지. 네 인생이 진짜 망한 건 아니지."
"네 말이 맞아. 더 한다고 철학으로 성공할 것도 아니고, 인기 작가가 될 것도 아니고. 그냥 다 시간 낭비지."
"그렇게 따지면 시간 낭비 아닌 게 어딨어? 올림픽 금메달만 대단하고 은메달, 동메달은 메달도 아니야? 국가대표 안 되면 스포츠도 하지 말아야 하나? 아무리 아무도 2등은 알아주지 않는 더러운 세상이지만. 그럼 나 같은 건 숨 쉬는 것도 시간 낭비겠다. 번듯한 대기업 취직도 한번 못하고 친구한테 빌붙어서 책방이나 하고 있잖아."
"진심이야?"
"아니. 난 내 인생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지 않아. 빌붙어사는 건 사실이지만. 언젠간 빚 다 갚을 거고. 못 갚는다 해도. 뭐, 부채도 자산이라는 말이 있잖아. 친구도 있고."
영호가 은근히 시영의 어깨에 팔을 얹었다. 시영이 슬며시 몸을 빼냈다.
"매일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해. 이제 그만할까. 그만 노력할까."
"잘 생각했네. 그만둬. 철학이 밥 먹여주는 것도 아니고. 책도 그래. 요즘 누가 책 읽어? 기껏해야 전자책으로 자기계발서나 읽는 거지."
"그럴까?"
"그러라니까."
"그럼 뭐 해?"
"야, 넌 돈도 있는데 할 거 많지."
"할 거, 뭐?"
"일단 요트를 사. 그리고 항해를 떠나는 거지. 유튜브 보니까 요트 그거 끝내주더라. 그리 멀리 나가지 않아도 바다가 끝없이 펼쳐지고, 반짝이는 물결 하며, 뱃머리에 앉아서 샴페인을 마시는 거지. 비키니 입은 미녀가 같이 있으면 더 좋고."
"요트 자격증 없는데."
"따면 되지."
"배 타는 거 싫어하는데."
"배 타는 게 왜 싫어? 어릴 때 물에 빠진 경험이라도 있어?"
"그건 아닌데, 너 심연 본 적 없지?"
"해저 2만 리에 나오는 심연? 그걸 어떻게 봐?"
"심해 아니고 심연. 어릴 때 스킨스쿠버를 배웠는데 처음 바닷속에 들어갔을 때 파란색 물고기를 따라 점점 깊은 곳으로 가게 됐어. 그러다가 바닷속을 들여다봤는데 생각보다 더 까맣더라고."
"당연한 거 아니야? 깊은 바다는 당연히 안 보이지."
"그때 잠깐 해가 구름 속에 들어갔나 봐. 처음에는 바닷속으로 빛이 조금은 들어와서 무섭지는 않았는데 갑자기 주변에 아무것도 안 보이는 거야. 그래서 얼른 해수면으로 고개를 쳐들었지. 다행히 그리 깊지는 않아서 금세 올라갈 수 있었어."
"그럼 됐네. 뭐가 걱정인데?"
"수면으로 급하게 올라가다가 이상한 기분이 들어 물속을 다시 들여다보게 됐는데.. 뭔가 진짜 이상한 거야."
"뭐가?"
"어떻게 이렇게 아무것도 안 보일 수 있을까? 스킨스쿠버 하는 곳이라 그리 깊지도 않을 텐데."
"그게 뭐가 이상해?"
"깜깜한 어둠 속으로 빨려드는 느낌이었어. 도저히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은 느낌. 그러더니 실제로 몸이 무거워지면서 몸이 가라앉더라. 그런데도 난 심연에서 눈을 뗄 수 없었지."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모르겠어."
"아 진짜. 뭐가 툭하면 몰라?"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병원에 있었으니까."
"누가 구해줬구나."
"그랬겠지."
"그래서? 그게 트라우마로 남아?"
"트라우마까지는 아닌데 심연에 빠지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X랄한다. 바다에 빠진다고 심연에 빠지냐? 그럼 그 뒤로 한 번도 바다에 안 갔어?"
"물에는 안 들어갔어."
"대박이다. 진짜 부자면 뭐 하냐? 돈 쓸 떼가 없는데. 알았어. 요트는 포기."
"미안."
"미안할 일은 아니고. 일단은 뭘 할지 보다 하면 안 되는 것부터 정하자."
"어떻게?"
"일단 공부, 그거 이제 그만해. 사실 말이 났으니까 말하지만 철학 그거 어디에 쓰냐? 차별화가 안 되잖아."
"차별화?"
"요즘에는 개나 소나 갖다 붙이면 다 철학이래. 책방 하면서 할 말은 아니지만, 내가 팔면서도 거시기한 철학서 진짜 많아. 다 철학이고, 다 인문학이야. 쓴 사람 보면 견적 나오잖아. 표지만 그럴 싸하고 읽어보면 내용은 별 거 없어. 그런데도 슬픈 게 뭔지 알아? 네가 쓴 책보다는 잘 팔린다는 거야. 그리고 언제 때 쇼펜하우어와 니체는 아직도 우려먹냐? 그냥 네임벨류 팔아서 장사하는 거지. 솔직히 스마트폰 한번 안 써 본 니체나 쇼펜하우어가 우리 인생을 알아? 우리 철학하고 맞냐고?"
"그렇게 말할 건 아닌데, 시대가 바뀌어도 여전히 적용할 수 있는..."
"시끄럽고. 여튼 철학 그거 그만해. 답 없어. 그리고 소설도 그만 써."
"소설도?"
"계속 쓰려고?"
"안 돼?"
"진짜 너 답 없다. 아무도 안 읽어도 좋고, 너만 만족하면 된다고 그랬지? 그래서? 만족해? 진짜 만족하냐고?"
"..."
"봐. 대답 못하지? 너도 은근히 관종이야. 맨날 나 보고 읽어보라고 하잖아. 내가 읽고 멘트해 주면 좋아하고. 너 혼자 읽을 거면 그걸 굳이 왜 써? 너 혼자 상상하면 되지."
"상상도 해. 쓴 거보다 안 쓰고 머릿속에 있는 게 더 많아."
"헐. 기어이 쓰겠다는 거지?"
"응. 이건 포기 못해. 포기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니니까."
"오케이. 소설은 넘어가고. 이제 뭘 할까? 그래 연애. 썸 타는 여교수 있다며? 본격적으로 그녀하고 사귀어. 역시 인간사는 연애가 최고다. 최고의 마약이고 너한테 꼭 필요한 치료제이기도 하고."
"치료?"
"그래 치료. 넌 네가 정상이라고 생각하냐?"
"정상은 아니지만 그래도 남한테 피해를 주는 건 아니니까."
"너한테 피해를 주잖아. 바로 너한테."
"나한테?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게 문제가 되나?"
"그게 가장 큰 문제지. 넌 너를 너무 괴롭혀. 옆에서 보는 내가 다 지겹고 한심하고.. 또."
".."
"불쌍해. 넌 너한테 사과해야 해. 너처럼 다 가진 놈이 왜 이렇게 살아. 인마."
"다 가지지 못했나 보지. 아니면 가진 게 전부가 아니거나. 난 늘 부족해. 뭔가 빠진 것 같아."
"얼빠진 놈. 됐다. 술이나 한잔 더 하고 네 연애 사업 얘기나 하자. 기분 우울해진다. 누가 누굴 걱정하는지. 내가 훨씬 쪼다인데. 그 여교수가 예쁘다고 했지?"
"아니."
"객관적으로 묻는 게 아니라, 야, 객관적으로 다 예쁘면 그게 연예인이지 일반인이냐? 적어도 네 눈에는 예쁠 거 아니야."
"예쁘게 보일 때도 있지만, 그보다는 익숙해."
"익숙? 그게 여자한테 할 소리냐? 설마 그분에게 똑같이 말한 건 아니겠지?"
"글쎄. 했나? 기억이 안 나."
"기억이 안 나? 거짓말도 좀 성의 있게 해라. 전부 다 기억하는 놈이 유독 그것만 기억이 안 나? 했구나. 했지?"
"그런 것 같기도."
"망했다. 망했어. 그냥 그분은 포기해라."
"왜?"
"묻지 마. 넌 설명해도 몰라. 포기해."
"안 그래도 그럴까 해."
"뭐야? 아까하고 얘기가 다르잖아. 아까는 그 여교수한테 강의까지 양보할 정도로 좋아한다고 했으면서 이제 와서 포기하겠다고?"
"포기하라면서?"
"그건 그냥. 진짜 답답하네. 그 여자가 좋기는 해?"
"그런 것 같아."
"왜?"
"모르겠어. 좋은 게 이유가 있는 것도.."
"스톱! 좋은데 이유가 어디 있냐는 소리는 하지 마! 아까도 했거든. 나도 알아. 또 안 말해도 된다고. 그래도 모든 사람이 좋은 건 아니잖아. 특별하게 그 여자가 좋다는 건 어떤 다른 점이 있다는 것이고. 그게 뭐냐는 거지. 이해했지?"
"다른 점. 다른 점은 모르겠고, 와이프와 비슷하기는 한데."
"뭐? 누구랑 비슷하다고?"
"그냥 같이 있으면 와이프를 닮은 것 같아서... 느낌이 좋아."
"내가 잘못 들은 거 아니지? 지금 너 그 여교수가 와이프 닮아서 좋다는 거잖아."
"내가 그랬어?"
"그럼 그게 그 말이 아니야? 와이프를 닮은 것 같아서 느낌이 좋다면서."
"아. 그렇구나. 그런 거였구나."
시영은 이해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영호는 그런 시영을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뭘 이해를 하고 있어? 너 지금 와이프가 좋으니까 와이프를 닮은 그녀가 좋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 거야. 내 말 맞지?"
"그래, 그런 것 같아. 그래서 그녀가 처음부터 끌렸나 봐."
"야, 그럴 거면 그냥 와이프랑 이혼하지 말고 살면 되잖아. 왜 이혼하고 비슷한 여자를 다시 좋아해? 그런 낭비가 어딨어?"
"그럴 수 없으니까. 이미 이혼했잖아."
"신고 안 했다며?"
"그건 형식적인 것이고, 이미 양가에 이혼한다고 다 말했는데."
"하긴, 너네쯤 되면 그걸 뒤집는 것도 힘들긴 하겠다. 여하튼 부자들은 간단한 일도 참 복잡하게 한다니까. 잠깐만 이혼사유가 뭐라고 했었지?"
"약속을 안 지켜서."
"그래, 네가 결혼하면 회사에 들어가서 경영에 참여하기로 했는데 출근을 못 했다는 거지. 그거 때문에 와이프가 이혼하자고 했어?"
"내가 말했어."
"네가? 네가 왜?"
"애초에 그게 조건이었으니까. 난 약속을 못 지켰고 이혼해야 할 것 같다고."
"넌 와이프 좋아한다면서?"
"...."
"왜 대답 못해? 좋아하는 거 아니야?"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아서. 갑자기 그렇게 말로 하려니까 뭔가 어색하고."
"이것 봐라. 당연히 고백은 안 했을 것이고. 야, 아무리 정략결혼이지만 뭐 형식적으로라도 프러포즈는 했을 거 아니야?"
"아니. 그런 거 없었어."
"잘하는 짓이다. 부자 놈들이 보면 낭만이 없어. 한강에 유람선 띄우고 불꽃놀이하고 이런 건 전부 TV에만 있는 거냐? 말해 뭐 해. 그래서 너네는 둘이 있으면 무슨 말을 해? 사업 얘기?"
"와이프는 사업얘기, 나는 그냥 인간의 의식과 우주에 관한 이야기. 자주는 아니고."
"완전히 서로 딴소리한다는 거 아니야? 그런 식으로도 대화가 돼?"
"그냥 가끔 밥 먹을 때 서로 관심사에 대해 말하는 거지."
"네 엑스가 그걸 참고 있고?"
"그런 것 같은데."
"하긴 네 엑스 성격에 듣기 싫으면 하지 말라고 하든가, 어떤 식으로든 표를 냈겠지. 너는? 사업얘기 질색하잖아."
"나도 들을 만했어. 그렇게 싫지도 않았고."
"천생연분이네. 그런데도 좋아한다든가, 그 비슷한 말도 서로 안 했어?"
"그런 것 같아."
"한 번도? 잘 생각해 봐. 은연중에 암시하는 말을 했을 수도 있잖아."
시영은 생각에 잠겼다. 그가 잊고 있는 것. 생각나지 않는 게 아니라 억누르고 있는 생각. 오류나 오해가 두려워서 아예 되짚어 보지 않았던 이야기. 있는 것 같은데. 뭐였지?
"당신을 사랑해서 결혼한 건 아니지만 좋아하는 건 가능하다고 생각해."
"동감."
꽤 많은 용기를 쥐어짜서 한 고백이었는데 와이프의 대답은 지나치게 간단했다.
"네가 그런 말을 했다고?"
"응."
"언제?"
"와이프 퇴근할 때."
"좀 더 구체적으로.. 퇴근이야 매일 하는 거 아니야. 합방하고 첫 퇴근 때겠지?"
"방은 한 번도 같이 안 썼는데?"
"등신아. 그거 말고.. 신혼여행 다녀와서 한집에 살았잖아."
"아, 대충 그랬던 것 같아. 와이프가 퇴근했는데 너무 피곤해 보여서 뭔가 위로해주고 싶었는데 그 말이 생각났어."
"잘했어. 너로서는 최선이라고 봐. 그런데 겨우 '동감'이라고 밖에 말 안 해? 네 엑스도 진짜 대단해. 그래도 네 얼굴을 따뜻하게 쳐다본다든가.. 감동한 표정을 짓는다든가.. 뭐 없었어?"
"어깨를 손으로 툭 쳤어."
"그리고?"
"그게 다인데."
"손으로 친 게 다라고? 그게 뭐야? 잘해 보라는 거잖아."
"그게 그런 뜻이야?"
"당연하지. 수고해. (어깨를 툭 친다) 이렇게."
"그런 뜻이었구나. 잘해 보라고. 그랬는데 내가 망친 거야."
"뭘 또 네가 망치지?"
"전부 다."
"알지. 알지. 망치는 게 네 전문이니까. 핵심은 그중에서 뭘 망쳤냐는 거야?"
"아무것도 안 한 거."
"아무것도 안 했다고?"
"그래. 좋아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하고는 정작 아무 일도 안 했으니까. 출근도 하지 않았고 남편으로서 해야 할 아무 일도 안 했어."
영호가 잠깐 생각에 빠졌다.
"내가 결혼을 안 해봐서 그런데 남편으로 해야 할 일이 뭐지?"
시영도 당황했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실은 나도 몰라. 책에도 없고."
"심각하네. 남편으로 해야 할 일도 모르는 두 남자가 앉아서 뭘 잘못했는지를 따지고 있다는 게.."
"그렇지."
"그런데 생각해 보니 좋은 점도 있다. 모르니까 안 한 거잖아.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고. 책에도 없다며."
"그런가?"
"네 잘못이 아니야. 야, 말하고 보니까 너무 상투적이다. 네 잘못이 아니라니. 정치인 같잖아."
"맞아. 핵심을 빗겨 난 거지. 중요한 건 내가 망쳤다는 거야. 잘못했다는 게 아니라. 대게는 잘못해서 망치지만 때로는 잘해도 망칠 때도 있고."
"스톱. 안 그래도 머리 아픈데 지금 철학 강의하냐? 그딴 건 학술대회에서나 하고 지금은 사태 해결을 해야지."
"엄밀히 해결은 아니지. 이미 다 지난 일이니까."
"그것도 그렇네. 같은 의미에서 후회해 봐야 다 늦었고. 그러니까 네가 망쳤다는 등 해서 스스로 괴롭히지 마. 사람 관계라는 게 어디 한 사람이 잘못해서 끝나냐? 요즘은 자동차 사고도 10 대 빵은 없대. 항상 쌍방이야. 문제는 어느 쪽 책임이 크냐인데, 결론은 늘 정해져 있어."
"어떻게?"
"2 대 8이냐? 8 대 2냐? 이거지. 5 대 5는 아무 의미 없으니까."
"그러면 내 잘못이 8이라는 거구나."
"그야 모르지. 그건 네 생각일 뿐이고. 내 생각에는 네가 2, 니 엑스가 8 같아. 너는 그래도 좀 좋아했으니까. 니 엑스는 네 조건만 보고 결혼한 것이고."
"잘 모르겠어. 그 사람이 속을 드러내지 않기는 하지만 나한테 섭섭하게 한 적은 없고. 내 책을 대량 구매한 것만 봐도 그렇고."
"아니야. 그건 아니라고 봐. 네 책을 대량 산 건 자기 자존심 때문이겠지. 명색이 자기 남편이 책을 출판했는데 아무도 안 사면 자기도 쪽팔리잖아. 자랑할 수도 없고, "
"그런 사람 아니야."
"그런 사람 아닌지 네가 어떻게 알아? 증거 있어?"
"그러니까 내가 회사에 도저히 출근하지 못하겠다고 했을 때.."
"뭐래? 출근 안 하면 당장 이혼이라고 협박했어?"
"아니."
"그럼 뭐라고 했는데?"
--
"그게 그렇게 싫으면 난 안 가도 상관없는데."
"안 가도 된다고?"
"응."
시영은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하에게 다시 물었다.
"누가?"
"누구긴, 회사 가기 싫은 사람이지."
"내가 언제 싫다고 했어?"
"하루만 더, 오늘 말고 내일, 차일피일 미루는 건 가기 싫은 것 아닌가?"
자하의 목소리 톤은 평소와 똑같았다. 시영을 비난하는 것도 칭찬하는 것도 아닌.
"싫은 건 맞지만 약속했으니까 지킬 거야. 걱정 마."
"걱정 안 하는데. 난."
"왜 걱정 안 하는데?"
"걱정해야 하나? 왜?"
시영은 싸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식의 대화를 계속하면 싸우게 될 것이다. 어디서 물러나야 할지 고민이다.
"내가 회사를 안 나가면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이고, 장인어른이 안 좋아하시겠지. 아니야?"
"그렇겠지. 하지만 그건 우리 아빠 일이고, 난 상관없는데."
"왜 상관없어?"
"상관없으니까."
싸우자는 게 아니었다. 자하는 사실을 말하고 있었다.
"너네 회사는 투자 약속을 지켰잖아."
"그랬지."
"그런데도 내가 경영에 참여하지 않으면 앞으로 너네 회사가 경영권 분쟁이 있을 때 나의 도움을 기대하기 어렵고, 우리 결혼이 아무 의미 없는데도."
"아무 의미 없다고 생각해?"
"그런 말이 아니라."
"나는 자기가 하기 싫은 걸 억지로 할 필요 없다고 생각해."
"정말?"
"내가 거짓말하는 것 봤어? 거짓말하려면 길게 말해야 하는데 긴 건 딱 질색이야. 우리가 알고 지낸 지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그 정도는 알지 않나?"
"그래도..."
"난 먼저 출근할게. 난 회사 가는 게 좋으니까. 누구와 달리. 파이팅."
---
"파이팅? 뭘 파이팅 하는데?"
"그건.. 아마도.. 모르겠어."
"쉽게 생각해 봐. 파이팅은 일반적으로 잘해보라는 것이잖아. 네가 그 시점에서 잘할 게 뭐 있어?"
"회사 안 가는 거?"
"그거지. 그러니까 네 엑스는 너의 출근거부 투쟁을 지지한다는 거였어. 맞지?"
"그런 것 같아. 그런데 왜 그랬지?"
"그게 뭐 문제인데?"
"내가 출근을 해야 와이프한테 이득인데 그걸 포기하는 거니까."
"더 큰 이득이 있나 보지."
"그게 뭔데? 뭐가 있는데?"
"나야 모르지. 네 엑스 문제를 왜 나한테 물어?"
"물어볼까?"
"이제 와서 그걸 묻는다고? 어이없군. 넌 이제 그만 마셔라. 슬슬 헛소리하는 게 취했어."
둘이서 마신 위스키 보틀이 반절 이상 비었다. 시간도 꽤 흘렀다. 바텐더가 보이지 않은지는 꽤 됐다.
"그만 갈까?"
"그래야지. 난 택시 타면 되고 넌 대리 부르나?"
"아마도. 택시 타도 되고."
"하긴 이 앞에 좀 주차해 둔다고 뭐라 하지는 않겠다."
영호가 일어섰다. 시영은 일어나려다 엉거주춤 다시 앉았다.
"먼저 가. 난 좀 쉬었다 갈게."
"많이 취했어? 그럼 대리 불러."
"새벽이라 오래 걸릴 거야. 그냥 가."
"여태 얻어먹고 그럴 수야 없지. 그래도 건물주님인데. 대리 불러. 올 때까지만 있다 갈게."
"피곤하지 않겠어?"
"내가 뭐 출근할 곳이 있는 것도 아니고. 화장실 좀 다녀올게."
화장실에 다녀오니 시영은 바에 엎드려 졸고 있었다.
"짠한 녀석. 남들이 보면 전부 다 가진 놈이 뭐 이리 고민이 많은지 하겠지. 하긴 누가 누구를 걱정하는 건지.. 시영아, 대리는 불렀어?"
대답이 없다.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영호는 시영을 살짝 흔들었다.
"야, 죽은 거 아니지?"
그래도 일어나려는 기척을 보이지 않으니 불안하다. 귀를 대보니 숨소리가 들렸다.
"다행히 살아는 있네. 아, 이거 어쩌지? 대리 대신 불러야 하나?"
그때 시영이 테이블에 놔둔 스마트폰이 울렸다. 대리인가? 누군지 보려는데 그새 끊겼다.
"여기 계산은 했죠?"
마침 바텐더가 보여 물었다. 바텐더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술 취한 와중에도 계산을 끝낸 것이다.
"기특한 놈. 오늘도 잘 얻어먹었다. 그런데 대리는 왜 안 와? 계산할 정신이면 대리도 불렀을 텐데."
슬쩍 귀찮아진다. 그도 꽤 취했다. 빨리 집에 가서 침대에 눕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두고 갈까? 유혹이 생겼지만 유혹일 뿐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인간이 할 도리가 아니지. 그런데 속이 좋지 않다. 공짜라고 너무 잡다하게 먹었나 보다.
"여기 소화제 같은 건 없죠?"
조금 떨어진 곳에서 정리하던 바텐더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바텐더도 물주가 누군지는 기가 막히게 안다. 그의 표정을 보지 않아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얻어먹는 놈이 요구는 열라 많네.' 자존심이 상한다. 할 수 없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대리운전이 온 것이다.
아니다. 여자다. 그것도 아는 여자.
"영호씨? 와, 오랜만이네요."
시영의 와이프, 정확히는 엑스 와이프였다.
"아.. 안녕하세요. 여긴 어쩐 일로.."
"당연히 내 남편 데리러 왔죠."
"네? 여기 있는 걸 어떻게 알고?"
"연락받았으니까."
그새 바텐더가 다가와 자하에게 고개를 꾸벅했다. 자하는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더니 시영에게 다가갔다.
"잘 먹지도 못하면서 웬 술을 이렇게... 영호 씨 보지만 말고 좀 거들죠?"
영호는 술이 확 깨면서 얼떨떨해졌다. 그녀를 실제 본 건 이번이 겨우 3번째다. 결혼식 합쳐서. 그런데 사람 부리는 게 아주 능숙하다.
"제가 먹인 게 아니라 혼자서.. 사실 얼마 마시지도 않았습니다."
"알아요. 누가 먹인다고 먹을 사람 아닌 거. 그래도 꽤 늦게까지 있었네. 고마워요."
"네? 네."
그녀의 입에서 절대로 나오지 않을 것 같은 말이 나왔다. 고맙다니 당황스럽다. 뭐가 고맙다는 것일까? 시영이랑 늦게까지 놀아줘서 고맙다는 것인지, 아니면 술 취해 자는 놈을 버리지 않아서 고맙다는 것인지, 부축하는 걸 도와줘서 고맙다는 것인지.
"그런데 괜찮습니까?"
궁금해서 미치겠지만 직접 물어보지는 못하겠다. 이혼했으면서 이 새벽에 엑스 남편을 데리러 온 이유.
"뭐가요?"
"이혼했다고 들었습니다."
"아, 그거. 신고했대요?"
자하는 꼭 남의 일처럼 물었다. 정말 모르는 것처럼.
"아직 신고는 안 했다고."
"나도 안 했는데. 그럼 아직 부부 아닌가?"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시영을 차 뒷좌석에 밀어 넣었다. 꽤 조심스럽다. 더 이상한 건 기사가 있는데도 직접 시영을 데리러 왔다는 점이었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잠깐만요. 영호 씨."
"네?"
"앞으로도 내 남편 잘 부탁해요. 친구라고는 영호 씨뿐인 것 같은데."
"네. 당연히."
"그럼 파이팅."
시영과 자하를 태우고 멀어져 가는 승용차의 꽁무니를 바라보며 영호는 넋 빠진 얼굴이 됐다.
뭐가 파이팅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