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한 단락] 카렌 암스트롱 '축의 시대'
[편집자 주] 네가 싫어할 행동을 남에게 하지 말라. 남의 고통을 네 고통처럼 여겨라. 자기중심에서 벗어나라. 이웃을 사랑하라. 자신을 비우라. 그것이 신이다, 자비다, 사랑이다, 하늘의 도다. 인류 역사의 어느 시기에 이런 생각들이 출현한다. 오늘날 보편 윤리의 골간이라고 하는 황금률이다. 1949년 독일 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기원전 8세기부터 3세기 사이 세계 곳곳에서 이런 사상이 등장한 시기를 일컬어 '축의 시대'라 불렀다. 2009년 영국의 비교종교학자 카렌 암스트롱은 그 개념을 이어받아 주요 종교와 철학이 태동한 배경과 가르침의 내용을 비교한 <축의 시대>를 출간했다. 저자는 그때나 지금이나 인류가 처한 상황은 근본적 구조에서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성탄절 아침 이 책에서 일부를 발췌했다.
인간은 아무래도 자기 방어를 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우리는 동굴에서 산 이후로 동물이나 인간 약탈자의 위협을 받아왔다. 우리 자신의 공동체와 가족 내에서도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이익을 해치고 자존감을 파괴한다. 따라서 우리는 지속적으로, 언어, 정신, 신체를 이용한 반격과 선제공격을 준비한다. 하지만 현자들은 우리가 체계적으로 완전히 다른 심리적 태도를 계발하면, 다른 의식 상태를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축의 시대 현자들이 서로 의논한 것도 아닌데 일관되게 황금률로 돌아갔다는 것은 인간 본성의 구조에 관해 중요한 점을 이야기해준다.
예를 들어 우리가 동료, 형제나 자매, 적국에 관하여 뭔가 적대적인 이야기를 하려는 유혹을 느낄 때마다, 만일 남이 우리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면 기분이 어떨지 생각하고 참는다면, 그 순간 우리는 우리 자신을 넘어선 것이다. 바로 초월의 순간이다. 그런 태도가 습관이 되면, 사람들은 항상적인 엑스타시스의 상태에서 살 수 있다. 오묘한 황홀경에 빠지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 중심주의의 한계를 넘어서 살기 때문이다. 축의 시대 프로그램은 모두 이런 태도를 장려했다. 랍비 힐렐이 지적했듯이, 그것이 종교의 핵심이었다. 유가의 '양보' 제의는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는 습관을 기르려고 고안된 것이다. 수행자는 요가 훈련에 들어가기에 앞서 아힘사, 즉 비폭력에 숙달되어야 했으며, 단 하나의 말이나 행동으로도 적대감을 드러내지 않아야 했다. 이것이 제2의 천성이 되기 전에는 구루로부터 명상을 진전시켜도 좋다는 허락을 받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런 '무해함'을 얻는 과정에서 수행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을 경험한다고 텍스트들은 설명한다.
축의 시대 현자들은 이기심을 버리고 자비의 영성을 계발하는 것을 그들의 의제의 맨 위에 두었다. 그들에게 종교란 곧 황금률이었다. 그들은 사람들이 초월해야 하는 대상-탐욕, 자기중심주의, 증오, 폭력-에 집중했다. 사람들이 그런 것을 초월하여 이르게 되는 곳은 쉽게 규정할 수 있는 장소나 사람이 아니라, 여전히 에고 원리(아항카라)의 함정에 갇힌, 깨달음을 얻지 못한 사람은 생각도 할 수 없는 지복의 상태였다. 사람들이 초월하여 이르고자 하는 곳에 집중을 하고 그것에 관해 교조적이 되면, 공연히 캐묻기만 하며 삐걱댈 수 있었다. 불교 용어로 '해로운' 상태에 빠질 수 있는 것이다.
수백 년에 걸친 제도적 정치적 지적 발전은 종교에서 자비의 중요성을 흐릿하게 만든 경향이 있다. 공중의 담론을 지배해 온 종교는 제도적 자기 중심주의를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나의 신앙이 너의 신앙보다 낫다! 장자가 주목했듯이, 사람들은 신앙에 자신을 던져 넣으면, 시비를 걸고, 간섭을 하고, 심지어 불친절해질 수도 있다. 자비는 인기 있는 덕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의 가장 깊은 자아와 동일시하는 에고를 옆으로 밀어놓을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비를 보이기보다는 옳은 쪽이 되는 것을 선호한다.
축의 시대의 종교적 탐구는 모두 자기 시대의 전례 없는 폭력으로부터 원칙적으로 또 본능적으로 물러나는 데서 출발했다. 인도에서 축의 시대는 제의 개혁가들이 희생 경쟁에서 갈등과 공격성을 빼내면서 시작되었다. 이스라엘의 축의 시대는 예루살렘이 무너지고 유대인이 바빌로니아로 강제 추방을 당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바빌로니아에서 사제들이 화해와 아힘사라는 이상을 발전시켜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중국의 축의 시대는 전국시대에 시작되었는데, 이 시기에 유가, 묵가, 도가는 모두 널리 퍼진 무법적이고 치명적인 공격성을 제어하는 방법을 찾았다. 폴리스가 폭력을 제도화했던 그리스에서는 축의 시대의 이상에 주목할 만한 기여를 했지만-특히 비극의 영역에서-궁극적으로 종교적인 변화는 없었다.
이 위험한 시대에 우리에게는 새로운 전망이 필요하다. 그러나 축의 시대 현자들이 지칠 줄 모르고 설명했듯이 종교적인 이해는 단순히 관념적인 것이 아니다. 많은 현자들이 기록된 경전이라는 관념에 반대한다. 그것이 통속적이고 피상적인 앎을 낳을 것이라고 걱정했기 때문이다. 자신을 지우는 자비롭고 비폭력적인 생활 방식도 텍스트 연구만큼이나 중요했다. 인드라조차도 호전적인 생활 방식을 바꾸고 겸손하게 베다를 공부하고 나서야 전통의 가장 깊은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시간도 많이 걸렸다.
우리는 즉각적인 의사소통의 사회에 살기 때문에, 종교도 즉각적으로 이해하고 싶어 하며, 그것을 즉시 파악하지 못하면 뭔가 잘못된 것이 있다고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축의 시대 현자들은 진정한 앎은 쉽게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꾸준히 설명했다. 소크라테스는 우리가 아무리 엄격하게 논리적이라 해도, 진실의 어떤 측면은 늘 우리를 빠져나간다는 사실을 합리적인 그리스인들에게 일깨우는 것을 사명으로 삼았다. 이해는 지적인 케노시스 뒤에야, 즉 우리가 아무것도 알지 못하며 우리 마음에서 이미 받아들였던 관념들이 '비워졌을' 때에야 찾아온다. 축의 시대 현자들은 과감하게 근본적인 가정들에 의문을 제기했다. 우리도 우리 시대의 문제들에 직면해 있는 만큼, 늘 새로운 생각에 마음을 열어놓을 필요가 있다.
우리는 큰 공포와 고통의 시기에 살고 있다. 축의 시대는 우리에게 인간 삶의 피할 수 없는 사실인 고난과 직면하라고 가르쳤다. 우리 자신의 고통을 인정할 때에만 타인과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는 이전 어떤 세대보다 고난의 이미지들이 넘쳐나고 있다. 전쟁, 자연, 재해, 기근, 궁핍, 질병이 매일 밤 우리 거실에 비친다. 삶은 진실로 두카다. 어디에나 존재하는 이 참사로부터 물러나고, 그것이 우리와 전혀 관계가 없다고 부정하고, 나 외에 다른 사람들의 고통은 모두 의도적으로 배제하여 '긍정적인' 태도를 계발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축의 시대 현자들은 이것이 대안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삶의 고난을 부정하고 타조처럼 모래에 머리를 박는 사람들은 '거짓 예언자들'이다. 사방에서 밀려 들어와 우리 의식을 공격하는 슬픔을 인정하지 않으면 우리는 영적인 탐구를 시작할 수 없다. 국제적인 테러의 시대에는 붓다의 숲에서 살 수 있다고 상상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심지어 보호를 받는 제1세계 사회에서도, 고난은 조만간 모두의 삶에 영향을 줄 것이다.
축의 시대 현자들이라면 이런 사실에 분개하는 대신 이것을 종교적 기회로 보아야 한다고 우리에게 말할 것이다. 우리의 고통이 곪아서 폭력, 불관용, 증오로 터지도록 놓아두는 대신, 그것을 건설적으로 이용하려는 영웅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레미야가 추방당한 사람들에게 한 말에 따르면, 그 비결은 원한에 휘둘리지 않는 것이었다. 복수는 답이 아니었다. 사제 저자는 추방당한 유대인에게 그들이 이집트에서 나그네였으니 그들 가운데 있는 나그네를 존중하라고 말했다. 과거의 고통의 기억을 바탕으로 우리는 황금률로 돌아간다. 다른 사람들의 고통이 우리 자신의 고통만큼이나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의 적의 괴로움도 마찬가지다(이 점이 특히 중요하다).
그리스인은 인간의 비참한 상황을 무대에 올려, 아테네 관객이 불과 몇 년 전에 그들의 도시를 유린했던 페르시아인에게 공감할 수 있게 했다. 비극에서 합창은 늘 관객에게, 정상적인 경우라면 혐오감을 느낄 만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을 위해 울라고 말했다. 이들은 비극을 부정할 수 없었다. 비극은 바로 도시의 신성한 핵심 안에 놓여야 했으며 영원한 힘이 되어야 했다. <오레스테이아>의 끝에 복수심에 불타는 에리니에스가 '마음씨 고운 사람들'인 에우메니데스로 변하여, 아크로폴리스에 신전을 얻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는 우리가 미워하고 해친 사람들과 함께 느껴야 한다. <일리아스>의 마지막에서 아킬레우스와 프리아모스는 함께 눈물을 흘린다. 분노와 독기 서린 원한은 우리를 비인간적으로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아킬레우스는 프리아모스와 함께 슬픔을 나누고 그에게서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나서 잃었던 인간성을 회복할 수 있었다.
우리는 축의 시대 현자들이 무시무시하고 끔찍한 상황에서 자비의 윤리를 발전시켰다는 사실을 우리 자신에게 늘 일깨워야 한다. 그들은 상아탑에서 명상을 한 것이 아니라, 전쟁으로 찢긴 무시무시한 사회, 오랜 가치들이 사라져 가는 사회에 살았다. 그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공허와 심연을 의식했다. 이 현자들은 유토피아를 꿈꾸는 사람들이 아니라 실용적인 사람들이었다. 많은 수가 정치와 정부에 몰두했다. 그들은 공감이 단지 유익하게 들리는 이야기일 뿐 아니라, 실제로 효과가 있다고 확신했다. 자비와 모든 이에 대한 관심은 최선의 정책이었다. 우리는 그들의 통찰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들은 전문가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선의 본질에 관해 생각하는 데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았다. 그들은 오늘날의 과학자들이 암 치료법을 찾아내는 데 쏟아붓는 것만큼이나 많은 창조적 에너지를 인류의 영적 불안의 치료법을 찾는 데 쏟아부었다. 물론 우리는 상황이 다르다. 축의 시대는 영적 천재들의 시대였다. 우리는 과학과 기술의 천재들의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의 영성은 미발달 상태인 경우가 많다.
축의 시대에는 인류가 사회적 심리적 도약을 했기 때문에 새로운 전망을 만들 필요가 있었다. 사람들은 각 사람이 유일무이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집단의 생존을 확보하기 위해 공동체 정신을 장려했던 예전의 부족 윤리는 새로운 개인주의에 자리를 내주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축의 시대 영성의 아주 많은 부분이 자기의 발견에 몰입했던 것이다. 출가자는 상인과 마찬가지로 자수성가한 사람이었다. 현자들은 각자가 자의식을 갖고, 자신이 하는 일을 의식하라고 요구했다. 희생제를 드리는 사람 각자가 제의를 떠맡아야 했다. 개인은 자기 행동에 책임을 져야 했다. 오늘날 우리는 다시 비약적인 도약을 하고 있다. 우리의 과학기술은 세계화된 사회를 만들었으며, 이 사회는 전자, 군사, 경제, 정치 등 모든 면에서 서로 관련되어 있다. 우리는 이제 세계화된 의식을 계발해야 한다. 마음에 들든 들지 않든, 우리는 한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문제가 축의 시대 현자들의 문제와 다르다 해도, 그들은 여전히 우리를 도울 수 있다. 그들은 옛 종교의 통찰들을 버린 것이 아니라 그것을 심화하고 확대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축의 시대 통찰들을 발전시켜야 한다.
현자들은 우리보다 먼저 공감이 우리 자신의 집단에만 한정될 수 없음을 의식했다. 우리는 불교에서 '가없는' 전망이라고 부르는 것, 그 관심의 반경에서 어떤 생물도 빠뜨리지 않고 지구 끝까지 뻗어나가는 전망을 계발해야 한다. 황금률은 축의 시대에 막 태어난 개인들에게 내가 나 자신을 귀하게 여기듯이 타인도 자기 자신을 귀하게 여긴다는 사실을 일깨웠다. 내가 만일 나의 개별적 자아를 절대적 가치를 만들어버린다면, 인간 사회는 유지가 불가능해지므로, 우리는 모두 서로 '양보'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우리의 과제는 이런 통찰을 발전시켜, 여기에 전 지구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성결 법전에서 사제 저자는 살아 있는 생물은 어떤 것도 불결하지 않으며, 모두가-심지어 노예도-독립적인 자유를 누린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해야 한다. 이미 보았듯이 사제 저자는 우리가 모든 사람에 대한 감정적인 부드러움으로 가득 차야 한다고 말한 것이 아니다. 그의 율법적 용어에서 '사랑'이란 우리 이웃에게 도움을 주고, 의리를 지키고, 실질적인 지원을 하는 것이었다. 오늘날에는 이 행성의 모두가 우리의 이웃이다. 묵자는 자기 시대의 군주들에게 겸애, 즉 의도적이고 불편부당한 '모든 사람에 대한 관심'을 계발하는 것이 실용적으로도 얼마든지 의미가 있는 일이라고 설득하려 했다. 묵자는 그것이 그들 자신에게 가장 이익이 되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우리는 이제 그 말이 사실임을 안다. 오늘날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에서 일어나는 일은 어떤 식으로든 내일 런던이나 워싱턴에 영향을 줄 것이다. 결국 '사랑'과 '관심'은 이기적인 또는 근시안적인 정책보다 모두에게 더 이롭다.
에우리피데스는 <바코스 여신도들>에서 '나그네'를 물리치는 것이 위험한 일임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낯설고 이질적인 것을 받아들이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우리 세계관의 중심에서 자기를 치우려면 진지한 노력이 필요하다. 불교는 다른 심리를 계발하기 위해 '가없는 것'에 관한 명상을 권한다. 그러나 요가를 할 시간이나 재능이 없는 사람은 붓다의 시 <만물이 행복하게 하라>를 되풀이해 암송할 수도 있다. 이것은 신학적이거나 종파적인 믿음을 전혀 요구하지 않는 기도다. 유가 또한 자기 계발 프로그램의 중요성을 인정한다. 제의는 군자, 즉 남을 부주의하게, 의례적으로, 이기적으로 대하지 않는 성숙하고 완전히 발달한 인간을 창조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제의는 제의가 관심을 기울이는 대상인 사람을 바꾸어 그의 유일무이한 신성함을 끌어내기도 한다. 타자에 대한 존중을 실용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평화로운 지구 사회를 위하여 불가결할 것이며, 어쩌면 악당 국가를 '개혁'하는 유일한 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존중은 진실해야 한다. <도덕경>이 지적하듯이 사람들은 늘 우리 행동 뒤에 숨은 동기를 느끼기 때문이다. 나라도 마찬가지로 다른 나라가 이기심 때문에 자신을 이용하거나 자신의 비위를 맞추면 금방 알아챌 것이다.
고난은 말끔하고 합리적인 신학을 박살 낸다. 에스겔의 무시무시하고 혼란스러운 환상은 <신명기> 저자들의 매끈한 이념과 매우 달랐다. 아우슈비츠, 보스니아, 세계무역센터 파괴는 인간 마음의 어둠을 드러냈다. 오늘날 우리는 비극적 세계에 살고 있으며, 그리스인이 알고 있었듯이, 여기에는 간단한 답이 있을 수 없다. 비극이라는 장르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관점에서 사물을 볼 것을 요구한다. 종교가 우리의 부서진 세계에서 빛을 가져오게 하려면, 맹자가 주장했듯이, 우리는 사라진 마음, 우리의 모든 전통의 핵심에 놓여 있는 자비의 정신을 찾으러 나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