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것들에 대하여
네이버 블로그에는 이전 해의 같은 날짜에 쓴 게시물들을 보여주는 기능이 있다. 그래서 가끔 블로그를 연다. 지난 오늘들에 남겨둔 글과 사진이 있는지 궁금해서.
블로그는 열한 해 전쯤 아이가 배 속에 있었을 때부터 아이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까지 한창 사용했고, 열 해 정도 뜸하다가 한 해 전쯤부터 다시 블로그에 기록을 남겼다. 주로 인스타그램에 사진과 글을 남겨 오던 중이었는데, 다른 형태나 방식으로 글을 쓰기 위해 새로운 플랫폼이 필요했던 것 같다. 그래서 요즘 블로그를 열면, 열한 해 전의 나의 이야기와 한 해 전의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
열한 해 전 오늘의 나는, 태어난 지 쉰여섯째 날을 맞은 아이를 카시트에 태워 교회로 간다. 카시트를 불편해했던 아이가 안쓰럽지만, 부산을 오가야 하는 때를 대비해 익숙해져야 한다며, 아이의 다짐인지 나의 다짐인지 모를 것을 하고 있었다. 못해도 예닐곱 시간 동안 카시트를 태워야 하는 부산행을, 기껏해야 십 분 걸리는 교회까지 가는 길에서 연습했다니. 앞으로 벌어질 난항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채. 처음으로 아이와 함께 차를 타고 부산으로 가는 다섯 시간 동안 아이는 세 시간을 울고 두 시간을 지쳐 잤다. 이런 일들이 벌어질 것을 몰랐던 나는, 카시트에 잘 적응할 아이를 기대하며 그저 해맑았지. 아이는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라는 말과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은 백에 백 번 다 맞았다.
한 해 전 오늘의 나는, 아보카도 씨를 물에 담가 뿌리를 내리는 중이었고, 수목원을 산책하며 근처에 이렇게 나무가 많다는 사실에 감동했고, 키가 큰 나무들을 올려다보며 마음이 솟아난다고 느끼고는 돌아오는 길에 골목골목을 눈으로 쓰다듬으며 아이스크림 할인점에서 아이스크림을 사 먹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랑이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 걸까요, 아니면 바보들만 사랑에 빠지는 걸까요?”(《내 이름은 빨강》, 오르한 파묵, 민음사, 2004)라는 맥락상 중요하지도 않은 문장에 꽂혀서는, 바보가 되어 사랑에 빠지고 싶다는 소리를 아무렇게나 하고 있었다. 바보 같고 사랑스러웠던 그날의 나여.
어떤 날은 열 한 해 전의 이야기가 없거나 한 해 전의 이야기가 없거나, 둘 다 없거나 한데 그러면 아쉽기까지 하다. 기록되지 않은 날의 나는 무엇을 하고, 어떻게 생각하고 생각했을까. 기록되지 않은 날에 내가 없었던 것은 아니겠지만, 어쩐지 있어야 할 무언가를 잃어버린 것 같기도 하다. 또 두 날의 기록이 모두 남아 있는 날은, 콩이 콕콕 박힌 흰밥을 따뜻하게 먹은 것처럼 편안하고 마음이 부르다. 열한 해 전의 나와 한 해 전의 나 사이에 일들도 조각조각, 여기에 저기에 있을 텐데, 가지런히 정돈해서 잘 모으고 싶다.
기록은 힘이 세다. 무엇보다 허투루 살지 않은 혹은, 허투루 살았으므로 그러지 않으려고 마음을 곧게 하는 나를 확증한다. 뿌리 같은 시간을 눈으로 확인하는 것은 그 위에 줄기를 올리고 잎을 틔우고 꽃을 피워 열매를 올리는 나를 지탱한다. 눈을 깜박이면 어제가 되어 버리는 것이 오늘이고, 적확히 말하면 어제는 이미 없다. 기억이 흐려지는 것에 따라 나 자신도 희미해진다. 얇은 종이 위에 차곡차곡 쌓인 기록만 끈질기게 남을 뿐이다. 그러니 오늘도 성실하게 나를 기록할 것. 내일의 뿌리가 될 것들을, 오늘이라는 백지 위에 잘 심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