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것들에 대하여
당신은 내게 왜 그러냐고 한 번도 묻지 않았어. 물어봐야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원인을 알 수도 결과를 낼 수도 없다는 것을 알아서였을까. 멍하니 당신을 바라보는 날들이 이어졌어. 내게 부과된 일들을 쳐내지 못하고 먼지 같은 시간이 쌓여가는데도, 당신은 내가 책임을 묻지 않았어. 마른 걸레질, 그래 당신은 그저 손끝으로 먼지를 확인하고 조용히 그것을 닦기만 했지. 내가 흘려 놓은 부스러기 같은 시간을 치우는 당신의 등을 보고 있었어. 그때 내가 제일 무서웠던 게 뭔지 알아? 당신의 걸레질이 끝날 수 있을까? 수렁 같은 나의 시간이 끝날 것인가 하는 거였어. 누구에게도 물을 수 없었던 물음을 스스로 물었지만 답이 없었어. 언제 끝날까가 아니라 끝나긴 끝날까 하며 수도 없이 절망했던 것 같아. 저절로 끝날 리 없는 시간을 끝내는 것, 그것을 해야 하는 사람은 정작 나인데. 내게는 그것을 끊어 낼 어떤 무기도 없었던 거야.
그러던 내가 밖으로 나가야겠다 생각하게 했던 일이 있었는데. 당신은 그날을 기억할까?
‘저녁 먹을 준비를 해야 하는데.’ 하며 해야 할 일과 하지 못하는 몸과 마음 사이에서 뒤틀리듯 괴로워하던 때였지 싶어. 퇴근하던 당신이 산책로에서 찍었다며 사진을 보냈어. 푸르스름한 저녁. 모든 것이 밤으로 잠길 채비를 하는, 낮도 밤도 아닌 시간. 있지도 없지도 않은 빛, 빛이 희박한 시간을 담은 사진이었어. 그 사진 속에는 창이 하나 있었는데, 크리스마스도 아니면서 빨갛고 파랗게 빛나는 알전구가 창틀을 위아래로, 가로로 세로로 둘려 있었어. ‘각진 크리스마스, 네모난 크리스마스, 모서리 크리스마스’ 같은 생각을 아무렇게나 하는데, ‘메리 오늘!’하고 당신이 메시지를 보냈어. ‘메리 오늘!’ 나의 오늘이 기쁘길 바라는 당신의 마음. 어떤 반짝이는 것들은, 어떤 글자들은 시드는 마음을 구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싶었어.
그런데 당신 그거 알아? 그 반짝이던 창이, 실은 그 허름한 주점의 창이었다는 거. 당신이 출근하고 난 뒤에 그 창을 찾겠다며 나갔었거든. 사진으로는 어둑해서 볼 수 없었던 창 아래 벽면에, 조잡한 글씨로 ㅇㅇ주점이라 적혀 있었어. 당신이 그곳을 기억할지 모르겠다. 그곳은 우리가 술을 마시지 않아서 갈 일도 없겠지만, 술을 마신다 해도 저런 곳은 가지 말자며 서로 다짐했던 곳이었어. 벌겋게 휘청거리는 삶이라며 조금은 낮잡아 봤던 그곳이, 그 싸구려 전구가 나의 구원이 될 줄이야. 낯이 뜨거워졌던 것은, 지는 해가 비껴 비쳤기 때문만은 아니었을 거야.어쩌면 내 곁에 있는 모든 것이 나를 구하려 하고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나는 어떤 마음이 되어 살고 있었던 걸까.
당신이 방패처럼 쥐여준 사진, 그 속에 반짝이는 창틀을 생각하며 나는 내 태도를 가다듬어. 그리고 나는 나를 먼저 구하는 중이야. 나도 누군가를 구할 수 있을 테니까. 어쩌면 구해야 할지도 모르니까. 나를 보고 구해져야 하는 사람이, 나를 보고 있을지도 모르잖아. 혼자 모로 누워서는, 등을 돌리고 벽을 향해서는 누구도 구할 수 없으니까. 나는 지금 경복궁 근처에 유명한 카페에 있어. 전면이 통창인 여기는 환하고 소란스러워. 삼삼오오 모여 앉은 사람들이 서로를 구하는 중이겠지. 그렇게 열심히 구하느라, 사람들의 눈빛이 한여름 같아. 나도 저렇게 당신을 구하고 있을까. 내 눈빛과 몸짓은 당신에게 깜박깜박 신호를 보내고 있을까. 언제나 나를 당신이 구하는 것처럼, 오늘은 내가 당신을 구할게. 메리 오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