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는 ‘탈출’이 아니라 ‘독립’ 이어야한다.

by 정남이


은퇴(隱退). 숨을 은. 물러날 퇴.


현대 사회에서 은퇴는 사회적으로 ‘끝’을 의미합니다. 사회인으로서 직함을 내려놓고, 한 발짝 뒤로 물러나는 거죠. 2030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모습이 아닐까 합니다. 하지만 40대에 접어들면 회사의 울타리 안에 있고 싶어 합니다.


드라마 ‘미생’에서 ‘회사가 전쟁터라면, 밖은 지옥이야 ‘라는 대사를 들어보셨을 겁니다. 퇴사하고 치킨집을 차리 직장 선배에게 오상식 차장이 한 말입니다. 이 문장이 은퇴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알아햐 하는 단어라고 생각합니다.

회사는 약육강식의 세계이긴 하지만 최소한의 보호막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밖은 이런 공식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경쟁력 우위에 있는 무언가가 없으면, 바닥 저 아래로 미끄러져 버립니다.


<파이어족의 민낯>

FIRE (Financial Independence Retired Early).

경제적 자유를 만들어서 조기 은퇴를 꿈꾸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자연스레 유행되기 시작했습니다.

지긋지긋한 출근을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되고, 보기 싫은 상사도 볼 필요가 없죠.

유튜브만 봐도 ‘경제적 자유, 월 500 나오는 파이어족 포트폴리오’, ‘8억으로 파이어한 30대 이야기’ 등 자극적인 이야기로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경제적인 부분에 포커스가 되어있지만, 삶에 대한 부분은 비교적 적은 게 사실입니다. 일을 하지 않아도 먹고살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지만 과연 좋은 점만 있을까요?


저는 셈에 빠른 편입니다. 삶에 여러모로 도움이 되지만, 특히 ‘남과 비교’를 할 때 빛을 발합니다.

누가 어떤 종목을 사서 얼마를 벌었는지, 연 수익률이 8%면 원금이 이 정도 일 때 월 수익은 얼마겠구나 등등 말이죠. 끊임없이 타인과 비교하고 불안해합니다. 저 정도의 자산을 이루지 못하면 실패한 듯한 기분이 듭니다. 그러면서 스스로에게 탓하고 그러지 않는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합니다.


선배 중에 목동 재건축 아파트를 가지고 있는 분이 계십니다. 해외 주재원 생활 전 매수해 둔 게 현재 재건축을 앞둬 시가 30억 안팎의 자산을 이뤘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방에 원룸 건물도 있어서 월세도 두둑이 받습니다.

마냥 그 선배처럼 되고 싶은 마음에 부단히 노력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주말마다 아파트 임장을 다니면서 전국을 누볐습니다. 수원, 동탄, 인천 등등 임장을 핑계로 전국 방방곡곡을 누볐습니다.

아파트뿐 아니라 상가, 다가구 주택, 토지 등 수익형 부동산에도 관심을 가졌고요. 부동산 경매까지 확장해서 법원도 왔다 갔다 했습니다. 그러다 아파트 한 채를 낙찰받아 나름의 성공을 경험하기도 했죠.

이런 과정을 반복하면 조기 은퇴와 함께 큰 자산을 만들 수 있을 거라는 꿈에 부풀었습니다. 여느 때처럼 임장 물건을 검색하고 있던 중에 아내가 지나가는 말로 물었습니다.


‘오빠는 왜 이렇게 부동산에 진심이야? 뭐 때문에 이렇게 열심히 해?’

‘그냥... 우리 노후 편하게 살려고 그러지.’


아내에게는 짐짓 어른스러운 척 대답했지만, 속마음은 달랐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매일 아침 울리는 알람 소리, 숨 막히는 출근길, 기분 맞추기 힘든 상사의 비위로부터 말이죠. 저에게 고액의 자산은 '탈출에 필요한 준비물'처럼 보였습니다.


그날 밤, 곰곰이 다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만약 당장 내일, 선배처럼 30억이 생겨서 사표를 던진다면 내 인생은 해피엔딩일까?

늦잠을 자고, 넷플릭스를 보고, 여행을 다니는 게 기대한 만큼 좋을까?

그 상상을 10년 뒤로 돌려보니 등골이 서늘해졌습니다. 고작 30대 후반. 기대수명까지는 50년도 넘게 남았습니다. 그런 즐거움은 길어야 1년이고, 남은 수십 년을 '할 일 없는 백수'로 지내야 한다는 사실은 또 다른 불안이었습니다.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

드라마 ‘미생’의 대사처럼, 준비 없이 나간 세상은 전쟁터가 맞습니다.

하지만 그건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명함 없는 나'를 견딜 수 없기 때문일 겁니다. 회사라는 간판을 떼고 났을 때, 나를 설명할 수 있는 단어가 하나도 없다면, 그곳은 돈이 많아도 지옥일 수밖에 없습니다.


많은 직장인들이 파이어족을 꿈꾸지만, 정작 '은퇴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계획이 없습니다. 그저 '일하기 싫다'는 반작용으로 은퇴를 꿈꾸는 건 아닐까요? 저 또한 그랬으니까요. 회사가 싫어서 도망치듯 하는 은퇴는, 결국 사회로부터의 '도피'이자 문자 그대로 '숨어버리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런 제 생각에 확신을 준 문장이 하나 있습니다.


’ 부자의 언어‘ 저자인 존 소포릭은 색다른 의견을 제안하는데, 부자를 단순한 자산가가 아닌 '정원사'에 비유합니다.


’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정원사는 시간을 들여 삶을 이룩한 사람이며,

조건에 구애받지 않는 태도를 익힌 사람이고,

스스로 얻는 것 외에 어느 것도 허용하지 않으며,

결과에 상관없이 노력에 대한 자부심을 아는 사람이다.‘


삶을 정원으로, 부를 그 안에서 자라나는 나무로 보았습니다. 나무, 꽃들을 잘 일구는 것이 마치 자산을 꾸려 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작가의 비유처럼 제 상황에 대입해 보자 새로운 관점이 열렸습니다. 척박한 회사 밖으로 나갈 궁리만 할 게 아니라, 나라는 나무를 키울 비옥한 토양일지도 모른다고 말이죠.

많은 사람들이 회사를 '감옥'이라 칭하며 탈출을 꿈꿉니다. 그러나 척박한 땅(회사 밖)에 묘목을 옮겨 심는다고 갑자기 거목이 될 수 있을까요? 아니요. 비바람을 막아주고 물을 대주는 이곳(회사 안)에서 뿌리를 깊게 내린 나무만이, 훗날 밖으로 옮겨 심어졌을 때도 말라죽지 않습니다.

조기은퇴에 꽂혀서 준비 없이 나오기보다는, 지금 맡은 본인의 일을 하나씩 주체적으로 풀어나가는 게 중요합니다.


눈에 보이는 외적인 부자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부러움을 받을 수 있겠지만, 진정한 부자는 긴 안목을 가지고 본인 만의 생각과 태도를 바탕으로 결정하여 꾸준히 성장하는 사람입니다.

저도 생각을 고쳤습니다. 단순히 돈을 모아 회사를 '탈출'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내 이름 석 자로 설 수 있는 '독립'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말이죠.




<은퇴가 아닌 전직을 꿈꾸며>

역설적이게도 여전히 아파트에 관심이 많고 투자 공부도 합니다. 하지만 마음가짐은 달라졌습니다.

예전에는 '하루라도 빨리 그만두기 위해' 노력했다면, 이제는 **'가장 튼튼한 열매를 맺기 위해'** 준비합니다.

회사가 주는 월급이라는 든든한 우군과 함께, 퇴근 후에는 글을 쓰고 나만의 이야기를 씁니다. 이것은 훗날 제가 회사라는 울타리를 벗어났을 때, 맨몸으로 추락하지 않게 해 줄 낙하산이자, 새로운 세상에서 무기가 될 것입니다.


40대, 50대에 맞이할 은퇴가 사회적인 '끝'이 아니라, 새로운 챕터의 '시작'이 되려면 지금부터 준비해야 합니다.

조기은퇴라는 허황된 꿈을 좇아 시간을 허비하기보다 ‘**내 인생의 콘텐츠’**를 채우는 일에 집중해 보는 건 어떨까요?

당장의 통장 잔고도 중요하지만, 뚜렷하지 않은 목표는 저처럼 오히려 독이 될 수 있습니다.

나만의 무기를 확실히 챙겨서 나간다면, 밖은 더 넓고 자유로운 '광야'가 될지도 모릅니다.

오늘도 도망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넓은 곳으로 나아가기 위해 출근하고, 또 퇴근 후의 삶을 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