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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정여 Oct 16. 2019

안전 여행주의자가 된 남편의 속사정

해외 원정 싸움(2)

잘츠부르크에서 남편과 한바탕 싸우고 돌아온 나는 다음 휴가는 정말 혼자 보낼 작정이었다.(참고 글=잘츠부르크 상인은 우리 부부를 무시한 걸까) 남편에게 휴가 일정을 알려주지 않은 채 휴가 준비에 들어갔다. 친한 회사 동기와 함께 가려고 일정을 조율하는데 남편이 "휴가 어디로 갈까"라며 눙치듯 물었다. "따로 가기로 했잖아." 어이없어하는 내게 남편은 "이번 휴가에서는 진짜 싸움 안 걸게"라며 함께 여행 가자고 간곡하게 청했다. "진짜 또 스트레스 주기만 해봐." 나는 그의 거듭되는 부탁을 거절하다 못 이기는 척 들어줬다. 우리는 베트남 다낭으로 향했다.

 

여행 첫날은 순탄히 지나갔다. 비도 오는 데다 생각보다 날씨가 추워 수영을 못하는 게 아쉬웠지만 남편과 싸우지 않는 것만으로 휴가 다운 휴가를 보내고 있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웬걸. 역시는 역시였다. 우리 부부 같은 싸움의 고수들이 무탈하게 여행을 즐길 리 만무했다.


다낭에 도착한 지 둘째 날, 우리는 바나힐로 다. 바나힐은 베트남을 점령한 프랑스인들이 해발 1500m 고지대에 지은 휴양시설이다. 호텔에서 불러준 택시를 타고 바나힐로 가는 도중에 택시기사가 바나힐 입장권을 저렴하게 파는 곳이 있다고 했다. 남편은 어쩐지 주저했지만, 입장권을 사는데 줄을 설 필요가 없다는 기사의 말에 내가 OK를 외쳤다.


티켓을 사고 다시 택시에 올라탔다. 남편은 굉장히 불안한 모습이었다. 우리가 구입한 티켓이 가짜면 어떡하냐며 안절부절못했다. 나는 또 그 모습을 보는 게 스트레스였다. 처음에는 "괜찮아. 걱정하지 마"라고 그를 달랬다. 하지만 남편은 달래지지 않았다. "이럴 거였으면 그냥 바나힐에 도착해서 티켓을 사자고 하지." 결국 폭발하고야 말았다. 나는 "그럼 그렇지. 왜 스트레스를 안주나 했다"라며 치졸하게 남편의 심기를 건드렸다. 남편 역시 이런 나를 참지 못했다. 우리 부부는 바나힐에 도착해서도 한참을 싸웠다.


내 남편은 피라미드를 직접 눈으로 본 남자다.(출처=pixabay)

내 남편은 대학생 시절 두 달 동안 혼자 인도에서 지낼 정도로 과감한 여행을 즐긴 남자다. 인도에서 돌아온 날 남편은 몰골뿐 아니라 냄새까지 처참했다고 아주버님은 전했다. 그는 지금은 여행 자제 지역으로 분류된 이집트도 혼자서 다녀왔다. 나는 피라미드와 스핑크스를 직접 본 그를 부러워했다.


반면 나는 홀로 여행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대학 시절 뉴질랜드에서 워킹 홀리데이를 마치고 스탑오버로 시드니를 들린 적이 있다.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에서 본 연극은 환상이었다.(돈이 없어서 정작 오페라는 보지 못했지만.) 블루마운틴 트랙킹도 빼놓을 수 없는 경험이었다. 하지만 5일 동안 시드니에서 머물면서 깨달은 건 나는 정말 혼자 하는 여행이 맞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하물며 남편처럼 위험을 감수하는 여행은 말할 것도 없다.


결혼 후 혼자서는 무서워서 가기 힘든 나라를 남편과 함께 여행할 수 있다는 기대가 내게 있었다. 하지만 남편이 결혼을 하고 '안전 여행주의자'로 변해 버렸다. 한 번은 남미에 다녀온 회사 동기가 찍은 사진을 남편에게 보내면서 남미에 가자고 제안했다. 남편은 단칼에 거절했다. 위험하다는 게 이유였다. 에어비앤비 숙소에서 한번 자보자는 내 제안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남편이 이렇게 변한 건 나 때문이다. 여행지에서 문제가 생기면 혼자서는 어떻게든 해쳐나갈 수 있지만, 아내를 위험에 빠뜨릴 수는 없다. 남편이 바나힐로 가는 택시 안에서 그토록 불안해 한 건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남에게 속는 걸 누구보다 싫어하는 그의 성격도 한몫했다. 바나힐 티켓은 가짜가 아니었고, 우리 부부는 매표소 앞 기나긴 줄을 선 관람객을 유유히 지나치며 바나힐에 입장했다. 남편은 그제야 예민하게 군 걸 사과했다.


이런 남편을 이해하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다. 남편은 영어가 유창하지 않지만 한 번도 여행지에서 내게 문제 해결을 미룬 적이 없다. 그러고 보니 연애 시절 홍콩에서 길을 잃었을 때도 남편이 먼저 나서서 길을 물어보는 모습에 반했더랬다. 나는 옆에서 남편의 난감한 영어 발음을 들으면서도 가만히 있었다.


이제는 아기가 생겨 단 둘이 해외여행을 할 수가 없어 정말 아쉽다. 언젠가 아기를 시댁에 맡기고 둘이서 영국에 가는 걸 꿈꿔 본다. 남편과 손잡고 영국 드라마 셜록에 나온 장소 곳곳을 돌아다닐 테다.


나는 아기를 안고 냉장고 앞에 선다. 냉장고에는 신혼여행지였던 핀란드, 파리에서 산 엽서와 남편과 휴가를 보낸 프라하, 발리, 푸껫에서 구입한 마그넷이 붙어 있다. 나는 엽서와 마그넷을 하나하나 가리키며 아기에게 말한다.


"여기는 엄마 아빠가 신혼여행에 가서 대판 싸운 곳이야, 여기는 엄마 아빠가 여름휴가를 가서 대판 싸운 곳이야, 여기는 엄마 아빠가 겨울휴가를 가서 대판 싸운 곳이야."


아기는 내 손가락을 따라 눈을 움직이며 헤헤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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