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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정여 Dec 03. 2019

편하게 샤워를 하고 싶다

남편이여 제발

머리를 감고 몸을 씻은 뒤 샤워 레버를 조금 더 온수 쪽으로 돌린다. 뜨끈해진 물줄기를 목덜미에 대 본다. 눈 안쪽까지 전달되는 뜨뜻한 기운에 기분이 좋다. 물을 낭비한다는 죄책감이 들기도 하지만, 몸의 휴식을 위해 3분 정도 이런 사치를 해본다.   


아기가 몸을 자유롭게 움직이기 시작한 뒤로는 샤워 자체가 사치가 돼 버렸다. 내가 샤워를 하려고 화장실에 들어가면 아기가 어느새 문 앞에 와 있다. 문 앞에서 기다리다 못해 화장실까지 들어와 아기 목욕용 장난감이 담긴 대야를 뒤집어엎는다. 그러다가 싫증이 나면 욕조에 매달린다. 나는 거품을 씻어내면서 샤워 커튼을 닫았다 열었다 하며 아기와 까꿍놀이를 한다. 물기 있는 몸으로 아기를 안고 방에 올려둔 다음에서야 수건으로 닦는다.


평일에는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주말 아침에는 너무한다 싶다. 아빠가 거실에 있어도 내가 화장실로 들어가면 아기는 쪼르르 화장실로 온다. 남편이 한두 번 아기를 안고 거실로 데려가도 제자리다. 민망해진 남편은 "우리 OO는 엄마를 너무 좋아해"라고 말한다. 내가 큰 일을 보려고 화장실에 들어가도 마찬가지다. 오늘도 나는 아기를 안고 큰 일을 봤다. 남편이 황당해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기가 울게 내버려 둘 수는 없기 때문이다.


아기랑 잘 좀 놀아주라, 남편아.(출처=unsplash)

얼마 전 동생이 왔을 때 샤워를 하려고 화장실에 들어갔다. 역시나 아기는 화장실 문 앞에서 문을 두드렸다. 동생이 아기를 부르며 거실로 데려갔다. 나는 얼마 안 있으면 아기가 울면서 문을 두드리겠지 라고 생각하며 서둘러 머리를 감았다. 하지만 웬걸. 밖은 고요했다. 안심이 된 나는 오랜만에 3분의 사치까지 즐겼다.


샤워를 마치고 나와 보니 아기는 이모와 함께 거실에서 놀고 있었다. 동생은 아기의 움직임에 적극 반응해주며 상호작용을 했다. 그렇다. 아기가 아빠보다 엄마를 더 좋아하는 건 맞지만, 내가 샤워를 하러 갔을 때 나를 계속 찾는 건 아빠가 적극적으로 놀아주지 않기 때문이다. 남편은 아마도 소파에 앉아 스마트폰을 힐끔힐끔 보면서 아기가 노는 걸 지켜만 봤을 거다.(스마트폰만 대놓고 봤을지도 모른다.) 상호작용이라고 해봐야 아기가 옹알이를 하면 따라 하는 수준의 반응이었을 테다. 보지 않아도 상상이 간다.


남편에게 "엄청난 깨달음이 있다"라며 이런 얘기를 했다. 가만히 듣고 있던 남편은 웃으며 "뭐야 결국 나 디스 하는 거잖아"라고 말했다.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잘 좀 놀아주라고!"


요일 아침, 아기에게 이유식을 먹인 뒤 샤워를 하러 들어갔다. 나는 남편에게 종이박스 쌓기 놀이를 해주라고 말하며 화장실 문을 닫았다. 샴푸로 머리를 감고 컨디셔너를 바를 때까지 아기는 나를 찾지 않았다.


아기가 화장실 문 앞에 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기를 뒤따라 온 남편은 이상한 소리를 내며 문 앞에서 아기와 놀았다. "호오~ 호오~" 아기가 칭얼댈 때 남편의 소리는 더 커졌다. "빨리 좀 나오세요"라고 들렸지만, 나는 천천히 샤워를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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