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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정여 Aug 26. 2019

남편 안의 가부장

대체 왜 거기서 나오세요?

동생과 단둘이서 여행을 하는 것은 내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다. 동생은 비교적 어린 나이부터 일을 했고, 지금은 제부와 함께 자기 사업을 하고 있다. 휴가를 장기로 쓸 수 없는 데다 짧게 휴가를 내면 남편과 보내야 했기 때문에 나와는 도통 짬을 낼 수가 없었다. 내가 육아휴직을 하면서 비로소 동생에게 시간을 맞출 수 있게 되었고, 동생 역시 이번 휴가는 제부의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나와 보낼 수 있게 되었다.


남편에게 계획을 말했다. 2박 3일 간 동생과 여행을 다녀오겠다고. 그 기간 동안 당신이 휴가를 쓰거나 아니면 친정 엄마에게 아기를 맡기겠다고. 남편은 웬일인지 흔쾌히 "그래"라고 답하면서 본인이 휴가를 쓰겠다고 했다. 당장 오늘부터 아기를 재우는 연습을 하겠다며 의지를 보였다.


졸린 아기를 재우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매일 나와 같이 잠들던 아기다. 남편은 아기를 재우러 들어간 지 한 시간 만에 'KO'를 선언했다. 시뻘게 얼굴로 우는 아기를 안고 나오더니 나에게 이렇게 일갈했다. 


"엄마가 되어가지고 애를 두고 여행을 가겠다니 나는 정말 이해를 못하겠다."


말문이 막혔다. '엄마가 되어가지고'라니. 여행을 가지 말라는 말보다 더 충격적이었다. 그 한없이 가부장스러움에 피가 거꾸로 솟았다. 나는 "애가 태어난 지 10개월이 되어 가도록 잠도 못 재우는 사람이 아빠냐" 라며 비겁하게 공격했다. 그때는 아기를 재우지 못하는 데 더 낙담했을 남편을 이해할 겨를이 없었다.

남편은 언제쯤 아기를 혼자 재울 수 있을까?(출처=pixabay)

남편은 집안일에 적극 참여하는 남자다. 아기가 태어난 뒤로는 더 그렇다. 출근을 하기 전 밀린 설거지를 하고, 분리수거와 쓰레기를 버리는 걸 잊지 않는다. 내 남편이 가부장적이냐고 묻는다면, 그렇지 않다고 답할 것이다. 하지만 남편은 불쑥 튀어나오는 못난 말 때문에 인심을 잃는다.


결혼 직전 명절을 맞아 남편에게 시댁에 선물을 보낼지 상의했다. 남편은 "우리 부모님께 예쁨 받고 좋지"라며 흐뭇해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나는 시부모님에게 예쁨을 받기 위해 선물을 보내려는 것이 아니었다. 결혼을 앞두고 도리라고 생각했. 게다가 나는 시부모님에게 예쁨 받고 싶은 여자가 아니다. 그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부모님이기 때문에 잘해 드려야 한다는 마음뿐이다. 반대로 남편이 우리 부모님께 예쁨 받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나는 그날 남편을 가루가 되도록 갈궜다.


혼인서약을 준비할 때에는 더 어이가 없었다. 서로에게 약속할 것을 적었는데, 남편이 "집안일을 적극 도와주겠다"라고 쓴 것이다. 나는 흥분해서 "집안일은 같이 하는 것이지 도움 주는 게 아니다"라며 울분을 토했다. 결혼식장에 들어선 남편은 하객들 앞에서 "집안일을 적극 하겠습니다"라고 다짐할 수밖에 없었다.


남편도 모르게 툭툭 튀어나오는 남편 안의 가부장이 어떻게 자리했는지 알 길이 없다. 시아버지는 시댁에서 권위가 있으시지만 권위적이시지는 않다. 며느리가 술을 따라 드리려고 하면 '지부지처(지가 부어서 지가 처먹는다)'라며 마다 하신다.(시아버지가 자주 쓰시는 표현이다.) 내게 "시집 잘 왔다"라고 하실 때가 있는데, 그건 시골에서 직접 기른 쌀과 유기농 채소, 오골계를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직접 담근 진하고 향긋한 복분자주를 마시면 시아버지 말씀에 동의 안 할 수가 없다. 시아버지는 그러면서도 "남편은 잘 얻었는지 나는 모르겠으나"라고 덧붙이신다. 그 말 역시 동의 안 할 수 없다.


결국 나는 여행에 아기를 데려갔다. 남편 때문이 아니었다. 복병은 친정 엄마였다. 친정 엄마는 돌도 안된 아기가 이틀 이상 엄마와 떨어져서는 안 된다고 하셨다.(각종 육아서적으로 무장한 친정 엄마의 지극히 주관적 판단이다.) 엄마가 내게 직접 말했다면 나는 엄마한테도 짜증을 냈을지 모른다. 내 성격을 아는 엄마는 동생에게 걱정을 늘어놓았고, 동생을 통해 나를 설득했다. 조카를 아주 예뻐하는 동생은 "차라리 함께 가는 게 마음 편하다"라고 했다. 결과적으로 내 남편만 이득을 봤다. 이틀이나 아내와 아기로부터 자유로운 시간을 보낸 남편은 집 안을 깨끗이 치우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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