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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정여 Aug 16. 2019

민폐 포비아

누가 우리를 차로 태워다 줄 것인가

아기를 재우러 들어간 사이 남편이 옆방에서 시어머니와 통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다음 주에 가족행사로 남편의 시골집에 가야 하는데 기차역에서 시골집까지 차편이 애매한 상황이다. 우리 두 사람이라면 어떻게 이동하든 상관없지만, 10개월 된 아기는 카시트까지 장착된 차가 필요하다. 항상 미리 계획을 세우시는 시어머니는 남편의 사촌 여동생에게 우리를 부탁하셨다. 그러자 남편이 난리가 났다. '민폐'라는 것이다.


내 남편은 남에게 민폐를 끼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바람직한 태도이며, 나는 그런 남편을 존중한다. 하지만 때로는 결벽에 가까운 '민폐 포비아' 때문에 난감할 때가 있다. 아기를 임신한 뒤 누가 아기를 볼 것인가를 두고 이야기를 나눌 때도 그랬다. 나는 육아휴직이 끝나면 친정 엄마가 아기를 봐주시면 좋겠다고 말했다. 감사하게도 친정 엄마의 동의도 있던 터였다. 남편은 "장모님께 민폐"라며 난색을 표했다. 남편의 대안은 차라리 돈을 주고 베이비시터를 고용하자는 것이었다. 나는 남에게는 절대 아기를 맡길 수 없다는 입장을 폈다. 내가 "엄마가 괜찮다잖아"라며 부들부들 떠는데도 남편은 장모님이 너무 힘드실 것이라고 맞섰다. 대화가 평행선을 달리자 나는 임신한 배를 부여잡고 "괜찮은 베이비시터를 못 찾기만 해 보라"며 엄포를 놓았다.


결혼 초기에는 남편의 이런 태도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남편이 민폐에 방점을 둔다면, 나는 감사에 방점을 두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가족 간에 민폐라는 말을 쓰는 게 정 없이 느껴지기도 했다. 기꺼이 도움을 주고, 충분히 감사하며, 또다시 보답하는 게 나와 내 가족이 살아온 방식이다. 지금도 내 동생은 육아하는 언니를 위해서 일주일에 한 번씩 우리 집을 방문해 아기를 봐준다.(물론 조카가 너무 예쁘다는 게 가장 큰 이유다.) 한동안은 마카롱을 직접 만들어 가져다 주기도 했다. 만들기가 까다로워 계란 몇 판을 버려야 했지만 "파는 것보다 맛있다. 또 만들어줘"라며 염치없는 부탁을 하는 언니를 위해서 말이다. 나는 그런 동생에게 평소에 먹고 싶었던 음식을 사주거나 하는 식으로 되갚는다.(이렇게 쓰니 더 보답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남편의 집은 다르다. 시부모님은 아낌없이 퍼주시지만, 받지는 않으신다. 신혼 초에 시부모님이 남미로 여행을 가셨다. 나는 정말 기꺼운 마음으로 시어머니에게 용돈을 보냈다. 시어머니는 마음만 받겠다며 다시 계좌로 돈을 돌려보내셨다. 매년 친정에 쌀도 보내시는데, 친정의 답례는 한사코 거부하신다. 친정 엄마가 고민하다가 양파즙을 보내셨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시어머니는 나에게 베란다에 쌓인 양파즙 상자를 보여주시며 앞으로는 안 보내주셔도 된다고 꼭 말씀드리라고 하셨다. 그때는 어쩐지 섭섭한 마음이 들었지만, 사돈에게 부담 주지 않으려는 배려로 뒤늦게 이해됐다. 이런 부모님 아래에서 자란 남편은 남에게 폐 끼치지 않고 사는 법을 몸소 익혔을 테다.


남편은 사촌 여동생을 자주 보기는커녕 연락도 하지 않으면서 부탁하는 게 미안하다고 했다. 더구나 차를 가지고 오지 않아도 되는데 우리 때문에 차를 가져와야 한다. 시어머니도 그런 남편의 말에 미처 생각지 못했다며 사촌 여동생에게 부탁을 취소하셨다. 그리고는 본인께서 직접 운전해 데려다주시겠다고 했다. 기차역에서 시골집에 갈 때는 상관없지만, 시골집에서 기차역으로 올 때가 문제였다. 우리는 기차 시간 때문에 시골집에서 일찍 출발해야 하는데, 그러면 시어머니는 기차역에 우리를 내려주고 다시 시골집으로 돌아가셔야 한다. 기차역에서 시골집까지 편도 40분 거리니, 우리 때문에 1시간 20분을 운전하셔야 한다. 남편은 렌트를 하겠다고 했지만, 검소한 시어머니는 "그럴 필요가 없다"라고 하셨다.


남편이 시어머니와 통화한 내용을 전하는데 나는 웃음이 났다. 사촌 여동생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노모가 운전을 해야 하는 상황을 만들다니. 발라도 너무 바른 남자다. "아무래도 렌트를 하는 게 낫겠지"라며 동의를 구하는 남편에게 "우리 아기도 생겼는데 앞으로 폐 끼치는 상황이 더 많아질 거 같지 않아?"라고 되물었다. 나라면 사촌 여동생에게 정말 고마워하고 답례로 상품권을 준비해서 줬을 거라고, 내가 사촌 여동생이라면 이런 부탁을 민폐라고 여기지 않을 거라고도 했다. 남편은 (순전히 내가 느끼기에) 큰 깨달음을 얻은 듯한 눈빛이었다. 하지만 물릴 수는 없는 일이다.


결국 남편은 렌터카 예약을 알아보고 있다. 고작 1시간 20분을 타기 위해 몇만 원을 써야 한다. 민폐에 대해 결벽증을 가진 남자와 그의 아내가 치러야 하는 비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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