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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정여 Dec 13. 2019

질문이 너무 많은 남편

결정도 노동이다

복직을 일주일 앞둔 주말 늦은 오후. 남편과 나는 아기를 데리고 한강공원에 갔다. 겨울이 본격 오기 전 많은 시간을 밖에서 보내자는 남편이었다. 내가 아기를 카시트에서 내리도록 하는 사이 남편은 트렁크에서 유모차를 꺼냈다. 유모차를 펼친 다음에는 내게서 아기를 받아 유모차에 앉혔다. 안전벨트도 척척 매 줬다. 남편은 유모차 아래 바구니에 있던 담요까지 능숙하게 찾았다. 담요가 한 개가 아니라 두 개였던 게 문제였을까. 남편은 스타벅스 프리퀀시를 고이 모아 받은 대형 수건과 아기가 신생아 때 쓰던 속싸개를 들고 서서 난제에 부딪힌 듯 내게 물었다.


"둘 중에 뭘 덮어줘?"


내 남편은 질문이 많은 편이다. 아기가 생긴 뒤에는 질문이 더 많아졌다. 아기가 울면 나에게 "OO 왜 우는 거야?"라고 묻는다. 지금은 아기와 어느 정도 의사소통이 가능해져 왜 우는지 짐작하기가 쉽지만, 신생아 때는 정말 어려웠다. 내가 울상을 지으며 "나도 몰라"라고 답하면, 남편은 "네가 OO 전문가잖아"라고 위로 아닌 위로를 하곤 했다.


남편이 이유식을 먹이는 연습을 할 때에는 더 머리가 아팠다. 남편은 이유식을 수저에 얼마만큼 떠야 하는지, 물은 얼마에 한 번씩 먹여야 하는지, 아기가 안 먹을 때는 그만 먹여도 되는지 등등을 물었다. 직관에 맡기는 경향이 강한 나는 생각해보지도 않은 질문들이었다. 이유식은 '적당한' 양을 떠서 먹이고, 물도 서너 수저 이유식을 먹인 뒤 '적당히' 줘온 나다. 나는 남편에게 알맞은 답을 주기 위해 머리를 굴려야 했다.


담요를 뭘 덮어주냐는 남편의 질문에 불쑥 짜증이 난 건 그래서였다. 하나부터 열까지 알려주는 것은 굉장한 에너지를 소비하게 만든다. 무엇인가 결정하는 일도 일종의 노동이다. 모유수유를 언제까지 해야 하는지, 아기 병원은 어디로 데려가야 하는지, 분유를 고르고, 기저귀와 물티슈를 선택하고, 돌잔치 장소를 알아보는 일까지 모두 내 몫이었다. 아기를 낳은 뒤 이런 보이지 않는 '결정 노동'이 어마 무시하게 늘어난 데 나는 지쳐 있었다. 게다가 복직까지 하면 내 노동의 부담은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리라. "둘 다 덮어줘"라고 말할 수도 있었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담요 하나쯤은 남편이 알아서 결정해도 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며 나는 남편에게 짜증을 냈다.


남편은 기분 상해했다. 당연했다. 남편이 보기에는 정말 별거 아닌 일로 아내가 짜증을 낸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속마음을 남편에게 털어놓은 적이 없었다. 남편은 자존심까지 다친 듯했다. 우리는 한동안 아기를 유모차에 앉혀 두고 실랑이를 벌였다.


늦가을 무렵 한강의 노을도 이렇게나 이뻤다.(출처=unsplash)

하늘이 노을로 붉게 물들 때까지 신경전을 치르고 나서야 나는 남편에게 이런 고민을 털어놓았다.


"하나하나 결정하고 대답하고 알려주는 일이 버겁다. 앞으로 내가 회사에 나가면 정말 힘들 텐데 이런 상황이 반복되면 금세 지칠 것 같다. OO는 내 아기이지만 당신 아기이기도 하다. 아빠가 자신감을 갖고 결정해도 된다."


남편은 의외로 쉽게 내 고민을 이해하는 듯했다. "이제 질문을 줄이고 내가 알아서 해 볼게." 남편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마음속 부담이 많이 줄어들 것 같았는데 찜찜한 기분은 며칠이 지나도 가시지 않았다. 남편이 모처럼 저녁 약속으로 퇴근이 늦은 날이었다. 나는 아기를 재운 뒤 소파에 누웠다. 아기가 태어나고 지금까지 남편이 내게 한 질문들 곱씹어 봤다. 재우기 전 분유 양은 얼마나 타야 해? 아기 티셔츠는 몇 번째 서랍에 넣어? 힙시트 가져갈까? 옷 뭐 입히지? 산책 나갔다가 아기가 자면 다시 들어와야 하나? 하나 같이 남편이 육아에 적극 참여해야지만 할 수 있는 질문들이다. 나는 그제야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여보, 주말에 담요 덮는 거 물어봤다고 뭐라 해서 미안해. 안 물어보고 덮어주지 않을 수도 있는데. 물어보는 건 당신이 그걸 챙기고 있다는 건데. 나 앞으로 진짜 질문한다고 뭐라 하지 않을게. 우리 관계가 잘 돌아가는 건 당신이 많이 물어보고 대화를 하려고 해서야. 진심으로 미안하고 사과할게."


나는 남편에게 장문의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냈다. 남편은 "아..."라고 하더니 "내가 질문이 많긴 하지. 고마워. 이해해 줘서"라고 답했다. 남편의 질문은 그렇게 다시 봉인 해제됐다.


그리고 또 며칠 뒤. 아기를 씻기고 뒤처리를 남편에게 부탁했다. 여기서 뒤처리란 아기 몸을 수건으로 닦고, 몸과 얼굴에 로션을 발라주고, 기저귀를 채우고, 옷을 입히는 일을 말한다. 남편이 잊을까 싶어 "얼굴에 로션 꼭 발라줘"라고 당부했다. 남편은 자신 없는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모르는 척 샤워를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이 다급하게 화장실로 왔다. 그리고는 작은 병을 보여주며 내게 물었다.


"이거 발라주면 되는 거야?"


나는 대답을 하는 대신 남편이 손에 쥔 작은 병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작은 병에는 누가 봐도, 똑똑히, 그것도 새빨간 글씨로 'FACE LOTION'이라고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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