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여행 최고의 득템
스산하다.
비 예보를 듣긴 했지만 아침에 집을 나설 때까진 아직이었다. 그렇다고 깨끗한 하늘은 아니었을 텐데 아마 날씨를 제대로 감지할 정신이 아니었지 싶다. 어제 나는 이승환 공연장에 있었고 열기기 식지 않은 채 잠이 들었었다. 고속도로에 진입할 때쯤 비가 시작되긴 했으나, 이승환 새 앨범이 나온 이후로 카 오디오는 쭉 이승환이었으니 가라앉으려던 흥분도 다시 띄울 출근길이었다. 차유리에 자국이 남으니 알지, 비가 오든 말든.
그런데 퇴근길은 완전히 다르다. 6시도 채 안되었는데 이미 아주 깜깜하다. 비가 꽤 내리는데 미세먼지를 씻어내기는커녕 오히려 품었는지 탁한 기운이다. 아침 같은 들뜸은 어디에서도 기대할 수 없다. 스산하다. CD를 바꿔 넣었다. 파두 fado 앨범이다.
이 앨범을 처음 들은 날도 공기가 가볍지 않았다.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길목이었으나 제법 굵은 비가 내려서인지 계절감과 다르게 쓸쓸했다. 공원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CD를 플레이시켰다. 리스본 오리엔트 역내 서점에서 우연히 발견한 강렬한 빨강, 아말리아 로드리게스 Amália Rodrigues의 파두였다. 애처롭고도 단단했다. 일견 어울리지 않는 두 성질이 어색하지 않게 공존하는 것이 파두 본연인지 그녀의 음색에 기대는지는 분간할 수 없었다. 다만 고적한 비와 함께여서 더 슬프고 더 야무지게 들린다고 생각했다. 그날의 잔상이 불러온 연상 작용 같은 걸 테다. 유독 외롭고 쓸쓸한 비가 내리면 파두가 생각난다. 오늘 같은 겨울비는 거의 조건반사다.
파두가 노래하는 내용은 대부분 ‘사우다드 saudade’라고 한다. 포르투갈어 사전을 찾아보면 ‘갈망’, ‘동경’, ‘사모’라고 나온다. 오픈 사전에는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마음이나 잃어버린 무엇인가를 그리는 애수, 향수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설명되었다. 그러나 듣기로 다른 언어로 번역이 어려운, 포르투갈 특유의 정서라 한다. 포르투갈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항해’의 역사를 가진 나라다. 바다로 향했던 사람들이 망망대해에서 경험하는 막막함, 낯선 땅에서 느끼는 고향에 대한 향수, 그리고 그들을 바다로 보내고 남은 사람들이 느끼는 그리움, 등은 개인의 감정이 아니라 포르투갈인 모두에게 해당되는 슬픔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외국인은 결코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을 그 감정이 사우다드가 아닐까. 파두가 들려주는 애처롭고도 단단한 그 어디쯤의 떨림으로 겨우 짐작만 한다.
리스본을 여행한다면 빠뜨리면 안 될 것이 파두 공연이라 했다. 알파마와 바이후 알투 거리는 밤마다 파두로 가득 찬다고는 하지만 무턱대고 헤맬 수는 없어 노부부가 운영한다는 한 곳을 미리 알아뒀었다. 그런데 비교적 최신 블로그에서 얻은 정보여서 전혀 의심하지 않았건만 식당이 제 위치에 없었다. 골목을 잘못 들어섰나, 주변을 몇 번 더 헤집던 중 ‘LUSO’를 발견했다. [비긴 어게인 2]에서 봤던 간판이다. 방송을 탄 탓에 사람이, 특히 한국인이 몰린다는 평과 높은 가격 때문에 애당초 제외했고 무엇보다 예약이 필수라고 했는데 당일 아침에서야 검색을 시작했던 나는 가려야 갈 수도 없다고 생각했던 곳이었다. 그러나 리스본에서 파두를 듣지 못할 수도 있는 판이었기에 무작정 갔고 대부분의 테이블에 예약 표시가 있었는데 무대 측면 구석진 곳 2인 테이블이 마침 공석이었다.
‘오밀조밀 모여 앉아 구슬픈 노래에 귀 기울이는 장면을 상상했는데…….’
분위기는 기대와 사뭇 달랐다. 규모가 있는 식당은 인테리어도 화려했고 수프부터 디저트까지 풀코스 요리가 나왔다. 자리를 채운 손님들의 표정도 참으로 여유가 넘쳤다. 네 명의 가수들이 번갈아 무대에 나왔다가 마지막 곡은 모두 함께 불렀다. 말하자면 마치 고급 디너쇼 같았다. 한 번도 직접 가 본 적은 없지만 어르신들이 기꺼이 비싼 값을 치르시면서 디너쇼를 갈망하는 이유가 있겠지, 그날 이목구비는 확실히 즐거웠다. 파두도 듣기에 나쁘지 않았다. 기타 연주도, 가수들의 실력도 부족하지 않았다. 다만 애잔한 감성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가사를 이해할 수 있었으면 조금 달랐을까? 그날 저녁은 여행 중 가장 화려한 만찬이었음에도, 옆 테이블 스웨덴 중년 부부와의 대화가 더 기억에 남은 것을 보면 파두는 2% 부족했음에 틀림없다.
아말리아 로드리게스의 앨범을 발견했을 때 주저 없이 집은 건 어쩌면 공연이 2% 부족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파두의 여왕이라 불리는 그녀 덕분에 포르투갈 서민 노래였던 파두는 전 세계에 알려졌다고 한다. 그녀의 파두는 과연 어떻다는 건지 궁금했다. 이미 말했듯이 그녀의 목소리는 아프게 하면서 또한 위로를 건넨다.
리스본 ‘LUSO’에서 들었던 파두가 아쉬웠던 것이 곡 자체 때문은 아니었을 것이다. 리듬만 기억해 보면 아말리아 로드리게스 앨범에 수록된 것과 같은 곡도 불렸던 거 같다. 다만 언제 어디서 어떻게 듣고 기억하는지의 차이일 것이다. 만약 한국에 돌아와 비와 함께 파두를 듣지 못했다면 내가 기억하는 파두는 화려한 디너쇼였을 뻔했다. 다행히도 (여전히 완벽한 이해는 아니겠지만) 사우다드를 생각한다. 그녀의 앨범은 이번 여행 최고의 득템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