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더워 눈을 뜨는 주말 아침. 확인하니 생각보다 이른 시간이었다. 드디어 더워서 강제 기상하는 날이 오고야 말았고, 당분간은 살아야겠다는 심정으로 잠에 덜 깨 에어컨을 켤 것이다. 밖에 나갈 일정은 없고 안에 있는 동안 짧게라도 켜둬야지 마음먹은 채 시원한 바람을 쐬었다. 동향의 방이라 여름엔 오전 시간 동안 볕을 잔뜩 받아 한껏 달궈지는데, 해를 가리지 않는 게 아무래도 좋겠지 싶어 일찍 깨는 쪽을 택했다. 오전만 잘 버티면 그럭저럭 지낼만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타이밍이 오면 실감하는 것이 있다. 앞으로 한 달쯤 내가 직접 만드는 요리는 자제해야 하는 시기라는 것. 한동안 저녁은 가급적 밖에서 먹고, 주말도 최대한 불을 쓰지 않으면서 쟁여둔 냉동식품으로 지내야 한다. 괜히 음식을 만들어 두고 남겼다가는 상하기도 쉬운 데다 요리하면서 나온 식재료 때문에 벌레도 잔뜩 불러 모을 수 있는 그런 계절. 그래서 이런 시즌을 맞기 전, 약간의 대비를 해야 했다.
그 대비를 해야 될 때가 바로 그날이었다. 집에 틀어박혀 이렇게 하루는 한여름을 위한 준비를 해야 한다. 작업을 빨래도 돌렸겠다 한낮이 되기 전 맛있는 디카페인 커피도 사 왔고 플레이리스트도 준비했으니 모든 것이 완벽했고. 이 길지 않은 작업이 끝나면 이른 저녁을 먹으면 될 것이다.
그래서, 이날 나의 일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냉장고 정리', 그리고 '닦아내기'.
냉장고 정리는 긴 과정이 필요한 일은 아니다. 그러니까 흔히 냉장고 정리라면 생각하게 되는, 음식 들을 모두 꺼내 다시 배치하거나 소분하는 일은 아니고, 당분간 음식을 만들지 않겠다는 가정 하에 넣고 잊어버린 채소는 없는지, 반찬을 꽤 오래 두고 먹지는 않았는지 살펴보는 것 같은 일이다. 그래서 안에 있는 것들의 재료를 0으로 수렴하게끔 빨리 먹어치우고, 한동안 요리할 계획도 없으니 식재료를 들이지 않겠다는 마음을 먹는 것으로 충분하다. 장을 본 지도 오래였고 냉장고에 음식을 쟁여두는 스타일은 아니라 걱정보다 별것 아닌 일이었다. 진작에 했으면 좋았을 텐데.
좀 더 자주 씻어줬어야 할 브리타 정수기도 씻어 말리고, 후드와 인덕션 위를 좀더 꼼꼼하게 닦고, 식용유 병과 간장 병에 내려앉은 먼지도 닦았다. 소금 설탕 같은 조미료통을 닦은 뒤엔 키친크로스를 하나 덮어두었다. 부엌에 수납 공간이 없다시피 해 쌓이는 먼지를 그대로 맞게끔 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한동안 요리를 쉬는 기간엔 아예 그 위를 덮어두는 방법은 나에게 좋은 팁이 되어주었다. 여름의 먼지는 습기를 머금은 듯 유독 끈적거리는 느낌인데, 다시 요리를 시작하게 되면 덮은 천을 세탁하면 되니 간단하다.
이날의 저녁은 냉장고에 있던 감자채 볶음과 오이를 밥과 비벼 먹는 일로 보냈다. 앞으로 며칠간은 이렇게 냉장고에 있는 것들을 먹는 냉파(냉장고 파먹기)를 하며 보낼 것이다. 당분간 냉장고 안팎으로 남겨두는 식재료라고는 아마 계란, 레토르트 카레와 비상용 떡볶이 밀키트 외엔 없겠지. 특히 냉동실은 얼려둔 밥들, 주문한 닭가슴살과 볶음밥으로 넉넉히 채워뒀다.
이렇게 든든하게 채운 마음이, 그다지 상쾌하지는 않다는 사실에 조금 슬퍼졌다. 앞으로 나의 저녁은 제대로 된 한 끼를 먹는 기분 대신 어쩐지 때우는 느낌을 내내 받을 예정이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지. 대충 비벼놓은 밥을 꼭꼭 씹어 넘기면서 이번 여름을 별 탈 없이 넘기자고 스스로를 독려한다. 제발 별일이 없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