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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 미 선 Aug 28. 2024

인생 그게 뭐라니?

오스트리아 편 (2)

머물고 또 머물고 싶었던 `할슈타트`를 뒤로 버스를 탔다.

여길 또 올 수 있을까. 

다시 와 보고 싶지만  다시 갈 수는 없을 것만 같다.

세상은 넓고 갈 곳은 많으니까.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지다 보니  `잘츠카머구트`에 도착했다.

여긴 아무래도 알프스 산자락에 드리워진 볼프강을 빼놓을 수 없다.

유람선을 타면서 볼프강을 동영상으로 찍어봤다.


강변길에 늘어선 집들이 어쩌면 그렇게나  평화롭던지.

강변길 마을은 디저트 접시 위에 빨간 앵두처럼 앙증스럽다.

강물 없이 산 등성이에 생뚱맞게 서 있는 집보다 강물 주변은 왠지 더 풍요로움을 연출한다.

캔버스 위에 충실하게 그린 유화가 거기 서 있었다.


시퍼런 강물의 유속을 따라 배가 선착장에 닿고 또 점심시간이 되었다.

하는 일도 없이 꼬박꼬박 세끼의 식사는 잘도 퍼준다.

`슈니첼`이라는 음식인데 돼지고기를 기름에 튀겨 감자와 샐러드를 곁들였다.



                              나무 뒤편 왼쪽 노란 집 모차르트 외가.


볼프강 주변이라선지 경관도 멋지고 여기저기 꽃들이 풍성하다.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는 아무래도  `오스트리아` 수도 `비엔나`가  될 것 같다.

`잘츠부르크`에서 3시간 30분을 버스로 이동하여 도착한 `비엔나`

650년  동안 유럽을 지배했던  합스부르크 왕가는 또 어떤 이미지로 우리들에게 어필할 것인가!

그것이 무척 궁금했다. 

비엔나 역시 음악의 도시다.

베토벤이 인생의 절반 이상을 이곳에서 생활한 터전이기도 하다. 


1440년 `합스부르크` 왕가가 이곳을 수도로 정하면서 예술, 문화, 정치는 

유럽 전역을 휘감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성로마제국의 위엄과 오랜 왕권유지는 유서 깊은 건축물들과 여러 방면의 예술인들을 배출해 내는 

기반이 되었다.


왕권을 강화, 계승하기 위해 그들이 지켜낸 응집력은  지금도 빛으로  반짝거린다.

城(성) 궁궐, 성당등의 웅장하고 화려한  건축물들이 그 좋은 본보기다.

그 누구도 범접하기 힘든 합스부르크 왕가의 찬란한 역사가 곳곳에서 그때의 영화를 대변하고 있다. 


쇤부른 궁전이 그 대표적인 예다.

쇤부른의 `쇤`은 좋다, 멋지다는 표현으로 합스부르크 왕가의 여름 휴양지다.

쇤부른 궁전의 방이 무려 1400개에 달하고  면적은 50만 평이나 된다.

구중궁궐이다.

누가 어디 숨었는지 석 달 열흘을 뒤적여도 못 찾겠다. 

쇤부른 궁전의 정원.



`쇤부른` 궁전에 들어서니 화려한 천장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당시의 유명한 화가들이 불려 와 이곳 천장에 그림을 그린 것이  지금까지 잘 보존되고 있다. 

그림까지도 화사하고 웅장하고 고급지다. 




샹들리에의 현란한 불빛은 지금도 합스부르크 왕가가 현존하고 있는 듯하다.

한쪽에서는 여전히 건물의  보수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합스부르크 왕가를 위한 영속성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마리아 테레지아 모친. 엘리자베스 크리스티네 황후.

                   마리아 테레지아 부친 카를 6세.


`마리아 테레지아`는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합스부르크) 공국의 황제요, 황후였던 건 누구나 안다.

유럽 최대의 왕실, 합스부르크 가문의 전통적인 정략결혼을 타파하고 `프란츠 슈테판`과 결혼하여 

16명의 자녀들 둔 통크고 당찬 여인.


장남에게만 왕위를 계승하는 전통에 따라 본래는 여왕이 되지 못할 처지였지만, 

장남이 일찍 사망함으로써 어려운 과정을 통과하여 합스부르크 대 제국의 황후로 등극했다. 

그녀가 이 궁궐에서 황후로서 누렸던 역사는 다 열거할 수 없지만 몇 장의 사진만이라도 

당시의 권세와 욕망을 읽어낼 수 있다.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가족들.


  


하단, 세 번째 푸른 원피스를 입은 여인이 누구일까?

말도, 탈도 많은  `마리 앙투아네트` 

마리아 테레지아의 막내딸답게 미모가 반짝인다.


프랑스 왕 루이 16세와 정략결혼하여 순조롭던 결혼생활은 프랑스혁명을 맞으면서 

나락으로 떨어졌다. 

38세, 생일을 2주 앞두고 그녀는 젊은 날을 단두대 위에서 마감했다.


인생무상과 권력 무상을 생각해 보며 인파에 휩쓸렸다.

어찌나 사람들이 많던지 사진 찍기가 정말 힘들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어디로 숨었는지 보이지도 않는다.

찍은 사진을 보니 두상 전문가가 되려는지 남의 뒤통수만 수두룩하다.

허둥댄 사진은  비율도 맞지 않는다.


벨베데레 궁전 정문.


화려한 쇤부른 궁전을 물러나  `벨베데레 궁전`으로 발길을 옮겼다.

벨베데레 궁전은 현재 미술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벨베데레는 `전망이 좋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듯이 건물 외관에서 볼 때 시원한 개방감을 준다.

너른 광장 앞에는 연못이 자리하고 있어 바로크 양식의 둥근 지붕과 한 쌍의 그림을 

그려내고 있다.


                                                                          

벨베데레  궁전 전경.

미술관에는 오스트리아 출신 화가들의 그림들이 유독 눈에 띄었다. 

대표적인 화가인 `구스타프 클림트`와 `에곤 실레` `한스 마카르트`작품들이 많았다.

`키스` 그림 앞에선  그냥 지나가는 관람객을 보지 못했다. 

그만큼 유명세를 타고  찍힌 사진들은 전 세계로 날아갔다. 

구스타프 클림트 `키스`

`구스타프 클림트` 

그는 미술에 천재성을 지녔지만 시대를 거스르는 반항아였다. 

500년 동안 줄기차게 이어져온 오스트리아 고전주의 화풍을 확 깨부수는 시도를 감행했다. 

동생과 아버지가 갑자기 사망하는 충격을 겪으면서 `허무주의`를 느꼈고 허무주의는 곧,

매번 정형화된 틀 안에서 발전하지 못하는 미술계를 직시하게 된다.


`이건 아닌데. 이게 무슨 그림이야`

`그림이란 자고로 창의성과 개성이 중요한 건데.`

`똑같고, 똑같고, 똑같아.`


그때 프랑스 파리에서는 인상주의 물결이 일어났고, 새로운 예술운동 (Art Nouveau)이

번지고 있었다.

이것은 클림트가 빈 미술가 협회에 폭탄선언을 하는 계기로 연결된다.

이른바 분리주의(secession) 그룹을 결성하게 된 것이다.


분리주의는 그들만의 화풍을 개척하고 키우기 위해 부단히 반항기를 펄럭거렸고,

결국 `표현주의`라는 새로운 화풍을 오스트리아 미술계에 내딛게 된다.

고전주의 화가들의 맹비난을 일축하면서.

`에곤 실레`와 `오스카 코코슈카` 는 클림트의 표현주의 영향을 가장 가까이서 답습한 

화가이기도 하다. 

유디트.(클림트)


프리차 리틀러 (클림트)


꽃이 있는 농장 정원. (클림트)


인파에 밟히지 않고 무사히 돌아온 것만도 행운이다.

갈길은 바쁘고 사람은 많고 사진은 찍긴 찍어야겠고 어쩌란 말이냐.

사진이 누워있다.

과감하게 프레임을 자르는 과오?를 범했다. 


니콜라스 가족.


신고전주의 대표적 화가  자크 루이다비드 작품.



밀려다니며 겨우 본 작품들은  헐레벌떡 먹은 떡처럼 그림을 소화시키지 못했다. 

그래도 거기까지 가서 진품을 구경하니  클림트와 악수라도 한 것처럼 반가웠다. 

중세시대의 미술계 반항아로 그의 그림을 보려고 몰려든 군중들을 보면서,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는 명구가 새삼 맞아떨어졌다.


사람은 갔어도 간 사람들이 전해주는 메시지는 아직도 생생하게 살아있다.

그것은 중세와 현대의 가교역할을 하고 있기도 하다.

한 사람의 재능은 참으로 영향력이 대단하다.

길이길이 현세 사람들의 마음속에 샘물을 파놓으니 말이다.


미술이든 음악이든 문학이든 사람들 가슴속을 파고드는 건 

여전히 변함없는 `진심`이다.

진심과 열정이 버무려진 작품 앞에서 사람들은 갈길을 잊고 한참을 침묵한다.

작품들을 뒤로하고 그곳을 나오면서 화가들의 천부적 재능에 다시 한번 감복한다.


벨베데레 궁전 다음에 간 곳은 `슈테판 대성당`이다. 

옛 시가지 중심에 위치한 슈테판 대성당은 오스트리아에서는 최대로 큰 고딕 성당이다.

성당의 남탑은 137m로 성당의 탑으론 세계에서  세 번째로 높다. 

고개를 뒤로 젖히고 성당을 올려다보며 저렇게 높고 뾰족하고 좁은 상층을 어떻게 건축했는지가 궁금했다.

모차르트가 이곳에서 결혼식과 장례식을  거행한 장소이기도 하다.

이곳은 시민들이 자부심을 갖는 건물이기도 해서 매년 여기서 새해를 맞이한다.


슈테판 대성당 전경.


허락한 자유시간은 성당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거리를 배회했다.

마차들이 성당 주변에서 끊임없이 관광객을 실어 날랐다. 

말발굽  `편자`에선 `힘들다. 힘들다`가 길바닥으로 찍혔다.

기력이 하나도 없어 보인다.


말도 힘들고 사람도 힘들고 잠깐 자유시간이 주어져 노상 카페에 앉았다.

빵이 나오길 기다리고 있는데 나도 모르게 포즈가 들통났다. 

덩달아 어떤 뚱뚱한 남자가 동양여자가 신기한지 자꾸 나에게 카메라를 들이댔다. 

"Don't take a picture of me."

그러든지 말든지 자꾸만 찍는다.

`너는 뭐니?`

(인물사진을 올렸다가 요즘 말썽이 되고 있는 deep fake 문제로 삭제)


저녁에는 선택관광으로  비엔나 음악회에 참석했다.

소위 지배계층이라고 자부하는 클럽(살롱)은 그들만의 울타리였다.

문학, 미술, 음악이 살롱에서 행해지고 발전해 갔다.

작은 음악회를 통해 그들이 부르주아 집단임을 표명하며 궁정 중심의 문화가 

소사이어티(society)로 흘러드는 풍조로 퍼졌다.

그 유형의 하나로 음악회가 빠질 수 없다.


비엔나 음악회는 선택관광으로 1인당 100유로다.

비싼 만큼 귀족처럼 즐겨보라는 가이드의 안내에 가는 길이 설렘으로 가득했다.

자리는 지정석이 없었고 순서대로 착석했다.

실내는 생각보다 좁았다. 

살롱다운 아늑함은 있었지만 조금 갑갑하긴 했다.

              

무대가 고작 이렇다.  

여섯 명이 오브작 사부작 서서 연주를 하는데 사뭇 표정이 진지하다. 

연주 중에 공주로 분장한 키가 크고 풍만한  여자와  훤칠한 키의 남자가 춤과 노래로  

분위기를 한껏 살려냈다. (사진촬영 금지)

살롱에 초대받은, 아니 살롱의 일원인 것처럼 손바닥이 신났다.


오스트리아의 낮과 밤은 이렇게 흘러갔다.

이제 오스트리아를 떠나 헝가리로 짐을 옮겨야 할 시간이 다가온다. 

고단하지만 즐겁고 즐겁지만 고달픈 여행은 이렇게  잘도 흘러갔다. 

오스트리아여~~ 

우리가 당신네 땅에 와서 소비하고 갔으니 당신네 들도 한국으로 놀러 와서 

돈보따리 좀 풀고 가길 바란다.


"오메! `참외`라는 이 노란 과일은 뭐야. 왜 이렇게 맛있는 거야?"

"어머, 이건 세계에서 한국에만 있는 과일이라네."

"오! 한국이 이렇게나 신기하고 멋진 나라였어? "

"오스트리아만 멋진 줄 알았더니 한국은 더 멋있네."

오스트리아 인들이 한국에서 호들갑스럽게 떠드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그곳을 떠났다.



다음회는 헝가리 편이 이어집니다.

헝가리는 여행의 마지막 종착지로 거기서는 또 무슨 이야기가 펼쳐질까요? 

개봉~ 박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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