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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계현 Dec 29. 2021

자소서는 '구애편지'처럼

- 나를 보여주는 것, 진솔성과 융통성 사이 그 어딘가

살면서 누구나 간극을 경험한다. 삼청동 파스타를 먹고 싶지만 현실은 로제파스타맛 볶음면. 먹고 싶은 음식과 실제 입에 들어가는 음식이 같으면 얼마나 좋을까. 쇼핑몰 광고모델의 여리여리한 자태에 반해서 샤랄라 스커트를 샀는데, 내가 입으니 한낱 펑퍼짐한 치마다. 그 모델은 대체 얼마나 마른 것이냐. 씁쓸한 사기극. 역시 옷 쇼핑은 검색하고 결제하고 택배 오기를 기다리기까지, 딱 그때까지만 행복하다.


좋아하는 일만 하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마음이 편해진 만큼 벌이도 줄고 보니, 좋아하는 소비를 못한다는 괴로움이 찾아왔다. 아침잠을 꾹 참고, 짓밟힌 자존심을 꾹 참고, 직함 뒤에 숨어 있는 존재를 꾹 참고, 다시 출근하는 직장인의 삶을 택해야 하나 고민이다. 이상과 현실은 다르다는 걸 숱하게 겪어온 40 대건만, 하루에도 여러 번 뒤척거리는 생각에는 여전히 답이 없다.


아직 마음 결정을 하지 못해 투덜거리면서도, 원서접수일에 맞춰 서류를 준비한다. 제일 번거로운 것부터 하자. 이전 직장에 연락해서 경력증명서 발급받기. 그동안 이직을 여러 번 해서 챙겨야 할 서류도 많다. 오랜만에 인사담당자랑 통화했는데 참 친절하다. 아마 담당자가 바뀐 듯. 온라인 발급 시스템으로 바뀐 기관도 있었는데,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잊어버리고, 그 사이 핸드폰 번호도 바꾸었더니 본인인증이 안되어 결국 발급에 실패, 시스템은 좋아지는데 기억력이 감퇴되니 '나를 인증할 수 없어' 무용지물이다. 젠장.


다음은 이력서, 경력직이다 보니 이력서에 쓸 게 많다. 사회초년생일 때는 이력서에 뭘 써야 하나 막막했다. 휑하니 비어있는 칸이 미웠다. 글씨를 좀 키워볼까, 칸을 아예 없애버릴까. 신입 지원자의 이력서는 여백의 미가 느껴지다 못해, 뭐라도 쓰라는 묘한 압박감을 준다. 이력서 한 줄을 채우려고 운전면허를 따고 영어시험을 봤다. 그 한 줄이 뭐라고.


이력서는 나를 담아내지 못한다. 운전면허 1종을 땄지만 15년이 지난 지금도 초보운전 딱지를 못 뗐다. 영어 시험 성적은 중상위권이지만 파란 눈의 외국인은 여전히 두렵다. 자소서도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여주지 못한다. 어쩌면 이상에 가까운 가상의 인물. 성실하고 책임감 강하며 공정과 상식을 실천하는 지식인, 혹은 봉사정신이 투철하고, 높은 도덕성을 지닌 모범생, 글에 신뢰를 더하기 위해 살짝 단점을 언급하기도 하지만, 그러한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들인 노력도 기술되어야 하고, 이미 극복되었다는 말로 마무리되어야 한다.


구직자니까. 이력서, 자소서로 의사결정권자에게 구애를 한다. 나의 진짜 모습에서 모나지 않은 10% 가지고 전부인  포장한다. 이건 사기가 아니라 '융통성'이라는  알기까지 숱하게 많은 이력서를 버렸다. 아무리 사실이어도 현실에 가까운 모습이어도 의사결정권자가 싫어할만한 내용을 쓰는 , 솔직함보다는 '무지' 가깝다. 구직에 실패하면 솔직하다는  무슨 소용인가. 벌레만 보면 기겁하는 쫄보여도 좋아하는 이를 위해 기꺼이 벌레 등짝을 후려쳐야 하고, 친구들과는 욕을 하면서 친분을 나눌지라도 좋아하는 이에게는 고운 말을 써야 연애가 가능하다.

자소서를 쓰고서 몇 번씩 다시 읽어본다. 평가자가 되어 읽어본다. 나 같으면 이런 사람을 뽑고 싶을지를 염두에 두면서. 현실의 내 모습과는 다른 이상적인 모습이더라도, 절대 겁먹지 말고 그냥 내는 거다. 일자리를 얻기 위한 구애니까. 다만, '돋보이고 싶은 욕심'때문에 없는 것을 지어내거나 있다고 착각하면  된다. 그건 엄연히 범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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