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센터까지 차로 20분, 버스로 40분. 더디게 가지만 일부러 버스를 타고 가는 날은 '책을 읽고 싶어서'다. 허나 막상 버스에 올라타서 자리에 앉으면 습관적으로 핸드폰을 꺼낸다. 딱히 보고 싶은 게 없는데도 유튜브를 켜고, 알고리즘이 찾아주는 영상을 본능대로 클릭한다.
꼬박꼬박 챙겨 먹은 열량을 자극적인 영상 클릭에 소비한다. 괜히 어지럽다. 느긋한 거북이과 인간인지라, 유튜브에서 쏟아내는 정보가 연달아 들어오면 속이 울렁거린다. 나중이면 기억도 나지 않을 자극적인 정보들. 각성이 들 때면 검색창에 '책 리뷰'라고 친다. 좋은 책을 추천받을 때도 유튜브를 켜게 되다니. 유튜브랑 책이 서로 대척점에 있는 것처럼, 둘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고 있을 때, 솔깃해지는 책을 한 권 추천받았다.
유튜버는 글 쓰는 일에 꽤 가까운 사람처럼 보였다(작가라고 했던가.. 잘 기억이 나지 않는). 한 문장 한 문장이 좋아서 필사하고 씹어먹을 정도(?)로 봤다고 한다. 누군가의 글에 그렇게 집요하게 빠져본 적이 없기에 그냥 흘려 들었다. 구매를 결심한 건, 유튜버의 극찬보다는 책 표지가 마음에 들어서였다. '넌 늘 지엽적인 데 신경을 빼앗기더라'는 예전 은사님의 질책이 귓가에 맴돌지만, 책표지는 내용을 함축적으로 담아내는 얼굴이니, 나의 구매 기준이 영 틀리지는 않았으리라.
구겨진 휜 셔츠 차림을 한 남자의 뒷모습. 작가는 표지 선택을 두고 이렇게 말한다. '내가 이르지 못할 슬픔을 가졌을 당신의 뒷모습을 그림 밖에서 바라본다(p.8)'
슬픔에 대한 작가의 자세가 보인다. 타인의 슬픔에 대해 섣불리 아는 체하지 않는다. 부모를 잃은 아이, 아이를 잃은 부모, 사랑하는 사람을 떠내 보낸 이들에게, 각자의 슬픔에 빠진 그들에게 '얼마나 슬플지 알 것 같다'라고 아는 체하지 않는다. '위로받는다는 것은 이해받는다는 것'이고 '위로란 곧 인식이며, 인식이 곧 위로'라고 말하는 작가는 타인의 슬픔을 위로하기 위해, 정확히 인식하려고 애쓴다.
부모에게 버림받아 휘청거리며 살아온 한 40대 남성이 상담 중에 말했다. "제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선생님은 모르실 거예요. 저처럼 살아오진 않으셨을 테니까." 맞다. 다른 삶을 살았지. 저마다 각자의 삶을 산다. 똑같이 급식비를 내지 못해도 '너의 가난'과 '나의 가난'은 다르고, 슬픔의 깊이와 농도도 다르다. 그래서 '섣불리 안다'라고 하지 못한다. 다만 그 슬픔을 이해하고 싶다. 똑같은 슬픔을 느끼지는 못해도, 어쩌면 그 언저리에 가지도 못할지 몰라도, 당신이 느끼는 그 주관적인 슬픔과 고통을 이해하고 싶다고, 말해주고 싶다.
작가는 미야모토 테루의 「환상의 빛」이라는 작품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이 소설을 읽으면 알게 된다. 인간의 뒷모습이 인생의 앞모습이라는 것을. 자신의 뒷모습을 볼 수 없는 인간은 타인의 뒷모습에서 인생의 얼굴을 보려 허둥대는 것이다(p.55-56).'
나 역시 누군가들처럼 내 삶을 잘 살아내려 한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왜 이렇게 원하는 대로 안되는지' 고민하지만, 한 번뿐인 인생이라 내 삶은 생방이다. 그래서 삶을 배우려 타인의 삶을 엿보게 되는 것 아닐까. 드라마를 보고, 소설을 읽으면서, 주인공에 빙의되어서 울고 웃으면서. 타인의 삶을 이해해 가면서, 그 안에서 인생의 의미를 되새김질하는 건 아닐까.
타인의 슬픔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결국, 나를 위한 거다. 그에게 '정중한 공감'을 표하고 싶어 '적당한 거리감'을 두고 다가가려는 노력이지만, 결국은 내가 살지 못한 인생의 앞모습을 파헤치려는 몸부림일지도.
사실, 평론가에 대한 선입견이 있다. '쉬운 걸 어렵게, 단순한 걸 비틀어서, 명료한 걸 복잡하게 설명하는 사람'이라는 편견. 주관적인 고집쟁이 같은 인상. 언제부터 그런 편견이 생겼는지 모르겠다. 작가가 뼈를 갈아 만든 작품을 놓고 '깊이가 있네, 없네'하면서 평가하는 것에 대한 알레르기반응일까. 어쩌면 '지극히 취향에 따른 주관적인 평가'임에도, 평론가의 견해를 우러러보는 일부 언론에 대한 반감일까.
문학평론가 신형철 님의 글을 보면서, '평론가'에 대한 인상은 나의 편견이었음을 깨달았다. 일단 어렵지 않았다. 문학적 수사가 있는 부분도 몇 번 곱씹다 보면 다 이유가 있었다. 꼭 있어야 하는 표현이었다. 게다가 마음에 울림이 남는다.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지고, 깊이 있게 이해하려는 노력이 느껴진다. 쉽게 쓰지 않았다고 느끼니, 가볍게 읽고 버릴 수가 없다.
다만, '그림 밖에서 바라본다'는 점에서 '그래, 평론가였지'하고 느꼈다. 상담사인 내가 이 부분을 고쳐 쓴다면, '내가 이르지 못할 슬픔을 가졌을 당신의 뒷모습을 그림 밖에서 바라본다 조용히 바라보면서 곁에 머문다'고 할 것 같다. 누군가의 고통과 슬픔을 온전히 느끼기에는 모자랄 터, 그 한계를 인정하고 겸손하게 받아들이나, 누군가의 고통 안에 함께 머물러주기 위해, 안전한 지점에서 적절한 질문을 던지고, 예의 있는 반응을 보이면서, 누군가의 슬픔이 그의 앞날을 집어삼키지는 않도록, 조용히 바라보면서 곁에 머무는 것, 그것이 상담사인 내가 할 일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