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교육에 고심하는 부모들을 절망케 하는 신조어가 몇 개 있다. 대치동 엄마, 목동 엄마, 중계동과 평촌의 거대 학원가의 전설적인 엄마들. 누가 이들을 낳았을까. 할아버지의 재력, 아빠의 무관심, 엄마의 정보력이란 괴상한 현상을 누가 설파했을까. 적어도 평범한 엄마, 아빠들은 아닐 것이다. 사실은 그들이 존경스럽고 부럽다.
국내 유수의 금융회사에 다니면서 목동에 거주하는 친구에 따르면, 중학생인 큰딸이 좀 더 수준 높은 학원에 등록하기 위해 학원 입시를 다른 학원에서 준비하는 중이란다. 그러니까, 학원을 위한 학원이 존재하는 거라고 한다. 결국은 사교육이 쳐 놓은 거대한 거미줄에 우리 아이들을 맡긴 결과가 그 한 칸을 더 움직이기 위해 허우적거리는 거다. 목동에는 이런 일이 다반사라고 한다. 오, 하느님, 맙소사.
동대문구 휘경동에서 집을 옮길 무렵 그 친구는 내게 목동행을 권했다. 아이들 키우기에 좋다고, 특히 맞벌이하는 부모에게는 더할 수 없이 좋은 동네라고 했다. 정교하게 짜여진 학원 시스템이 이를 받쳐준다고 했다. 난 두 번 생각할 필요도 없이 한마디로 거절했다. 그리고 과감히 잠실 주변부인 풍납동을 선택했다. 그 동네엔 학원이 많아 보이지 않았고, 유례 깊은 풍납토성이 아담하게 자리 잡고 있었고, 목동보다는 강남권 출퇴근에 교통이 편리했다. 결정적인 이유지만, 우리 집 아이들은 아무도 학원에 다니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목동과 대치동과 중계동이 가진 장점이 우리 가족에게는 중요한 변수가 아니었다. 개인적으로 볼 때 단독주택과 아파트, 풍납토성이 적절히 조화된 풍납동의 밤 풍경은 아늑하기 그지없다. 이 점은 몇 년이 지난 지금도 변함이 없다. 물난리로 소문난 그 옛날의 풍납동이 아니었다.(풍납동에서 방이동이나 대치동으로 학원을 오가는 학생들이 있다는 사실은 팩트다)
#2.
학원에 의존하지 않는 우리 아이들, 스스로 열심히 하고 있을까? 스스로 학습법을 개발하고 적용해서 친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까? 아직까지는 “전혀 아니다”가 대답이다. 학창 시절 공부를 대단히 잘했다고 착각(?)하는 우리 아이들의 엄마는 애걸복걸이다. 대치동이나 목동 엄마의 코드에 맞는 소문을 익히 아는 까닭이다.
“초4 때 수학을 놓치면 절대로 따라잡을 수 없다. 영어는 초등학교 입학 이전에 말문을 터놓아야 한다. 독서는 어떻게 해야 하고, 어쩌고 저쩌고, 특목고 준비는 어쩌고 하는 말들이 소문의 실체다.”
이러한 소문의 결론은 사교육에 의존하지 않으면 뒤떨어진다는 얘기다. 이런 얘기를 자꾸 들으면 귀가 얇아질 수밖에 없다. 동시에 통장의 잔고는 비어 가고 지갑도 얇아지는 것은 당연지사다.
니체는 경고했다. 인간은 검증되지도, 검증할 수도 없는 진리를 진리로 알고 살아가는 바보들이라고. 아이들 교육방법에 관한 소문은 검증이 가능하고, 아이들에게 합당한 그러한 학습법일까? 심히 의문스럽고, 두렵다. 부모들이 알아서 판단할 일이지만, 과잉 경쟁이 일상화된 한국사회가 낳은 조작된 사회현상이 아닐까. 최근 사교육 시장에서 명성과 부를 얻었던 소위 일류강사들 중 일부가 학원에 의존하는 학습 양태를 비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교육 시장의 판도를 이끌었던 그들이 학원에 대한 의존성을 버리고 자기 주도 학습을 하라고 권장하고 있다. 이들이 돈에 환멸을 느끼거나 단순한 명예욕 때문에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아! 그들 중 아주 유명한 이는 선행학습을 강요하는 사교육에 환멸을 느꼈다고 고백한다. 두고두고 고민해볼 일이다.
#3.
중2, 중1에 재학 중인 큰애와 둘째의 현재 성적은 우리의 기대와 상당히 어긋나(?) 있다. 친구들 학원 갈 시간에 집에서 혼자 지지고 볶고, 꼼지락 거리고 있는 까닭이다. 초등생인 셋째를 돌봄 교실에서 데려오고, 엄마 아빠가 막내를 데리고 귀가하면 네 살배기 막내까지도 돌본다. 가끔씩 무사 태평한 그들을 보면 속에서 열불이 난다. 성적표라도 보게 되면 소방차가 필요한 시기를 스스로 알게 된다.
우리 집 아이들의 행태가 순간순간 불안하고 우리 부부를 여간 고민스럽게 한다. 사교육 시장을 선도하는 소문의 실체를 학원에서 확인하고픈 욕망이 슬며시 고개를 들기도 한다. 하지만 멀리 전략적으로 보면 사실은 불안하지는 않다. 그 이유는 우리 아이들은 스스로 학습법이나 각 과목의 실패를 몸소 체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험 전날 막연함과 두려움에 어깨를 들썩이는 큰애를 본 적이 있다.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을까? 사실 말은 필요치 않았고 어깨를 두드리며 조용히 지켜보았을 뿐이다. 성장통은 몸이 자라는 곳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성장하고 자기에게 맞는 공부방법을 찾는 것에도 존재한다.
스스로 질문하고 스스로 답해야 하는 상황이 중1, 2에게는 심히 곤혹스러운 일일 것이다. 인터넷 강의나 자세한 참고 교재를 통해서 답을 얻더라도 학원에서 선생님의 입을 통해서 즉시 얻는 것보다는 느리고 답답한 것임에 틀림없다. 큰 그릇도 늦게 만들어지지만 스스로 자기 몸에 적합한 방법론을 체득하는 것도 상당한 시간을 요할 수밖에 없다. 이럴 때 필요한 말이 있다. 시간이 약이다. 이건 진리다.
#4.
우리 부모들도 공부에 일가견(?)이 있던 분들은 알 것이다. 쉽게 한 공부는 쉽게 잊혀진다는 가벼운 사실을.... 시험 보기 사흘 전, 하루 전에 한 벼락공부가 작은 시험에는 유용성이 있을 수 있지만 큰 시험에 도움이 안 된다는 사실을 많은 부모들이 먼저 체험했을 것이다. 내가 그랬다. 전형적인 벼락공부 스타일로 중학교, 고등학교를 나름 잘 버텼으나 끝내는 망했다. 아니다, 망할 뻔했으나 그 뒤로 지속적인(?) 노력을 통해 체질을 개선해서, 대한민국에서 아주 어렵다는 시험에도 합격하고 지금은 먹고살만하다.
얼굴이나 성격뿐만 아니라 부모의 학습방법까지 닮는다는 것은 생물학적 유전의 아이러니다. 이런 된장... 아이들의 눈빛 속에서 어린 시절의 나를 본다. 반가우면서도 섬뜩하다. 그렇지만 그 시선 속에서 나는 적잖은 안도감을 느낀다. 자식들이 부모의 삶의 궤적을 따라온다는 나름의 신념(또는 궤변) 때문이다. 그 믿음으로 인해 아이들이 원하지 않는 이상 학원에 보내지 않고서도 불안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무지한 낙관론이 아니다. 지금까지 스스로를 지탱해온 나에 대한 믿음이기도 하다.
임신을 확인한 후 아이 얼굴을 보기까지 약 10개월을 부모들은 기다린다. 걸음마, 초등학교 입학, 본격적인 공부, 질풍노도의 사춘기, 처절한 대학 입학시험, 전쟁과 같은 취업시험, 판도라의 상자 결혼 등. 아이를 낳고부터는 부모는 계속해서 아이들을 기다린다. 그냥 기다리지 않고 아이들에 대한 강한 신뢰를 갖고 기다린다. 일부 부모들이 아이들의 성장과정에서 그 믿음과 기다림의 진리를 확인하려 하지 않고 귀동냥으로 얻은 소문과 쉽게 타협하기도 한다. 하지만 많은 부모들이 그러하듯이, 그 믿음과 불편하지 않는 기다림이 아이를 잘 성장시킬 수 있을 것이다.
부모의 진정한 능력은 돈과 정보에 있지 않고, 아이들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진득한 기다림에 있다. 과장된 소문에 대한 무관심과 걸러진 최소한의 정보만 필요하다는 것을 아는 게 중요하다. 나는 제 스스로 실패를 경험하고 다시 일어나는 아이들을 신뢰하고, 기다릴 것이다. 언제까지일지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