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수능 날이 되면, 때마침 어떻게 알았는지 한파는 잊지도 않고 찾아온다. 배고픈 각설이도 아닌데. 전국의 유명 사찰엔 수능 수험생을 둔 부모들이 손이 닳도록 자식의 대박 수능을 기원한다. 경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 아이만은 시험 점수가 잘 나오기를 바라고 또 바란다. 남의 학교 교문에 엿도 붙이고, 차가운 교문 아래서 온종일 기도를 드린 부모도 있다. 마지막 종이 울리고 난 뒤의 풍경은 그야말로 마음이 뭉클해지고 왠지 짠해지고, 눈물 없인 볼 수 없는 그런 감동 어린 그림이다.
그런데, 하루가 지나지 않아 아니나 다를까 출제기관이 여론의 뭇매를 맞는다. 변별력이 떨어진 물수능이라는 이유 때문에. 전문가라고 하는 사람들은 여러 입으로 여러 다른 얘기들을 쏟아놓는다. 학부모 입장에서 보면 그들의 말도 변별력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시험이 끝나면 주체인 수험생에 대한 위안은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시원찮은 점수와 시험제도에 관한 불만만 남는다.
그렇다. 이 나라에서는 분별력과 변별력을 갖추기가 쉽지가 않다. 칼자루를 쥔 사람들은 분별을 모르고, 그들이 만들어낸 제도는 변별을 모른다. 어찌 되었건 부모들은 이러한 풍토 하에서도(어쩌면 이런 풍토 때문에) 자식의 상위권 대학 입학을 위해 온 힘을 쏟아붓는다. 그야말로 불확실성이 확실히 지배하는 한국사회만이 만들어내는 병적인 열정이다. 내일을 모르고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누구든지 과잉된 행동을 할 수밖에 없다. 아이들의 진학 문제에 관한 한 부모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누가 뭐래도, 내 아이는 소중하니까.
#2.
서울 강남 대치동과 전남 무안에 거주하는 부모들의 속마음은 같을 것이다. 슬하에 자식이 몇 명이든지 모두 소위 상위권 대학에 진학해서 남보란 듯이 좋은 직장에 다니는 게 부모의 희망이다. 많은 부모들이 이러한 희망고문으로 인해 자식들에 미래에 대해 나름의 방식으로 올인하고 있다. 부모들의 기대는 늘 아이들이 생각하는 그 이상이다. 이 격차를 메우기 위해 부모들은 아이들의 의도와는 상관없는 교육투자를 결정한다. 이러한 결정을 “행동 편향”이라고 한다.
행동 편향은 똑같은 결과가 나오더라도 가만있는 것보다 행동하는 게 낫다는 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믿음 때문에 부모는 아이들의 능력 이상으로 학습을 강요하고 그 대가로 불확실한 보랏빛 미래를 제시한다. 하지만 부모들의 행동 편향에 의해 강요된 학습은 아이들보다는 부모를 위한 책임회피용 행동이라고도 할 수 있다. 주식시장의 브로커의 반복된 투자나 정부의 변화무쌍한 교육정책도 이러한 행동 편향의 일환이다. 증권 브로커의 무책임한 투자 유혹에 의해 누군가는 패가망신을 당할 수 있다. 특정 정권에 의한 교육정책의 잦은 변경과 사교육 시장의 달콤한 유혹으로 인해 아이들은 시들고 멍들어간다. 종국적으로 이러한 행동은 가정의 행복을 깨뜨리고, 근본이 흐트러진 사회는 조정능력을 상실할 가능성이 크다.
#3.
부모가 고학력자이고, 현재의 직업이 안정적일수록 아이들에게 더 많은 노력을 요구한다고 한다. 아이들이 부모 이상의 성취를 이뤄서 무한경쟁사회에서 잘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럴 것이다. 교육정책을 담당하는 정부부처의 공무원도, 교육시스템을 토론하는 대학교수도, 소위 잘 나간다는 변호사나 의사도 집에서는 부모로서 역할에 충실할 수밖에 없다. 밖에서는 자기 주도 학습의 타당성을 주장하고, 성적에 목매는 교육 현실을 지탄하는 이들도 마찬가지다. 부모로서 자식이 탁월한 성적과 좋은 대학에 진학하는 것이 소망스런 꿈이 되어버린 현실에서는 이상적인 이야기는 늘 남의 입장일 뿐이다.
대학교수인 아버지가 사교육비에 500만 원을 쓴다는 얘기, 강요된 학습과 성적지상주의에 빠진 부모로 인해 아이가 성적표를 조작했다는 얘기는 흔한 뉴스거리다. 최근에는 선생님인 부모가 아이의 성적을 위해 시험문제를 유출했다는 의혹으로 재판을 받고 있기도 하다. 일부 아이들은 자신을 학원으로 과외학습으로 내모는 부모들을 독친(毒親)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자신의 핸드폰에는 부모를 악마, 마귀, 대왕문어, 대왕 오징어 등으로 저장해놓는 아이들도 있다고 한다. 이 모두가 부모의 욕심에서 비롯된 불편한 사회현상이다. 우리 부모들의 욕망 때문에 아이들이 힘들어하지 않게끔 절제할 수는 없는 것일까?
세상을, 인생을 잘 살아가게 하는 참된 원동력은 무엇일까? 독친으로 표현된 부모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좋은 대학과 사회적 지위, 과시 가능한 경제력일까? 이 문제에 대해서는 정답도 없지만, 어느 누구도 자신 있게 대답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자신의 인생관과 가치관에 따라서 얼마든지 다른 대답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아이들을 경쟁사회라는 무한궤도의 쳇바퀴로 만드는 것은 바람직해 보이지는 않는다. 부모의 바람대로 아이들이 성장하더라도 과연 그들이 행복할 수 있을까? 자신들의 선택권이 제한된 상태에서 이루어진 성취가 가져다주는 만족감이 얼마나 있을까? 오히려 도구적 삶을 살게 하고 유희적 삶을 알려주지 못한 부모들을 책망하지는 않을까?
부모들의 삶과 마찬가지로 아이들의 인생도 불확실한 하루하루의 연속일 것이다. 스스로가 모종의 불안감 속에서 책임져야 할 선택을 하고 그에 걸맞은 결과에 만족하는 삶이 오히려 소망하는 삶이 아닐까? 불안하더라도 아이들이 자신의 미래를 계획하고 스스로의 행동 속에서 자신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도록 지켜봐 줄 수는 없을까?
#4.
아이들은 학원 수업과 삼각 김밥, 컵라면이 주는 차가운 현실보다는 따뜻한 저녁 식탁과 화기애애한 대화가 오가는 거실이 그리울 것이다. 자신들의 소소한 이야기를 들어주고 사랑스러운 미소를 보여주는 부모를 기대할 것이다. 공부나 성적보다는 오늘이라는 하루의 삶과 순간의 행복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그런 부모를 바랄 것이다. 자신들이 인생의 주인공이라는 주인정신을 가질 수 있게 하는 조언자로서의 부모를 고대할 것이다. 성적표에 눈을 맞추기보다는 자신의 꿈 이야기를 들어주고 어깨를 두드려주는 인생의 선배로서 부모를 원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 부모들은 과연 그러한가? 그들의 바람을 알고(혹은 알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까? 등산복 패션처럼 획일화된 우리 부모들 세대의 세속화된 선택의 과오를 아이들에게 대물림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 삶의 다양성이 결핍된 사회가 주는 속 좁은 직업에 관한 관념화의 오류를 아이들에게 물려주는 게 타당한 것일까? 성공한 수능이 아니더라도, 원하는 대학이 아니더라도 인생이 망하거나 세상이 두 쪽 나지 않는다는 단순한 진실을 왜 외면하려는 것일까?(우리의 현실에서는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부모는 아이들의 선택을 존중해주고, 아이들이 바라는 바를 믿고 기다려주는 존재가 되면 안 되는 것일까? 부모들의 신뢰를 통해 아이들은 다양한 경험에 대한 용기를 갖고 세상의 불확실성을 보다 잘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수능 실패와 대학 진학의 실패가 인생의 실패가 아니라는 사실은 누구나 아는 진실이다(학벌에 대한 편견이 심한 우리 사회에는 이에 대해 반대의견도 많다.). 이 진실을 아직 경험치가 부족한 아이들이 알 수 있을 때 아이들의 세상은 훨씬 넓어져갈 것이다.
우리 부모들이 학원으로 과외교실로 아이들을 이끌기보다는 이러한 평범한 사실을 아이들과 허심탄회하게 대화하는 것이 어떨까? 서툴고 부족하더라도 그들이 선택하고 책임질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