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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성파파 Aug 17. 2019

부모 對 학부모

끝나지 않을 갈등에 관하여....

#1. 의도     

  “부모 對 학부모”는 2014년 연초에 공중파에서 방송된 프로그램의 제목이다. 시리즈의 제목만 보더라도 기획의도가 들여다보여서인지 TV를 보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동일한 심리적 주체로서 같은 입장이면서도 서로 달라 보이는 부모와 학부모의 딜레마를 3부작으로 풀어냈다. 제1부는 공든 탑이 무너진다, 제2부는 기적의 카페, 제3부는 부모의 자격이다.

      

  이 프로그램의 의도는 이렇다. 자식을 키우는 부모의 심정과 자식이 공부를 잘 하기를 바라는 학부모의 마음이 서로 상충된다는 것에서 가족의 비극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효과를 극대화시키기 위해서 극단적인 사례를 들어 상황설정은 했지만, 이 땅에서 자식을 키우는 많은 부모들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소재였다.

      

  부모의 입장에서 보면 내가 낳은 자식은 늘 안쓰럽다. 추우면 추운대로 더우면 더운 대로 그 환경이 아쉽고, 더 잘 못 먹여 안날이 나는 게 부모들이다. 애가 아프기라도 하면 부모의 심정은 어떤가. 공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학부모는 어떠한가. 초등학교 시절 반장도 해봐야 하고, 공부는 물론이고 누구 앞에서 발표도 잘해야 하고, 악기도 두어 개 정도 다룰 수 있었으면 좋겠고, 사춘기도 아무런 불협화음 없이 조용히 지나갔으면 좋을 것 같고, 친구관계도 원만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는 것이 학부모 아니던가. 성적지상주의인 이 나라에서 자식의 위치를 가늠해보면 학부모는 잠을 이루지 못한다.  

        


#2. 공든 탑이 무너질 수도 있다     

  애들이 요람에 쌓여있을 때나 기어 다닐 때,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는 학부모의 마음보다 부모의 마음이 승리한다. 하지만 그 이상의 학년에 올라가고, 중학생이 되면 상황은 반전된다. 사랑스럽고 예쁘기 그지없는 “자식”을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보다는, 말 잘 듣고 공부 잘하는 “학생”으로 성장하길 바라는 ‘학부모의 마음’이 분명 앞선다. 문제는 부모의 눈빛을 그렇게 잘 받아들이고 순응하던 아이들이 학부모의 눈빛에는 심한 거부감과 저항을 한다는 것이다.

      

  학부모는 학부모대로 그런 눈빛의 아이들에게 서운하다. 학원에서 늦게 귀가하는 아이를 다그쳐 더 공부를 시키는 것이 모두 부모 잘되자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항변을 한다. 자신의 한풀이까지는 아니더라도, 남들이 알아주는 대학 진학과 전문가가 되는 자격증 취득, 유수의 공·사조직에 취업하는 것이 이 나라에서 잘 살아가는 조건임을 알고 있는 까닭이다.

     

  자본주의를 표방하는 나라에서는 직업에 의한 선호 및 차별이 어느 정도의 문제로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처럼 특정한 직업 또는 직역이 개인의 인격이나 품격까지 결정하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는 드물다. 국회의원들 중 변호사 자격증을 가진 사람들의 수를 헤아려 보라. 잘난(?) 그들을 바라보는 일반 국민들의 시선의 의미를 생각해보라. 이 나라에는 직업적 콤플렉스가 없는 직업이 없다. 왜 그럴까? 모두의 시선이 자신보다는 위쪽 세상을 향하고, 비교의 기준 또한 위쪽세상이 되기 때문이다. 부모들이 학창시절과 직업전선에서 느끼는 불편함은 그들의 몸과 뇌리에 기억되어 자식들에게 교육이라는 명목으로 전달될 수밖에 없다. 모든 부모들은 자식들이 ‘찌질하게’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 결국 과도한 경쟁사회에서의 자신의 경험은 가정에서 학부모의 주장을 정당화시키는 강한 논리가 된다.

     

  문제는 학부모가 무장한 논리가 아이들에게는 너무 일방적이라는 것이다. 그 논리가 아이의 미래를 위한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으나, 그 논리의 기준이 되는 것은 현재 아이가 아니라 학부모라는 것이 큰 문제다. 결국은 학부모의 일방적인 잣대나 강요가 아이의 성적에 일조할 수는 있지만 현재 아이의 행복을 담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부모의 생각은 자식의 오늘보다는 대학진학 이후, 취업이후의 자식의 행복에 있다. 극단적으로 이 논리를 밀어붙이다보면 그 부작용은 심각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공든 탑이 무너지는 것이다.      


  공든 탑이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어떻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결코 쉽지 않다. 경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홀로 중심을 잡는 것이 어찌 쉽겠는가? 과도 경쟁사회, 부와 학벌 및 직업의 대물림, 특정 직역의 독과점화가 일반화된 이 땅에서 부모와 아이들에게 남겨진 카드는 없는 것인가?

      

  이 프로그램에서는 서울대 경영학과 2013학번 학생들을 연구 조사한 결과를 보여준다. 처음부터 쭉 공부를 잘했던 학생, 게임중독에 빠졌다가 스스로 극복한 학생, 중고등학교 성적이 들쭉날쭉했던 학생, 사교육의 큰 도움 없이 입시를 준비한 학생 등이 현재 경영학과에 재학 중이었다. 인터뷰에 응했던 학생들은 모두 스스로 자기관리를 잘했던 유형이었고, 그들의 부모들은 그들을 믿고 기다려주는 민주적인 부모들이었다.   

    

  대부분의 부모들은 자식들 문제에 있어서는 기본적으로 헌신적이다. 문제는 자신들의 헌신과 자신의 욕망을 혼동할 때, 자식의 성공과 자신의 성공을 일치시키려 노력할 때 부모는 자식을 하나의 작품으로 인식한다. 자식은 부모의 그러한 시각에 불편해하고 양자간의 관계는 소통의 길에서 멀어져간다.  

    

  오히려 아이가 잠시 흔들리거나 공부 외적인 측면에 빠져있더라도 아이의 복원력을 믿고 기다려주는 부모들도 있다. 아이들이 그러한 부모의 신뢰를 바탕으로 스스로 중심을 잡고 자기주도적인 행동을 통해 바람직한 결과를 맺는다.

     

  프로그램의 의도는 분명하다. 아이들의 성장은 부모의 맹목적인 헌신에 있지 않고, 자식에 대한 신뢰와 기다림에 있다는 것을 믿는다. 그 바탕위에서 공든 탑은 무너지지 않는다.

            


#3. ‘기적의 카페에서는 마음공부가 필요하다     

  기적의 카페는 강남 대치동 한복판에 만들어졌다. 부모와 아이들 간의 관계가 악화되고 학교와 학업성적 때문에 갈등이 고도화된 가정의 구성원들이 카페에 모여 상담을 하고, 특강을 들었다. 그 중 문제가 많아 보이는 일부 가정에 카메라를 설치하고, 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을 화면에 담았다. 아이들의 솔직한 상담에 부모들은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고, 부모들과 아이들의 상처는 서서히 치유되기 시작했다.   

     

  과연 ‘기적의 카페’가 필요한 것이었던가? 각자의 가정에서 부부가 평소에 가정의 대소사에 대해 자주 대화하고, 자녀교육문제도 각각의 수준에 맞는, 아이의 행복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이끌어 나갈 정도의 논의가 가능한 가정이었다면 분명 부모와 자식이 반성의 눈물을 흘리는 카페는 필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집도 그렇지 못하다.

     

  문제가정은 어디든지 존재한다. 특히 사춘기가 지나고 있는 중고등학교 학생들을 둔 가정에서는 부모는 부모대로 한숨을 쉬고,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불만을 터뜨린다. 부모 입장에서는 중학교, 고등학교 과정이 인생 전체를 좌지우지하는 중요한 단계로 인식을 하고 아이들이 이 시점에서 큰 성과를 보여주기를 바란다. 하지만 아이의 입장에서 이 시기는 존재에 대한 혼란과 더불어 삶에 대한 불안감이 서서히 커져가는 단계다. 때문에 아이들은 오히려 따분한 공부로터 탈출하고 싶고, 공부 이외의 것에 더 관심을 두고 싶은 욕구가 일상을 지배한다. 부모가 아이의 이러한 성장과정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 때 문제가정이 되는 것은 시간의 문제다.   

    

  우리사회의 교육과정은 고민이 필요한 십대들에게는 잔인하다. 우리나라에는 십대의 미성숙과 과도기적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비인간적인 교육과정과 이들을 사육하려는 학교, 그리고 이에 동조하는 부모의 무관심이 존재한다. 슬픈 현실에 아이들은 입을 닫고, 이를 외면하는 부모들은 귀를 닫는다.

     

  초등학교 4학년부터 어려워지는 수학이 중1, 2학년 때 난이도가 도약을 하게 되면 부모의 성급함은 극에 달한다. 덕분에 이 동네 저 동네 수학학원의 원장들은 쌍수를 들고 부모와 아이들을 반긴다. 이 때 아이들 중 열에 아홉은 비자발적으로 소위 “수포자(수학포기자)”가 된다. 수포자에게 부모의 시선은 냉정해지고 부모 자식 간의 불소통에 관한 악순환의 고리가 만들어진다. 수학을 포기하게 되었을 경우 상위권 대학진학이 물 건너가는 것을 익히 알고 있는 부모에게 수포자는 이런 ‘웬수’가 따로 없다.  

   

  부모의 따뜻한 시선과 손길을 기대했던 아이들에게 냉담한 시선과 가시 돋친 훈계는 아이들 가슴에 상처와 아픔을 준다. 아이들 교육에 무관심했던 아빠나 헬리콥터처럼 주위를 맴돌던 열성엄마나 아이의 성적과 행동에 모두 분노한다. 아이는 돈벌어다주는 기계인 무관심한 아빠에게 분노하고, 학원 알아봐주는 사람인 사채업자 같은 엄마에게 분노한다.

     

  분노의 가장 큰 단점은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다는데 있다. 또한 분노한 마음은 상대방이 하고 싶은 말을 듣지도 그 진심을 알지도 못한다. 기적의 카페에서는 이러한 부모와 아이의 분노를 치유했다. 냉정했던 부모는 자신의 일방적 잣대를 거두고 아이의 소소한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분노했던 부모는 따뜻한 시선으로 긴 호흡으로 아이의 일상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가족들은 기적의 카페를 통해 그동안 막혔던 대화에 물꼬가 트이고, 견고했던 분노의 벽이 허물어지는 것을 서로가 느끼기 시작했다.

      

  부모들이여, 우리 아이들이 공부하는 기계가 되어 마냥 성적만 좋은 학생이 되기를 바라는가? 아니면 부족하더라도 자신의 생각과 꿈을 가진 따뜻하고 사랑스런 자식으로 성장하길 바라는가? 진정 그렇다면 우리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회복력을 믿으시라.    



#4. 진정한 부모의 자격은 사랑이다     

  자격은 신분이나 지위를 말하기도 하나, ‘남자의 자격’이나 ‘부모의 자격’에서의 ‘자격’은 일정한 조건이나 능력을 전제로 한다. 이때의 자격은 필연적으로 비교의 대상을 찾고 일정한 기준으로 그 우위를 가리려 한다. 애당초 부모의 자격이란 것이 부모와 자식 간의 본질이 아니었던가? 그 본질은 부모로서의 특별한 능력이나 조건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부모의 자격을 공론화하고 그 조건을 규정지을 때 이미 부모는 본연의 바람직함에서 멀어져있지는 않을까? 지금 우리가 부모의 자격을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우리사회의 슬픈 세태를 반영한다.  

    

  우리 시대의 열성엄마들은 본인의 아이들이 경쟁에 우위를 점하고 성적에서는 정점에 서기를 바란다. 그들은 아이의 바람이나 적성과는 관계없이 과학고와 외고, 그리고 자사고에 아이를 보내고 싶어 한다. 과도경쟁의 사회시스템은 교육시스템에도 깊숙이 파고들고 있다. 열성부모들의 혈관 속에 흐르는 외고나 자사고에 대한 애정은 아이들의 꿈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자신들이 종교처럼 믿는 대학의 입학허가서나 다름없는 고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공부시키는 것이 자신들의 능력이라고 과신하고 있다.

     

  수학이나 과학 올림피아드에서 한국의 고등학생들은 우수한 성적을 거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성인이 되어서는 노벨상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다. 수학능력이 한참 처졌던 미국의 과학자나 과학능력이 부족해보였던 일본의 공학자들은 노벨상을 수상하기도 한다. 그 차이는 무엇일까?

     

  한국의 아이들은 지나치게 많은 공부를 하지만 스스로 미래를 꿈꾸지 못한다. 지적 호기심을 살리고 동기부여가 지속적으로 가능한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강요된 공부를 한다. 그 어려운 수학문제를 반복해 풀고 대학에 입학했지만, 막상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써먹을 데가 없다. 이 무슨 아이러니란 말인가? 결국 시험 외에는 쓸모도 없는 공부를 너무 열심히 해버린 대가는 창의성이 부족하고 행복이 결핍된 아이들이다. 오직 시험을 위한 공부는 합격을 보장하기는 하지만 그 이상의 성취는 없다. 그래서 이 나라에서는 노벨상 수상자가 전무한 것이다.

       

  성적이라는 한 가지 기준으로 줄을 세우고, 친구들을 자신의 발아래 두어야 칭찬을 받는 사회에서 아이들은 행복할까? 호기심 많은 십대를 지나면서 지적충족과 정체성을 찾아가며 스스로 자존감을 기를 수 있을까? 부모에 의해 강요된 공부를 하고 성적의 단맛에 길들여진 아이들은 부모를 어떻게 생각할까? 아이들의 평가에서 부모의 자격은 비로소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문제 있는 아이를 규정하기가 쉽지 않듯이 문제 있는 부모를 개념화하기도 힘들다. 문제부모 뒤에 문제사회가 있다고 하는 것도 쉬운 설명은 아니다. 그러기에 부모의 자격을 논하는 것도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한다.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부모 스스로의 처절한 반성 없이는 이 모든 것이 어불성설이다. 

      

  부모들이여, 아이들은 엄마, 아빠 그 자체로의 순수함을 원한다. 학원을 정해주고, 과외선생님을 고르고, 입시설명회를 쫓아다니고, 입학사정관에 제출할 이력을 만들어주고, 자신들을 숨 막히게 하는 그런 부모를 능력 있는 부모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부모만이 부모의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잘못된 욕망이 우리 아이들을 멍들게 하고, 한국의 교육현실을 피폐하게 하지는 않는지 곰곰이 생각해볼 일이다.     

어찌되었건, 진정한 부모의 자격은 순수하고 조건 없는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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