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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성파파 Feb 20. 2020

그리운 집밥, 밥상의 온도는 몇 도일까?

<삼시세끼>라는 프로는 인기를 고, 집에서 세끼를 먹는 퇴직자(일명 삼식이님)는 욕을 먹는 세상이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밥을 짓고 먹는 행위의 주체성과 동성 여부가 아닐까?


삼시세끼 TV프로에서는 한 끼의 밥상을 위해 서로 역할분담을 한다. 누군가는 불을 피워 밥을 짓고 다른 이는 물고기를 잡아 굽거나 매운탕을 끓인다. 그 밥상은 일방적인 희생 없이 서로가 함께 차리고 같이 밥을 먹는다. 반찬의 가짓수는 적지만 공동의 준비에서 오는 해프닝도 중요한 찬거리가 된다. 그 한 끼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나누는 소소한 대화나 웃음은 행복해 보이는 스토리가 된다.(물론 TV 프로그램이다 보니 상황 설정과 작위라는 태생 상의 한계가 있기는 하다.)


반면 삼식이님의 세끼는 어떠한가? 그렇지 않은 케이스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배우자에 의해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만 얹는 경우일 것이다. 배우자의 일방적인 희생에 의한 밥상이다 보니, 이때 화가  배우자님은 가끔씩 커다란 곰솥을 애용하기도 한다. 일주일분 사골국물과 미역국을 끓이기에는 이보다 더 적합한 도구는 없기 때문이다. 평소에 대화가 잘 진행되고 애정이 돈독한 가정은 별 문제가 없겠지만... 이 과정에서 나누는 대화나 불협화음은 서로에게 스트레스가 된다. 그런 이유로 곰솥과 여행 캐리어는 사전에 없는 반대말이거나 연관검색어가 되고, 이들은 홈쇼핑 채널의 효자 상품이 되기도 한다.


인간이 밥을 먹는 행위는 어떤 행위보다 원초적이며 정적인 것이다. 그 행위의 대상인 밥은 누군가의 정성 혹은 헌신을 통했을 때 제 값을 한다. 나아가 밥상을 준비하는 과정에서의 함께 먹는 이의 협조와 배려는 그 밥상을 훨씬 알차게 한다. 일방적인 손길만이 밥상 준비에 분주해질 때 그것은 헌신이 아닌 고된 노동이 될 수도 있다. 정성과 손맛, 역할분담으로 차려진 밥상은 여느 진수성찬에 비할바가 아니다.


돈을 주고 사 먹는 기름진 밥이 소박한 집밥의 영광을 따라가지 못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준비하는 이의 노고와 정성과 애정이 밥그릇에 담기고 나물에 무쳐 나올 때 집밥의 진미는 더 빛을 발한다. 하지만 집에서 차려지는 밥상이라고 어찌 명암이 없을까. 우리는 집밥에 질려 괴로워하다가도  밥상으로부터 멀어지는 순간 다시 집밥을 그리워하는 순환을 거듭하게 된다. 오죽하면 어느 식당의 상호가 "집밥"이었을까?



깊고 숙성된 삶의 감성은 가슴속의 간절함과 밥상에서 나온다.


치열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간절함은 누군가를 위해 밥을 짓거나 밥상을 차리는 것과 숙명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때로는 따뜻한 밥상의 온기가 그 밥을 먹는 이에게 삶의 진정성과 간절함을 일깨워주기도 한다. 새벽밥을 짓는 어머니와 점심 도시락을 겹겹이 쌓아 올리던 시절을 떠올려보시라.


어린 시절을 되돌아보면, 우리는 밥을 통해서 가족이 되었고 하루와 어떤 시절을 완성시켰다. 우리는 누군가의 자식으로 태어나 애정이 담긴 밥을 먹고 한 사람의 몫으로 살아가며, 그 밥의 온기를 지닌 인간이 된다. 가족을 위한 밥상에서 우리가 가진 감정은 잘 익은 김치처럼 숙성된다. 밥상에서 전해지는 사랑은 인간이 지녀야 할 모든 감정의 모태가 될 것이다. 그런 밥을 먹어본 사람만이 다시 누군가를 위해 밥을 지어줄 수도, 사랑의 감정을 나눠줄 수도 있는 최소한의 자격이 생기지 않을까?


밥상준비하는 과정은 단순해 보이지만 몸과 마음이 모두 쓰이는 행위다. 먼저 누군가를 위한 밥상차리고자 하는 마음을 먹어야 하고, 쌀을 고르고 잡곡을 섞고 잘 씻어서 불을 지펴야 한다. 최근에는 현대화된 주방기기의 등장으로 이런 과정이 생략되거나 수고로움이 줄어든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이런저런 준비과정을 통해 나물을 무치고 된장국을 끓이는 과정까지 합쳐지면 지난한 노동의 시간 혹은 신성의 시간이 될 수도 있다.


밥 냄새가 길어 올리는 정감을 밥그릇에 담아내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밥 짓는 이의 마음과 표정, 손짓에서 밥상에 둘러앉은 가족에게 전달되는 정겨운 것들은 몸의 언어와 마음의 온도를 합친 복합적인 것이다. 때문에 정성을 다해 차려준 밥상에서 밥을 먹는 것보다 숭고한 의미의 행위는 없다.


따뜻하고 구수한 밥의 온기에는 애정 그 이상의 것이 담겨있다. 그 밥을 먹으면 밥 짓는 이의 정성과 감정까지 먹게 된다. 때문에 누군가를 위해 제대로 지어진 밥은 먹는 이의 영혼을 따뜻하게 해 준다. 그 밥은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고 감정과 표정을 연결해주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알고 보면 밥 짓기는 하나의 스토리텔링이다. 매일매일 반복되는 밥 짓기가 자칫 단순해 보일 수도 있으나, 그 밥 짓는 과정은 매일 다르고 끼니마다 다른 이야기가 담겨있다. 삼시세끼의 지겨움은 루틴한 준비과정에서 오는 것이지 그 속인 담긴 스토리가 지겹지는 않은 것이다. 우리는 그 지겨워 보이고 단조로운 밥상의 메뉴를 평생 먹으며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진정 밥상이 지겨웠다면 인류의 생존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을 것이다.


집밥을 좋아하는 누군가는 압력밥솥에서 밥이 되는 소리가 마치 천상의 화음으로 들린다는 얘기도 한다. 물론 어떤 분들은 고개를 저으며 애써 반대하겠지만... 예나 지금이나 밥 냄새는 집 밖의 아이들을 불러 모으고 가족을 밥상에 둘러앉게 한다. 그 밥상을 통해 우리는 오롯이 가족이 되고 서로가 구성원임을 확인한다.

우리가 집밥을 그리워하고 고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보다 집밥은 치유의 능력이 있다. 고된 노동과 거센 경쟁으로부터 상처 받은 이들에게 심신의 안정과 감정을 치유하는 마법을 가지고 있다. 각각의 식탁에 오른 음식들은 다른 메뉴와 경쟁하지 않고 오직 먹는 이를 위해 존재한다. 우리의 입맛에 맞는 음식은 어릴 적부터 먹어온 것이거나 심리적 허기를 달래주거나 특별히 편식하는 메뉴들이다. 우리는 한두 가지 음식을 먹으며 상처를 치유하고 심리적인 안정을 얻는다. 집에서 끓인 김치찌개나 된장국, 특별히 애정하는 김치를 생각해보면... 그 음식들에 의해 우리의 몸과 마음의 허기가 어떻게 달래 지는지 느낌이 올 것이다. 다른 반찬과의 조화도 중요하지만 스스로 완전해지는 각각의 음식들이 밥상 위에서 우리의 영혼에 안식을 준다.   


그래서 누군가를 위한 밥 혹은 밥상의 온도가 궁금해진다. 사랑과 정성이 담겨져 인간의 온기를 닮고, 밥을 짓는 이의 체온을 지닌 그 밥상의 온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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