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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성파파 Oct 02. 2019

느리게, 쉽게, 가볍게

#1.

중학교 때인가 가훈을 만들어오라는 숙제가 있었다.


난데없는 가훈을 억지로 만들어가느라 곤혹스러웠다. 아버지에게 물었지만, "우리가 무슨 가훈 같은 게 어딨냐. 별로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창조해서 가져간 교훈은 "최선을 다하는 인생을 살자"였다. 숙제 가운데 비슷한 가훈이 여럿 있었다. 그중에 "정신일도 하사불성(精神一到 何事不成)"같은 어려운 한자어로 된 것도 있었다. 제일 특이한 가훈은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었다.


다들 급조한 느낌이었지만, 사는 게 비슷해서인지 가훈까지 닮아있었다. 유난히 "노력"이나 "최선", "근면성실"같은 단어들이 많이 띄었다. 그냥 숙제를 했다는 후련함에 가훈의 존재에 대해서는 별 의미를 두지 않았다. 일기 쓰기나 가훈의 존재가 숙제가 된다는 것이 그때나 지금이나 이상한 것은 마찬가지다.


그 당시 TV 드라마를 보면 안방이나 거실로 보이는 장소에 가훈이 액자로 걸려있었다. 어느 대통령 사진처럼.  우리는 우리의 몸과 영혼이 액자화 되고 박제되어 있었던 그런 시절을 흑백사진으로 살아왔다.


고등학생이었을 때 영어사전을 처음 사서 영어공부를 하기로 했다. 영어공부를 하면서 유명한"성문 종합 영어"라는 문법책 어딘가에서 눈에 확 띄는 문구 하나를 발견했다. 먼가 의미심장한 느낌에 "심봤다"를 여러 번 외쳤다.


"No pain, No gain."  


모두가 아는 문장이지만. 굳이 번역하자면, "고통이 없으면 얻는 게 없다"라는 의미다. 그 뒤로 이 문구는 나의 좌우명이 되었다. 해병대 복무 시절에도 힘든 상황에는 "No pain"을 외쳤고, 간절히 전역이라는 "No gain"를 기다렸다.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까지는 목놓아 부르지 않았지만, 많은 고통의 순간을 덜 힘들게 했던 마음속의 부적이었다. 해병대 구호 중에 "안되면 될 때까지"란 것이 있었는데, 살다 보니 아무리 해도 안 되는 것이 있다는 것도 나중에야 알았다.


그때는 그 문구가 의미하는 바가 정확히 뭔지 몰랐다. 단지 노력하는 과정에서 고통을 인내하면 좋은 결과가 있을 거라는 주술적 믿음이었다. 난관은 노력을 통한 극복의 대상일 뿐이었고, 미래는 현재의 어려움을 이유불문 이겨내고 성취해야 할 결과였다. 그 당시 노력에 대한 열정은 순수했고 강요당하지 않은 자발성을 전제로 하였다. 아니 자발적인 선택을 전제로 했다고 생각했었다.


그 뒤로 여러 해가 지나는 동안 모든 결과에 부합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믿었고, 노력이 정당한지 여부나 반드시 필요한지 여부를 스스로 묻지는 못했다. 실제로는 강요된 노력이었으면서도 이를 깨닫지 못하고 자발적인 것으로 착각했었는지 여부도 의문을 갖지 못했다.




#2.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얘기가 귓가를 맴돈다.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늘 들었던 얘기는 열심히 살라는 것이었다. 열심히 공부해라.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 빌어 먹는다. 학생일 때는 "열심히"란 모든 문장의 형용사였고, 모든 행위의 수식어였으며, 당시 사회의 좌우명이었다. 왜 그리 열심히 살아야 했을까? 최소한의 의문도 갖지 못한 채 시간은 흘러갔다.


경험이 늘어가고 과거를 회상하는 시간이 많아지면 나이를 먹는다. 작게는 개인의 인생살이부터 크게는 사회 시스템이 변화하면서 우리의 세상 살아가는 눈도  변하고 좌우명도 바뀐다. 한때 '부자 되세요'가 유행하는 인사였다가 어느 틈엔가 사라졌다. 부자 되기가 쉬운 일이 아님을 많은 이들이 깨달았던 까닭이다.


 나이가 들고 세상 보는 눈이 달라진다는 것은 그동안 보지 못했던 것들을 달리 본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No pain, No gain"을 정당하다고 생각하면서도 No pain 이전에 공정한 기회가 부여되었는가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No pain이 필요한 상황이 의미 있는지 여부를 궁금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No pain를 요구하는 '경쟁' 자체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고, 그 경쟁이 과도한 고통을 요구하지는 않는지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언제부턴가 No pain의 배신, 즉 No pain이 반드시 No gain을 가져오지 않는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No pain과 No gain 사이에 놓인 수많은 변수와 알 수 없는 행운과 불순한 의도가 있는 것이 보였다.  금수저와 흙수저가 존재했고, 기회와 공정의 룰은 선별적이고 제한적이었다. 주변에 수많은 배신행위가 존재했음을 뒤늦게 알았다. No gain의 진실을 알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흘렀고, 이제는 다른 좌우명이 필요한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알겠다.


아! 그동안 너무 열심히 살아왔었나. 아니, 그냥 무턱대고 생각 없이 살았던가.


아무튼, 시간은 우리를 기다리지 않았고, 삶의 어려운 문제들은 쉬운 해결책을 거부했다. 우리는 삶의 아마추어로서 발생하는 문제나 그 해결 과정에 대한 고민은  무거웠다.



#3.

어느 날 문득 깨달음이 내게로 왔다.
"느리게, 쉽게, 가볍게 살자"라는 문장으로.
마치 시마(詩魔)처럼.



1) 느리게


어린 시절의 하루는 느리게만 이동하는 동화 속의 시간이었다. 빨리 어른이 되고픈 마음과 영원히 피터팬 같은 어린이가 되고픈 마음이 여러 번 교차했다. 지금은 그런 늦게 흘렀던 시간들이 동심과 더불어 사라져 버렸다. 월요일과 금요일이 붙어있다는 듯이 일주일이 쉬이 지나간다.


갓난아이였던 큰딸이 어느새 스무 살이 넘어 밥벌이를 하고 있고, 큰누나랑 거의 띠동갑인 막내가 미운털 콕 박힌 아홉 살이 되었다. 부모의 시간도 부지불식간에 그만큼 흘러갔다. 시간은 달력 안에서만 흐르지 않고 우리의 몸과 영혼에 흔적을 남기고 사라진다.   


삶이 100미터 달리기였다면 우리는 앞뒤 볼 것 없이 숨도 쉬지 말고 달려야 한다. 그렇지만, 누구나 다 아는 것처럼 인생은 적어도 장거리 육상 종목 그 이상을 달려야 하는 장기 레이스다. 무계획한 초반 질주나 자신의 페이스를 지키지 못한 레이스는 완주하기도 쉽지 않을뿐더러 끝까지 가더라도 그 결과가 좋지 않을 것이다.


빠르게 살다 보면 늘 앞만 바라볼 수밖에 없고 주위에 시선을 둘 시간이 별로 없다. 300킬로로 달리는 KTX 안에서는 사람의 움직임이나 부는 바람이나 빗방울과 흔들리는 꽃망울을 보지 못한다. 천천히 느리게 움직이다 보면 그 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누군가의 마음도 어려움도, 사계절이 피고 지는 것도.


경쟁의 시간이든 홀로 있는 시간이든. 자신의 영혼이 따라올 수 있을 정도의 스피드로 살아갈 때, 우리는 느리게 살아가는 것이다.


누구나 다 아는 얘기. 


"늦어도 괜찮아,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야."




2) 쉽게 


우리네 인생은 웃으면서 지나가는 쉬운 상황도 많지만, 풀어내기 어렵고 답이 보이지 않는 상황도 많다. 수많은 선택의 순간과 갈등의 시간이 쌓이게 되면 개인의 삶은 어려워진다. 결코 쉽게 자신의 문제를 풀어나가기도 미래를 설계하기도 마뜩지 않다.

 

어려운 문제일수록 그 문제에 집중하다 보면 해결책은 보이지 않는다. 문제 자체에 생각이 매몰되고 그 주변의 것이 보이기 않기 때문이다. 문제 되는 상황으로부터 한걸음 떨어져서 바라볼 여유나 생각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때 문제 상황은 하나의 넘을 수 없는 벽이 되고 만다.


대부분의 문제는 하나 또는 여러 맥락을 가지고 있다. 우리 인생에서 발생하는 여러 상황 또한 이와 같다. 문제 상황에서 그 맥락을 파악하고 그 의미를 분명히 이해하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은 큰 차이가 있다.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이나 해결방법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것들이 달라진다. 특히 문제 상황을 쉽게 바라보는지 어렵게 바라보는지에 따라 문제 자체의 난이도가 변화될 수도 있다.


동시대를 살다 보면 누구든지 비슷한 상황을 마주한다. 누군가는 그 상황을 쉽게 생각하고 어렵지 않게 비껴가거나 문제를 해결한다. 다른 누군가는 그 상황을 어렵게 판단하고 불필요한 고통을 가중시키는 노력을 하거나 좌절을 맛보기도 한다. 이들의 차이점은 뭘까?


인생의 많은 문제들과 다양한 문제 상황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문제 되는 포인트에서 한걸음 떨어져서 바라볼 수 있는 여유. 주관적인 판단과 객관적인 시각을 공유할 수 있는 융통성. 결국은 모든 것이 내문제라는 주인의식. 이것들이 쉽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들이다.


역시 누구나 다 알 것 같은 말.


"어렵거나 복잡해 보이는 것은 쉽게. 간단해 보이는 것은 섬세하게"



3) 가볍게 


우리는 신분증에 담지도 못할 것을 담으려고 아등바등 노력하며 살고 있다. 어느 조직에서 발급한 신분증이나 명함은 그 사람의 많은 것을 얘기해준다.  그 목적이 밥벌이든 외부 과시용이든 간에 우리는 어떤 조직에 들어가기 위해 무던히 애를 쓰고 신분증과 명함을 손에 쥔다. 그것들이 나의 무엇을 말해줄까?


우리의 삶은 다양한 좌표를 가지고 있다. 부모라는 삶, 조직의 구성원이라는 삶, 부모의 자식이라는 삶이 한 차원에 존재한다. 생각해보면 어느 역할 하나 만만하고 가벼운 것이 없다. 한없이 우리의 어깨를 무겁게 하고 가슴을 짓누르는 무언가를 주는 것들. 그래서 금요일 밤이 "망각하기 위한 불금"이 된 지 오래다. 지금 우리의 현주소다.


우리는 이처럼 부담스럽고 불편한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한다. 하지만 그러한 상황은 우리를 쉽게 놓아주지 않는다. 부담으로부터 벗어나기, 불편한 상황으로부터 탈출하기 프로젝트를 진행해도 공간적인 이동만 가능할 뿐, 마음은 여전히 무겁고 시간이 지날수록 더 무거워진다.


어떤 상황을 헤쳐나가기 위해 진중하게 생각한들 느닷없는 지혜나 혜안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 부담에 따른 질량 증가의 법칙에 의해 우리의 하루와 일상은 더 무거워지고 지쳐간다. 결국은 내 스스로 가벼워질 수밖에 없다. 내 삶에 대한 관조나 성찰의 시간이 많아지면 우리의 문제는 더 이상 무거워지지 않는다. 우리 스스로가 문제 상황으로부터 가볍게 떠오를 수 있는 여백을 만들어 놓을 때, 우리의 삶은 가벼워지고 자유로스러워진다.


건강을 위한 육체적인 운동도 정신을 가다듬는 명상도 최후의 목적은 가벼움이다. 몸이 가벼워지고 정신이 가볍게 가다듬어질 때 우리의 하루도 생도 빛나는 것이다. 이제는 이러한 삶을 탐할 때다.


이것 또한 누구나 많이 들어본 문장.


"몸도 정신도 다이어트가 필요하다. 가벼움을 위해"




중학생인 아들이 묻는다. 흑백사진의 주인공이었던 예전의 나처럼.


"아빠, 우리 집 가훈이 있어? "


나는 자신 있게 아들의 눈을 마주하며 대답한다.


"그럼, 우리 집 가훈은 인생을 느리게 쉽게 가볍게 살자. 이거지."


'액자에 담아둘 필요는 없지. 마음속에 깊이 새겨져 있을 거니까!'


요새도 이런 가훈이 유행일까? 대유행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제는 우리의 삶과 우리 아이들의 삶이 총천연색 동영상으로 빛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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