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다 보면 주인공들은 중요한 결정의 순간 치열한 내면의 갈등을 겪는다. 고통스러운 고민 끝에 자신의 양심을 따르기도 하고 현실적인 이익을 좇기도 한다. 비록 관객의 입장에서 그 선택을 비난할 수는 있지만, 그 순간이 각 개인들의 문제라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결정을 통해 자신의 가족이나 소집단의 이익보다는 국가나 대의명분을 위해 행동을 할 수 있을까.
그런 까닭으로... 최근 개봉했던 영화 <블랙머니>의 여성 변호사 김나리(배우 이하늬)의 배신 같은 선택에 대해 돌을 던지기가 쉽지 않다. 나라면 부모나 가족의 현실적인 부나 행복을 버리고 공공선을 따르는 이상적인 가치판단을 했을까. 여러 번 생각해봐도 자신이 없다. 평범한 이들의 양심과 그에 따른 행동에 대한 가치판단의 기준은 결코 객관적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역사 속의 수많은 인물에 대한 평가가 조금씩 달리 해석되는 까닭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리라.
군부정권의 서슬이 퍼렀던 1987. 12. 대통령 선거에서 나는 군인의 신분을 가진 부재자 투표권자였다.
대한민국 민주화의 격동기였던 그해, 대통령 선거는 특정 후보자를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한 일종의 관권선거였다. 지금은 <사전투표제>로 바뀐 부재자투표는 군인이나 원격지에 거주하는 이들이 사전에 투표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지금은 절대 그렇지 않겠지만, 저때만 해도 군인들의 자유의사는 말뿐이었고, 그들의 의사는 철저히 명령체계에 의해 조직적으로 통제되었다. 다시 말하면 부재자투표의 정답이 이미 정해져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 분위기 하에서 일개 사병이 여당 후보자인 1번에 투표하기를 거부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그때의 부재자투표는 중대장의 책임 아래 부재자가특정 후보에게 투표했음을 확인하는 철저히 기획된 불법선거였다. 각 개인이 기표를 하고 중대장이 이를 확인한 다음 투표자가 풀로 붙이는 방식이었다. 기무부대에서 각 대대마다 샘플조사나 전수조사를 한다는 얘기도 들렸다. 그당시 우리의 헌법은 법전 속에서 장식적으로만 존재했었다.
시퍼런 군사정권 아래에서 자유의지를 가지고 행동한다는 것은 지극히 비상식적인 일이었다. 비상식이 오히려 상식이었고, 그 상식은 누군가에 의해서 다수에게 주입되던 이상한 시절이었다. 그 상식에 반대하는 이들에 대한 평가는 반체제인사로 소위 "빨갱이"라 불렸다. 오죽하면 <1987>이라는 영화가 나왔겠는가!
나는 해병대대에 남은 마지막 여당 후보 반대자였다.
나를 포함 두 명이 버티다가 먼저 굴복한 이는 경북의 어느 대학교 운동권 출신이었다. 그는 가수 정미조의 노래를 곧잘 부르는의식 있는 경상도 사나이였다. 아무튼, 나는 몇 번의 회유와 협박(?)에도 끝까지 1번 후보자를 찍지 않겠다고 버텄다. 왜 그랬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사실은 무섭고 두려운 상황이었다.
"설마 반대했다고 죽이기까지야 하겠어", 이런 치기 어린 생각도 했었다. 결국 마지막 날까지 이어진 줄다리기 끝에 나는 특별한 선택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외형적으로는 그들의 의사에 따르기로 했고, 실질적으로는 나만의 방식으로 투표하기로 했다.
그래서 깊어가는 겨울밤 중대 행정실에서 중대장과 마주 앉았다. 퇴근도 못하고 까칠해진 얼굴의 중대장을 보고는 잠시 미안해지기도 했다. 해군사관학교 출신인 중대장도 삼십 대 중반의 청춘이었으니 이런저런 생각도 많았을 것이다.
일단은 1번 후보자에 투표를 하자, 중대장은 천만다행이라는 듯 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해하는 그의 얼굴에서... 어쩌면 가장으로서 밥벌이의 비루함이 묻어났을지도 모르겠다. 중대장이 확인을 마친 투표용지를 나에게 돌려주었을 때 그는 난로가 타오르는 겨울밤 창가에 잠시 눈길을 돌렸다. 그 눈빛은 회한이었던가.... 인간적인 고민이 깃들여 보이는 실루엣. 본부중대 행정실에 장식된 크리스마스트리 전구가 창문에서 유난히 빛을 발하고 있었다. 투표용지를 봉투에 넣어 풀로 붙이기 전 나는 아주 특이한 의도를 가진 행동을 했다. 그때 내 오른손 검지 손가락에는 빨간 인주가 선명하게 묻어 있었다. 내 부재자투표가 결국 무효표가 되었는지 여부는 알 길이 없다. 선거 결과는 내뜻대로 되지 않았고, 시절은 더 어지러워졌다.
한낱 사병 한 명의 행동은 여러 사람들을 난처하게 했고, 들리는 소문은 흉흉했다. 대대 지휘관들이 기무부대로부터 부당한 처우를 받았다는 소리도 들렸다. 부대원의 정신교육의 책임(여당 후보자를 지지하지 않았다는)을 물어 대대장이 사단장으로부터 혹독한 질책을 받았다는 후문도 있었다. 그 당시에는 모두 확인할 수 없는 것들이었지만, 어느 정도는 사실이었을 것이다. 지나고 보니 영화 스토리보다 더 영화 같은 상황도 있었을 것 같다.
1987. 12. 겨울은 유난히 춥고 길었다. 30개월의 군생활을 해야 하는 나만 그러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둡고 역겨운 동토의 기운은 이 땅의 수많은 청춘들 가슴에 아프게 새겨진 상흔을 남기지 않았을까?
하지만 부재자투표 시기에도, 대선이 끝난 뒤에도 어느누구도 대놓고 나를 비난하거나 책망하지는 않았다.
군대라는 조직의 속성상 명령과 복종의 의무는 늘 곁에 있었지만... 누군가의 양심의 영역에 대해서는 간섭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고, 타인에게 비양심적인 행위를 강요할 만큼 냉혹한 비양심의 소유자들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 또한 야만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스스로 짊어져야 할 행동의 한계를 느꼈기때문일 것이다.
그 사건의 결말은... 군 정보기관이나 기무부대의 비뚤어진 충성심으로 인해 중대장은 곤란한 일을 겪었다. 타부대로의 전출과 승진 누락(그는 고참 대위로 소령 진급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그는 타부대로 전출하는 순간까지 나에게 어떤 말도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는 지휘관이라는 군인의 입장과 순수한 개인의 양심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민했을지도 모르겠다.
<양심선언>은 겉으로 보기에는 어려워 보이지 않으나, 이는 결코 쉽지 않으며 목숨을 버리는 행위와 같다. 그 행동으로 인해 평생을 제도권 밖에서 살거나 박해를 당하며 평범한 삶을 박탈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우리의 현실에서 그런 용기 있는 양심선언자들을 보면 알게 된다. 그런 선택의 어려움과 그들의 가야 할 미래를.
그때 스무 살이 조금 넘은 나이에 나는 이런 생각을 했었다.
"세상이 나를 모욕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는 때가 올까? 이런 대한민국에서....
내가 세상을 경멸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는 순간이 올까? 이 야만의 시절의 이겨내고...."
그런 희망이라도 가지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현실은... 한 개인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아마도 기나긴 어둠의 시절을지나면서 이런 소극적인 희망이라도 꿈꾸지 않았다면 그 현실을 참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답답한 마음에 보다 적극적인 후회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사라지곤 했다.
"부정한 순간에 양심의 눈을 감더라도 후회하지않을 미래가 존재할까? 인생의 어느 한순간 불의에 타협함으로 인해 평생의 굴레가 되거나 부끄러운 후회를 반복하는 삶을 살아가지 않을까?"
이제는 기억 속에서만 그때의 상황이 남아있다. 수많은 술자리에서 믿거나 말거나 무용담으로 얘기하기도 했지만, 그 당시 나의 선택은 공포를 모르는 용기 있는 행동이었을까. 그 일로 인해 벌어질 수 있는 파장을 고려하지 않는 치기(稚氣)였을까.
용기만 있고 공포를 모르는 군인은 엉뚱한 전투에서 가치 없이 죽는다.
최규석, <송곳 1>, 86.
하지만 그때는 젊음과 함께 용기도 있었고, 내면에 엄습하는 공포를 뚜렷하게 의식할 정도로 무모하지도 않았다. 삶은 매 순간 전투의 순간이기에 엉뚱할 수도 없었고, 그러기에 가치 없는 죽음이란 없다는 것도 함께 깨달았다.
다시 1987년 12월로 돌아간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할까? 우리의 아이들에게 결코 부끄럽지 않은 행동을 할 수 있을까? 훨씬 더 용기 있는 누구처럼 인생 전부를 건 <양심선언>을 할 수 있을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1987년 겨울 그런 고민을 하지 않고 쉽게 그들의 의사에 동조했다면. 그때의 행동은 내 삶에서 가장 부끄러운 순간이 되었을 것이란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