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는 장작에서 나오는 매캐한 불내음과 달큼하게 끓여지는 팥죽의 하모니는 몇십 년을 뛰어넘어 공간을 이동시킨다. 이른 아침의 시골 장터로... 우리 머릿속에 타임머신이 있을까?
기억 속의 사진 한 장. 따스한 질감의 수채화 같은 풍경 속으로... 그 촉감과 냄새를 좇다 보면 흑백사진이 여러 장 스쳐 지나간다. 파노라마 속의 슬라이드 영상처럼 느리게... 그 흑백사진은 그날의 풍경과 어머니와 코흘리개 아이를 불러온다.
못살았지만 정으로 부대끼던 시절, 그때를 장식하는 이야기 한가운데에 시골 오일장이 있다. 오일장은 물물교환의 장소였으며 생필품을 사고파는 곳이었다. 물건이 귀했던 그때는 모두가 가난했다. 시골장터는 농협연쇄점이나 작은 가게들을 통해 구하기 어려웠던 신선식품이나 해산물을 구입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지금처럼 콜드체인이라 불리는 유통시스템이나 거대한 냉장고가 드문 시절이라 생물 어물은 구경하기도 어려웠다. 생선은 염장되거나 건어물 형태 혹은 꽁꽁 얼린 형태로 사고팔 수밖에 없었다. 읍내 소재지에서 구하기 힘든 공산품을 사고, 부서진 농기구를 대장간에서 수리하는 때도 장날이었다.
부모들은 논밭에 푸성귀의 씨를 뿌리고 정성스레 키웠다. 거기서 거둔 꾸러미들을 팔기 위한 장터가 서는 날. 어머니는 이른 새벽부터 이 밭 저 밭에서 배추와 파뿌리를 뽑았다. 부추를 베고 상추를 따서 짚으로 하나씩 묶어 그날 팔 수 있는 채소 묶음을 만들었다. 정확히 한 단에 얼마를 받았는지, 그날 전체 수입이 어느 정도 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어머니는 가져간 채소를 팔아서 다시 갈치와 고등어, 몇몇 해산물을 사고 돼지고기를 두어 근 샀다. 거기에 더하여 아이들이 먹을 붕어빵과 가족들의 양말과 옷거리, 소소한 먹을거리로 다시 물물 교환하듯이 바꾸다 보면... 정작 어머니 손에 남는 것은 동전 몇 개뿐일 때도 많았던 것 같다.
내가 살았던 읍내는 시골 오일장 치고는 제법 컸던 탓인지.... 채소 시장과 우(牛) 시장, 어(魚) 시장과 먹거리 장터의 경계가 뚜렷했다. 장날이 되면 멀리 함평과 무안군내, 신안 섬 지역에서도 각종 농산물을 사기 위해 많은 이들이 몰려들었다. 그래서인지 장날은 온갖 상품과 먹을거리가 어른과 아이들의 눈과 코와 귀를 유혹했다. 기차역에서부터 장터 입구까지 좌판을 깔고 이런저런 물건을 파는 이들이 많았다. 우시장에서는 백여 마리가 넘는 소가 새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고, 그 주변에서는 돼지와 닭, 오리가 섞여 울었다.
오일장의 역동성은 가축들의 울음소리와 오가는 사람들의 소란으로 살아 움직였다. 평소에는 볼 수 없는 희귀한 농산물, 나물들과 약재들도 거래되었다. 한쪽 구석에서는 원숭이와 비둘기를 훈련시켜 재주를 부리게 하고 차력과 마술을 선보이던 이들도 있었다. 이들은 무슨 약인지는 모르지만 일명 만병통치약을 팔았고, 보고 웃으며 손뼉 치던 이들은 공연 말미에 다들 하나씩 물건을 사주곤 했다. 약장수들이 구경하는 아이들에게 툭하면 하는 말.
"애들은 가라~~ 이것으로 말할 것 같으면, 맨날 오는 것이 아니여~~~ 아무튼, 아그들은 가라"
어른들에게만 중요한 어떤 약을 팔았던 것일까? 그 약을 먹었던 어른들은 효험이 있었을까? 그 점이 진정 궁금하긴 하다. 그때나 지금이나...
어린 마음을 가장 이끌었던 장소는 우시장과 채소시장 사이의 작은 공간에 놓여있던 작은 솥단지 몇 개였다. 그곳에서는 이른 아침부터 무언가가 푹 끓여지고 있었고, 그것의 냄새는 곧 어린 뱃속의 동요를 불러왔다. 그것은 어른들이 반주와 함께 드시던 고깃국물 가득한 국밥은 아니었고, 달콤했던 팥죽의 향기였다. 아주머니들이 먼저 돈을 받고커다란 주발에 팥죽을 가득 담아주었다. 배고픈 이들은 작은 평상,앉은뱅이의자에서나 그냥 서서 밥상도 없이 허겁지겁 잘도 먹었다. 그 당시에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팥죽을 좋아하지 않는 이들이 없었다. 밥보다 죽이 흔했던 시절. 국가에서 장려했던 혼분식의 결과물인지 보리쌀을 밀가루로 바꾸고 집집마다 다양한 죽을 쒀 먹었다. 이틀에 한 번꼴로 죽을 먹었었다. 몸에서 밀가루 냄새가 떠나질 않았다.
그때의 과도한 죽문화 때문인지 성인이 되어서 죽을 싫어하는 친구들도 있다. 어찌 되었건... 그 죽 중에서 팥죽은 단연 으뜸이었다. 먹기도 편하고 하얀 설탕을 들이부어 단팥죽으로 먹다 보면 세상의 시름이 다 녹아드는 듯했다. 수제비나 칼국수는 심심했고, 호박죽은 건더기가 없어서 아쉬웠다. 팥죽은 절묘하게 이 두 가지를 동시에 메꿔주었다. 어린 마음에 설탕이 들어간 달콤함의 유혹을 이길 수는 없었다. 하기야 국수를 설탕물에 말아먹던 시절이었으니...
리어카로 가져온 파와 배추와 부추를 펼쳐놓고 누군가의 손길을 기다리는 어머니의 등 뒤에서 아이는 호기심과 배고픔의 눈빛을 가졌다. 어른들에게 장터는 생존의 터전이었겠지만 아이들의 눈에는 먹을거리가 풍부한 잔칫집으로 보였다. 채소를 파는 앞쪽 기름가게에서는 아침부터 깨를 볶고 참기름을 짜는 작업이 계속되었고, 그 주위는 온통 고소한 참기름, 들기름 향으로 물들었다. 그 옆 떡집에서는 쌀을 빻아 백설기를 찌고 오색 송편을 빚고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시작된 장터의 하루는 지금의 상설시장처럼 길지가 않았다. 빠른 두 끼 정도를 먹을 시간이 되면 해가 중천에 떠있을지라도 파장이 되곤 했다. 가장 먼저 우시장이 파하고 그다음 어시장이 장사를 마쳤다. 채소를 파는 곳과 술과 음식을 파는 곳은 사고 먹는 이들이 많아서인지 가장 늦게까지 장터의 활기를 지속시켰다. 우시장과 어시장이 파하는 오후 서너 시가 되면 저마다 원하는 것을 얻은 이들은 하나둘 집으로 갈 준비를 한다. 어머니들은 가져온 곡물이나 채소를 파는 틈틈이 가족을 위한 생필품을 사고, 오래간만에 만나는 다른 동네의 어른들과 인사를 나눴다. 장터는 물건만 파는 곳이 아니라 소식과 정을 나누는 소통의 장이기도 했다.
여전히 팥죽을 담은 솥단지 밑에서는 장작불의 여운이 남아 솥을 데우고 있었다. 온종일 붕어빵 몇 개와 엿가락 두어 개, 주위에서 얻어먹은 쑥떡으로 배울 채웠던 아이들의 눈동자는 여전히 그 솥을 향한다. 집에서도 자주 먹던 팥죽이지만..... 장터에서 사 먹던 그 맛은 특별했다. 집에서 먹는 것보다 훨씬 퍼지고 팥물의 농도도 묽었지만. "장터"라는 공간에서 "사"먹는 행위가 주는 즐거움이 그 맛을 더 달뜨게 했다. 팥죽 한 그릇에 반찬이라곤 열무김치 한 가지였지만 그 맛은 꿀맛이었다.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고 우시장에서 소떼우는 소리가 들렸다. 여기저기서 흥정하는 말소리가 BGM으로 들리는 장터라는 공간만이 줄 수 있는 특별한 맛이었다.
바쁘고 정신없는 엄마를 조르고 졸라 드디어 팥죽 그릇이 앞에 놓이면... 달디 단 첫맛과 팥죽의 끈적함이 혀끝을 적셨다. 어린아이들은 배고픔에 김치는 쳐다보지도 않고 죽그릇에 코를 박고 먹었다. 그냥 행복한 순간이었다. 입가에는 팥물이 묻어났고, 주위의 소음은 사라지고 없었다. 푹 퍼져버린 팥죽이었지만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넘어가는 건지 구분을 못할 만큼 위력적이었다. 달콤한 장날의 오후였다.
이제는 그 오일장 자리에 농협 하나로마트가 자리 잡고 대형 주차장이 들어섰다. 기름을 짜고 팔던 자리에는 8천 원짜리 백반집이 여러 개 자리 잡고 장터의 명맥을 잇고 있다. 소의 눈망울로 가득 찼던 우시장 자리는 많은 창문을 가진 건물들로 바뀌어져 있다. 장터를 드나들던 수많은 어른들은 세상을 떠나고, 어린아이들은 그때의 어머니보다 더 나이 든 어른이 되었다. 하지만 변치 않은 것 하나.... 다디달게 먹었던 팥죽에 대한 그리움... 그 감정은 그 시절의 어머니에 대한 보고픔 만큼이나 오랫동안 남아있다.
배고픈 시절의 장터와 팥죽 한 그릇이 주던 행복은.... 어머니의 손을 잡고 장터를 따라가 본 아이들... 어머니에게 욕먹으며 애써 사달라고 졸라본 아이들만 안다. 다디단 단팥죽의 참맛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