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유행하는 단어 중에는 "하마터면"과 "어쩌다"가 있다. 두 단어가 불편한 사회 현실을 비꼬거나 의미 있는 인식을 전제로 사용되면 말하는이나 글쓴이의 감각이 돋보인다.
두 단어의 사전적 의미와 그 용법을 살펴보면.
"하마터면"은 "조금만 잘못하였더라면"이라는 뜻으로 주로 위험한 상황을 겨우 벗어났을 때에 쓰는 말이다. 비슷한 단어로 "자칫"이 있다. 어법을 보더라도 위험한 상황에서 벗어났거나 이를 피한 경우에 안도의 뉘앙스를 담고 있다. 때문에 하마터면 뒤에는 어법상 위험한 상황이 오는 게 맞다. 하마터면 적의 함정에 빠질 뻔했다. 이런 식으로.
최근의 베스트셀러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를 보면. 열심히 사는 게 위험한 상황이거나 위험을 동반한 그 무엇인지 의심스럽다. 열심히 살아가는 것은 누가 보더라도 바람직한 것이다. 책 제목만으로는 어법상 맞지는 않다. 작가도 그 점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문제는 열심히 사는(하는) 것과 그에 대한 정당한 보상의 메커니즘이다. 글쓴이는 개인이 열심히 살아가더라도 사회 시스템이 정당한 보상을 해주지 않고 배신감을 안겨주는 현실을 살짝 뒤집어 비꼬고 있는 것이다.
이 점을 꼬집어 쓴 작가의 현실인식이 그대로 드러난다는 점에서 이 책은 괜찮은 작품으로 평가된다. 열심히 살아가는 것과 사회적인 평가가 적정하지 않은 현실, 그 간극에서 개인이 포기하고 자족할 수 있는 권리를 선택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은 일면 통쾌할 수도 있겠다. 노력에 대한 보상을 제대로 받지 못하며 살아가고 있는 이 땅의 많은 이들에게는 심심한 위로가 될 것이다.
솜사탕도, 만들어 파는 분도 어쩌다 존재하지는 않는다.
"어쩌다"는 "어쩌다가"의 준말로 "뜻밖에 우연히"라는 뜻이다. 이 단어는 뒤에 오는 명사와 함께 준비가 안되거나 우연히 어쩔 수 없이 선택한듯한 뉘앙스를 담고 있다. 어쩌다 사장, 어쩌다 공무원, 어쩌다 건물주 등의 조어가 그 예이긴 한데. 그 사장이나 공무원이 자기 직분에 맞게끔 일을 잘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건물주도 상속이나 증여받지 않은 이상 돈을 버는 노력 없이 어쩌다가 되는 경우는 없다. 따라서 "어쩌다 000"은 비자발적이거나 어쩔 수 없는 선택에 대한 불편한 상황을 묘사한다는 면에서 의미가 있다. 그 상황에서 개인이 제대로 역할을 할지 여부는 그에게 달려있다.
"어쩌다 공무원이 되었다"라는 문장에서 무엇이 느껴지는가. 평소의 가치관과 생각에 따라서 그 의미가 달라지겠지만. 저 문장에서 공무원이나 그 직업군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는 적다는 느낌이다. 오히려 "이건 내가 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이 공무원을 하고 있다"라는 식으로 읽히는 게(말하는 게) 더 일반적이다. 비자발적인 상황에서 선택한 직업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라는 심정을 표현한 것이라면 나름 이해는 간다. 그렇지 않고 공무원이라는 직업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나 편견만을 드러내고 있다면. 공무원이 꿈인 사람들에게 어떠한 위로라도 건네야 되는 것은 아닐까 싶다.(공무원이 꿈이라는 이유로 다른 누구에게 욕먹을 까닭은 없기 때문에)
공무원에 대한 이러한 평가 또한 직업선택의 사회적 상황이 여의치 못함을 보여준다. 만약 다양한 직업세계가 안정성 있게 존재하고 선택할 기회가 공정하게 부여된다면, 각 개인은 자신의 소질과 능력에 맞는 직업을 선택하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불안전한 노동시장, 불투명한 정년의 문제, 노후의 복지 문제 등이 복잡하게 얽혀있어 선택이 다양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공무원에 대한 선호나 쏠림현상은 이런 사회적 상황의 결과이다.
"하마터면이나 어쩌다" 표현이 우리의 부조리한 현실을 풍자하는데 일조한다면 제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하마터면 00"과 "어쩌다 00"식의 표현이 남발되고 당연하게 여겨지면, 그만큼 우리 사회는 위험해져 있거나 불안해져 있는 것이다. 아니면 유머감각이 극도로 발달해있든지.
어느 한 사회가 어떻게 유지되고 발전되어가는가에 대한 답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대부분 사회구조적인 문제와 구성원의 의지의 문제로 집약되겠지만. 여기서는 사회구조적이거나 거시적인 부분은 놔두고 개인의 노력과 사회적인 보상시스템에 대해서만 얘기해보자.
우리 사회는 개인의 부단한 노력에 대해 올바르게 평가를 하고 그에 대한 보상을 약속하고 있는가?
정당한 노력에 대해 제대로 된 평가와 보상이 주어진다면 이런 질문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출발선의 불평등과 과정상에서의 불공정의 문제는 일명 "수저 논쟁"과 그 맥락이 닿아있다. 금수저인가 흙수저인가에 따라 노력의 양과 질이 다르게 평가된다면 그 결과에 대해 누가 승복하겠는가? 우리에게 사회경제적인 배경이나 부모의 사회적 지위에 관계없이 개인의 노력에 의해서만 평가되는 사회는 요원한 걸까?
여기에 대한 대답이 불편하다고 해서 피할 수는 없다. 당장 현실적으로 타개책이 없다고 해서 포기하거나 방치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이런 불편한 상황에 대해 무조건 회의론적 시각을 갖거나 시니컬하게 바라보는 것도 지양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사회는 묵묵히 자신의 맡은 바 역할에 충실한 분들 때문에 근본이 흔들리지 않고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개개인의 치열하게 노력하는 삶이 있기에 일부 불공정하고 불평등한 결과에도 사회가 망하지 않고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 냉소적으로 "하마터면이나 어쩌다"를 자주 얘기할 때 기본에 성실한 보통의 삶들은 정당한 노력과 그에 부합하는 보상을 꿈꾸며 생활전선에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하마터면이나 어쩌다"의 어법이 일상이 되거나 비판 없이 받아들여지는 분위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 또한 개인의 노력 여부에 대한 선택권은 충분히 존중받아야 하고, 노력의 대열에서 포기하거나 이탈하더라도 비난해서도 안된다. 그 자체가 소극적이나마 하나의 권리이므로.
사회적으로는 정당한 노력에도 보상받지 못한 개인을 위로하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공정한 경쟁의 룰과 그에 승복할 수 있는 사회적 합의, 탈락한 이들이 패자부활전을 통해 재도전할 수 있는 기회의 보장. 그렇지 못하고, 그 개개인이 열심히 살아가는 삶을 포기하고 그러한 삶들이 쌓여갈 때, 다시 한번 위기는 우리에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건, 정당한 노력에 대한 평가와 보상시스템 구축이라는 사회적인 숙제가 우리에게 남아있다.
"하마터면이나 어쩌다"가 개그 프로나 아무 말 대잔치에 남아있도록 하기 위해서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