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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성파파 Nov 06. 2019

때로는, 진실을 모를 때 아름답다

모르는 게 좋을뻔했다, 숨겨진 진실들

#1.

어릴 적 이발소에 가면 유명한 시와 그림이 걸려 있었다. 아버지 옆 자리에서 머리를 하다 보면 하염없이 졸음이 쏟아지곤 했었다. 사각사각하는 이용사 아저씨의 가위소리는 수면제와 같았다. 그 당시에는 지금과 같은 전동 커트기가 없었던 시절이라 가위로 시작해서 가위로 끝났다. 연탄난로 위 주전자에서 물 끓는 소리와 네모난 창에 어린 새하얀 김은 정겨운 이발소의 풍경이었다. 지금은 찾아볼 수 없는.


이발하는 의자 앞면에는 전면 거울이 있었고, 그 거울 윗면에 세계명화나 유명한 시가 걸려있었다. 우리나라 시로는 윤동주의 <서시>가 주로 액자화 되어있었다. 대부분은 서양 쪽의 시와 그림이었다. 그중 가장 기억나는 것은 푸시킨의 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와 밀레의 림 <만종>이었다. 계속 같은 이발소에 가다 보니 푸시킨의 시는 저절로 외워졌다. 그 당시 친구들에게도 "삶이 너에게 사기를 치더라도 절대로 짜증 내거나 꼬라지 내지 말라"라는 식으로 바꿔서 말하곤 했었다.


동심으로 바라본 세상은 아름답다. 지금 이 세상에서 동심을 제거하고 나면 무엇이 남을까?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슬픔의 날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살고 현재는 늘 슬픈 것
모든 것은 순간에 지나가고 지나간 것은 다시 그리워지나니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노하거나 서러워하지 말라
절망의 나날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 반드시 찾아오리라
마음은 미래에 살고 현재는 언제나 슬픈 법
모든 것은 한순간에 사라지지만 가버린 것은 마음에 소중하리라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우울한 날들을 견디며 믿으라, 기쁨의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현재는 슬픈 것  
모든 것은 순간적인 것, 지나가는 것이니
그리고 지나가는 것은 훗날 소중하게 되리니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설움의 날은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은 오고야 말리니  


그 당시 푸시킨이라는 러시아의 국민시인은 몰랐지만 그 시는 왠지 멋있어 보였다. 인생에 대한 그의 태도나 마음가짐은 배울만했다. 어린 마음에도 삶을 저렇게 살야겠다는 생각이 이발을 할 때마다 들었던 기억이 난다. 아버지께 푸시킨이 누구냐고 물었다가 "머 그런 쓰잘데기 없는 것을 묻느냐" 타박을 듣기도 했다. 아무튼 푸시킨의 시는 그 뒤로 오랫동안 하나의 아포리즘으로 어린 동심을 채웠다.


푸시킨의 시를 보면 인간으로서 갖춰야 할 삶의 기본적인 태도를 들어있다. 인간의 삶은 다양한 상황과 더 다양한 감정의 복합체로 이루어진다. 살다 보면 화나고 짜증 나고 서럽고 절망스러운 날들이 많다. 순간순간의 감정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인생의 중요한 주제일 수밖에 없다. 또한 순간과 영원, 현재와 미래의 문제가 시간 순서대로 또는 어떤 특정 시점에서 늘 고민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고민에 답을 주고 있는 것이 푸시킨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다.


인간이 어떻게 순간을 참아내고 영원 속에 살아갈 것인지. 현재의 고통이나 분노를 어떻게 생각해야 내일이나 미래의 내 삶이 기쁨의 날이 될 것인지에 대해 답을 주고 있다. 푸시킨은 순간의 감정에 충실할게 아니라 미래의 나의 행복을 위하여 현재의 그것을  참아내라고 주문하고 있는 것이다.


한참 뒤에야 어떤 책을 통해 푸시킨의 인생에 대해서 알게 되면서 그 시를 다시 떠올려봤다. 결투로 생을 마감한 푸시킨의 비극적인 최후는 저런 의미심장한 시를 쓴 작가에게는 맞지 않는 것처럼 느꼈었다. 왜 결혼 후에도 계속 염문을 뿌리는 아내 때문에 결투를 하게 되었을까. 본인의 시처럼 자신의 사랑이나 자신의 삶이 자신을 속였더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않았다면 그런 비극은 없었을 텐데. 결국 자신의 생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것이었을까. 그토록 멋진 문장을 시로 썼으면서도 정작 자신의 분노를 삭이지 못했던 것은 불완전한 인간의 한계였을까. 그가 좀 더 오래 살았다면 러시아 문학사나 세계문학사에 위대한 발자취를 남겼을 텐데.. 아쉬움이 크다.



#2.

                                 

장 프랑수아 밀레, <만종(안젤루스)> 프랑스 오르세 미술관 소장.


밀레의 <만종>을 보면 우선 저녁놀을 배경으로 한 평화로움과 엄숙한 프랑스의 가을 풍경이 보인다. 들일을 끝내고 삼종기도하는 부부의 모습이 황량해 보이는 들판과 묘한 조화를 이룬다. 지평선이 보이는 광활한 들판에서의 두 사람의 기도는 보는 이로 하여금 경건함까지 느끼게 한다. 삼종기도는 가톨릭 국가에서 하루 세 번 올리는 기도를 의미한다. <만종>을 다시 보면, 목가적으로 보이면서도 뭔가 다른 톤의 감정이 느껴지는데 그 실체를 읽어내기 힘들다. 어린 눈에도 보면 볼수록 마음이 편해지는 아늑한 풍경이었다.


어린 시절 가을걷이가 끝난 농촌의 풍경은 삭막하기 그지없었다. 논에 뒹구는 볕 단과 타다 남은 곡물 부산물들로 어지러운 들판이 우리의 현실이었다. 종교적 신심이 거의 없던 우리 주위는 저런 삼종기도처럼 경건함을 느낄 수 있는 의식도 없었다. 춥고 어두운 시대를 관통하다 보니. 겉으로는 평화로워 보이는 시골 풍경 속에도 어린 동심이 동경할만한 따뜻한 분위기를 찾기 힘들었었다. 당시 어린 초등학생의 눈에 비친 <만종>의 따뜻한 풍경은 차가운 현실을 대체하는 그 무엇이었다.


그런데 이 그림과 관련해서 숨은 얘기를 듣는다면 느낌이 달라질 것이다. 부부의 발밑에 있는 바구니에는 감자나 농기구가 들어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일설(살바도르 달리의 주장)에 의하면 그 바구니 속에 그들의 죽은 아이가 들어있었다고 한다. 밀레의 작품을 본 지인의 권유에 의해 아기의 관을 감자가 든 바구니로 다시 그렸다고 한다. 진실이 어떻든 간에, 배고픔의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죽은 어린아이. 그 아이의 시체를 두고 기도하는 부모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슬픈 이야기다. 그런 스토리를 모르고 바라본 <만종>의 느낌과 알고 난 뒤의 느낌은 어떻게 다른가?


풍경과 인물을 사실 그대로 그린 그림이지만. 그 사실 속에 숨은 진실을 알고 보면 처음 느낌과 전혀 다른 느낌이 있을 수 있다. 평화로운 들판의 풍경이 오싹한 슬픔으로 변해가는 감정의 전이. 그렇다고 명작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만종>이 평화로운 저녁 무렵의 경건한 기도로 보이든 아기를 잃은 부부의 슬픈 저녁기도로 보이든 위대한 작품임에는 변함이 없다.


비단 그림이나 예술작품의 문제만은 아니고 우리 삶 속의 다양한 상황에서도 얼마든지 비슷한 경험이 가능하다. 겉으로 보이는 것과 숨은 얘기를 알고 난 뒤의 다른 느낌. 그것은 겉과 속이 다른 게 아니고 하나의 현상 속에 여러 의미나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특정 상황도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그렇지 않을까?




#3.

때로는 어떤 진실을 몰랐을 때가 더 좋을 때가 많다.


소설 속의 반전 기법도 이처럼 보이는 현상 속에 진실 하나를 숨겨놓음에서 비롯된다.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도 드러나지 않은 사실 때문에 오해나 착각이 갈등으로 이어지다가 다시 진실을 알고서 화해하는 구도가 많다. 그나마 이런 가상의 세계는 복선이나 해피엔딩을 통해서 읽고 보는 이로 하여금 진실을 알게 해 주는 친절함을 베푼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은....


누군가의 삶을 한 꺼풀 벗겨보면 우리가 보는 것과 전혀 다른 인생이 있을 수 있다. 타인들과 살아가는 다양한 상황 속에서 타인의 선의가 왜곡되고 이해되지 못하는 상황들도 많다. 타인들이 가진 삶의 진실이나 상황 속의 진정한 의도는 우리가 영원히 깨닫지 못하고 시간 속으로 사라져 버린 경우도 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고, 뭐든지 속단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삶의 본질이나 현상이 가진 진실은 하나일 수 있으나,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에 따라서 얼마든지 다르게 보일 수 있다는 사실을. 타인의 삶이나 처지에 대해서도 그들의 보여주는 것과는 다른 느낌의 속사정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동심을 잃어버린 우리들은,


푸시킨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에서 슬픔과 고통스러운 현재의 순간을 이겨내는 긍정적 에너지를 얻고, 내일을 위해 오늘이라는 순간을 참고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푸시킨의 삶이 어떠했든 간에.


밀레의 <만종>에서도 어린 시절 그림을 보는 것만으로도 따뜻했었던 기억만을 소환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림에 대한 느낌이 달라진다고 해서 어린아이의 눈에 비췄던 동경의 대상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므로.


그래서 어린 왕자는 사막을 걷다가 이런 독백을 했을까?

"별들이 아름다운 건, 눈에 보이지 않는 꽃 한 송이 때문이야...."

"사막이 아름다운 건, 어딘가에 우물을 감추고 있기 때문이야...."


한참 시간이 흐른 다음 박노해 시인 또한 이런 독백을 한다.

"사막이 아름다운 건 어딘가에 오아시스가 있기 때문이 아니다."

"자신의 푸른 물과 나무숲을 기꺼이 지구 저편에 내어주기 때문이다"


동심을 잃어버린 나도 한마디 독백을 던진다.

"어린 왕자나 박노해 시인 두 사람 얘기가 다 맞다"

"세상 일이란 게 다 그렇다. 어떻게 보고 느끼는 게 좋을지 모르니 애써 걱정할 필요는 없다"

"사막은 그냥 사막일 뿐이다. 앞서 지나간 사람의 발자국이 가장 소중할 수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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