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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뤼 Feb 20. 2022

과거와 현재가 공명할 때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

사람들은 '그때 그 시절'을 소환하는 이야기에 열광한다. 대표적으로 <응답하라> 시리즈가 있고, 1000만 관객을 모은 영화 <국제시장>, 예능으로는 <무한도전-토토가>와 <싱어게인>이 있다. 근데 재밌는 건, 과거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는 이런 시대극은 '그때'를 경험하지 못했던 시청자들에게도 허구의 '향수'를 불러일으킨다는 점이다. 여느 역사서처럼 단순히 역사를 구구절절 들려주는데 그치지 않고, 지난 세월의 특정 구간으로 시청자들을 초대한다.


응답하라 시리즈의 배경이 된 8~90년대에 대한 기억이 적어도 내 머릿속에는 없지만, 생생하게 소환된 그때의 이미지를 감상하고 있으면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여행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진다. 그때를 살지는 않았지만 왠지 다 알 것만 같은 그런 느낌. 그리고 <토토가>를 보면서 SES가, 젝스키스가, HOT가 군림하던 시대에 그들의 노래를 듣고 자라지 못했던 것이 못내 아쉬웠던 건 왜일까. 불확실한 미래를 긍정하기보다는 지나간 세월을 후회하는 일에 더 익숙한 우리라서, 오늘의 기쁨보다는 과거의 상실이, 이제는 도로 손에 넣을 수 없는 흘러버린 시간이 더 값져 보여서 그런 건 아닐까 하고 생각해봤다.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는 IMF 사태가 있었던 1998년을 배경으로 한다. 이 드라마를 보고 있으면 어쩐지 저때로 돌아가고 싶어 진다. 아니 말하고 보니 이상하다. 나는 1998년에 대한 기억이 없으니.. 돌아갈 수야 있겠지만, 희도나 이진이가 하는 고민을 품을 수는 없겠다. 음, 그럼 내가 바라는 건 1998년의 청춘이 되어보는 것이라고 해야겠다. 그들처럼 무언가에 뛰어들어보고, 도전해보고, 그러다 실패해서 아파도 해보고. 음, 지금도 충분히 그러고 있는데- 단지 시대가 달라졌을 뿐이지.


극 중 여주인공 희도의 외할머니가 말했듯이 "모든 시대는 그 시대만이 짊어진 십자가가 있다". 살기가 나아졌다고 삶이 나아지는 건 아니라는 거다. 2022년을 살아가는 청춘이나 1998년을 살았던 청춘이나 치열하게 살았긴 매한가지일 텐데. IMF 직후의 취업난이 코로나 시대의 취업난보다 지나가기 나으리란 법도 없는데..


그래도 마냥 좋아 보인다. 2022년의 청춘보다 1998년의 청춘이 더 청량해 보인다. 모든 생물이 자라나는 여름의 한가운데 서 있는 극 중 인물들이 되고 싶다. 그게 이 드라마가 불러일으키는 착시다. 아, 이쯤 되면 나는 1998년의 청춘보다는 1998년을 살아가는 김태리와 남주혁이 되고 싶은 건가 보다. 휴, 이래서 드라마 많이 보면 정신 건강에 해롭다는 거다.

<스물다섯 스물하나>는 청춘들의 꿈을 앗아간 잔혹한 시대를 조명하면서도 그 잔인함을 청량한 감성으로 적셔버린다. 김태리, 남주혁을 비롯한 배우들의 외모가 청량함을 전달하는데 2할, 스토리라인과 그때 그 시절을 완벽하게 재현해낸 미장센이 3할이라면 5할은 이 오프닝이 차지한다. 아날로그 필름 느낌 물씬 나는 필터와 배경음악까지 완벽하다. 40여 초 남짓한 이 오프닝 시퀀스에 16부 분량의 내용이 압축된 듯하다. 시작이 반이라 했던가. 이 드라마의 흥행 이유는 초반부터 몰입도를 극강으로 끌어올리는 이 오프닝의 완벽한 구성에 있다.


그리고 두 번째 흥행 비결은 전 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소재라고 생각한다. IMF 때 가장이었던 586세대와 그 시기 취업난을 겪었던 X세대를 비롯하여, 저성장 시대에 생존을 위해 사투를 벌이고 있는 오늘의 K청춘들까지도 쉽게 공감할 수 있는 꿈과 도전에 관한 이야기다. 하이틴 청량 로맨스라고는 하지만, 그동안 봐온 유치뽕짝 학원로맨스와는 결이 좀 다르다. 이 작품은 오히려 어른들의 성장드라마에 가깝다. 희도는 패기 넘치는 펜싱 유망주이며, 라이벌 고유림과 경쟁을 펼친다. 스포츠는 냉혹한 승부의 세계, 그리고 그 안에서 필연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는 패배, 좌절 그리고 성장을 말하기에 완벽한 소재다. 무한경쟁 시스템과 승자/패자의 엇갈린 운명은 결국 자본주의 체제에 속한 현대인들이 마주하는 현실의 축소판이다. 그래서 치열하게 도전하는 희도와 어느 정도 체념해버린 이진은 결국 IMF와 코로나 시대를 지나가는 우리의 모습과도 쉽게 공명한다. 우리는 날마다 도전하고 깨지고 좌절하고, 또다시 일어나서 희망을 품는다.


오랜만에 드라마를 보면서 가슴이 벅찼다.

청춘, 스포츠, 사랑. 인생을 이야기할  우리의 가슴을 들끓게 하는  가지 테마가 모두  들어있기 때문이다. 역동적이고, 치열하고,  무너지는 우리의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모를 일이다. 전대미문의 역병과 사투하고 있는 우리의 이야기도 언젠간 아름다운 추억거리로 포장될 것이다. 그날은 순식간에 찾아오리라 감히 예상해본다. 그래도 지금 당장은 희도와 이진이의 , 그리고 오늘의 청춘을 응원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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