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시작, 그 사소함에 대하여

: 언어에 꿈을 담다.

 시작은 늘 사소함으로부터 시작된다. 적어도 나의 시작은 그랬다.

 지금 쓰고 있는 이 글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 시작이 가벼웠던 적은 없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말이란 내 삶의 대부분과 연관되어 있었다.      


 어린 시절 장래희망은 변호사였다. 말로써 누군가를 변호해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람들을 도와 세상에 조금이나마 이로울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꽤 오랜 꿈이었고, 이 때문에 전공 역시 법학을 선택했다. 그러던 어느 날, 대학교 3학년 때 들었던 교양 수업 하나가 완전히 새로운 꿈을 꾸도록 만들었다. ‘말하기’ 과목이었다.      


 아나운서 교수님의 ‘말하기’ 수업은 어느새 말보단 글을 분석하는데 더 익숙해져 있던 내게 신선한 자극이 되었다. 누군가의 앞에서 나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무척 떨렸지만 스스로 조금씩 알을 깨고 나오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 좋았다. 감성보단 이성을 앞세워야 할 때, 취미 삼아 즐겨 찾던 공연장도 도움이 됐다. 덕분에 약간은 어색했던 감정 표현에도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졸업이 가까워지면서 아나운서를 꿈꾸게 됐다. 또 다른 도전이었다. 새로운 시작을 마음먹기까지 쉽지만은 않았지만 오랜만에 느낀 설렘을 외면하긴 어려웠다. 졸업 후에도 교수님과의 인연은 계속 이어졌다. 교수님께서는 특유의 미소를 지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다. 이 쉽지 않은 길을 도대체 왜 선택했느냐고 말이다. 물론 아낌없는 격려도 꼭 함께였다.     


 취업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때도 있었다. 여느 청춘과 마찬가지로 아프도록 흔들리는 매일이 당연하다 여겨지던 시기였다. 아나운서 시험은 어느 곳이든 다 수십수백 대 일의 경쟁률을 기록한다. 짧게는 몇 초, 길게는 몇십 분 안에 모든 전형이 끝난다. 기회가 주어지기도 쉽지 않지만, 기회를 얻게 됐다면 제한된 시간 내에 나의 능력을 최대한 다 보여줘야 한다. 상위 단계로 올라가 필기시험까지 보게 되면 상황은 더 복잡해진다. 그래서 미리미리 모든 것을 준비해 둬야만 한다.     


 그래도 간절히 두드리니 문이 열렸다. 비교적 빠른 편이었고, 운이 좋았다. 그날은 모두 나를 돕는 것만 같았다. 근무지 특성상 워낙 보안이 철저한 데다 공채 기회가 흔치 않은 곳이다 보니 시험에 대한 사전 정보를 전혀 얻을 수가 없었다. 마음이 급해져 여느 때보다 조금 더 서둘렀다. 면접 시간보다 훨씬 일찍 도착해 방송을 듣고 최대한 익숙해지려 노력했다. 어느덧 약속된 시간에 가까워졌고, 떨리는 마음을 안은 채 최종 면접이 이뤄지는 장소로 향했다.      


 그때, 한 외국인이 말을 걸어왔다. 출국을 해야 하는데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른다고 했다. 지금은 눈감고도 찾아가는 길이지만 당시엔 나도 익숙지 못했다. 그래도 차분하게 표지판을 살핀 뒤 체크인을 하려면 한 층 더 올라가야 한다고 말해줬다. 혹시 몰라 바로 앞 에스컬레이터까지 그를 배웅했다. 그러자 그가 무척이나 고마워하면서 내게 무슨 일로 이곳에 와있는지를 물었다. 하긴, 지금 생각해봐도 조금 이질적인 차림새였다. 보통은 유니폼을 입고 있거나 편안한 여행객 차림으로 있어야 할 텐데 그날의 나는 화려한 방송용 화장과 스프레이로 고정된 헤어 스타일, 색감 있는 재킷에 원피스 차림이었다. 궁금해하던 그에게 오늘 이곳에 면접을 보러 왔다고 말해줬다.      

 “나는 홍콩에 사는데, 일 때문에 한국에 자주 와요. 다시 왔을 때는 당신의 목소리가 꼭 이곳에 울려 퍼지고 있을 겁니다. 기억하고 있을게요. 행운을 빌어요!”              

 함박웃음을 지으며 응원해주던 그에게 나 역시 고마움을 전했다. 그리고 그날, 놀랍게도 정말 합격을 하게 됐다.


 과연 그는 다시 찾은 한국에서 내 목소리를 기억해 냈을까?

 아마 앞으로도 나는 그날의 기억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인천국제공항에서 하늘로 향하는 관문의 목소리를 담당하게 됐다.


인천국제공항 '문화와 하늘을 잇다' 진행




 설렘과 두려움을 안고 시작한 도전. 출발점은 단 하나를 향하고 있었다. 바로 나였다. 그동안 마주해 온 여러 선택의 순간과 고민의 중심에는 언제나 내가 있었다. 물론 늘 좋은 시작만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도전해보지도 않고 후회하고 싶진 않았다.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 또 잘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보면서 마음이 움직이는 방향을 향했다. 사소한 것 하나라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집중하려 노력했다. 내게 그것은 ‘언어’였고 ‘소통’이었다. 그래서 시작했고 그 시작은 현재 진행형이며, 덕분에 행복하다.     


 시작을 망설이는 사람들이 있다면 사소한 순간을 절대 놓치지 말라는 말을 꼭 전하고 싶다. 어쩌면 그저 무심결에 지나쳐 버린 일상이 나의 진짜 목소리를 듣게 될 기회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소한 것들이 모여 이뤄낸 성취는 또 다른 시작을 꿈꿀 수 있게 한다. 설령 그 시작이 바람과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하더라도 경험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삶의 자양분이 되어 준단 사실을,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렇게 오늘도 나는 다음 시작을 위해 글을 쓴다. 출발선에 선 당신의 내일 역시 행복하기를, 누군가 이 사소한 이야기에 같이 공감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작가의 이전글 변치 않는 사랑의 가치,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