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책으로 마음을 엮어내는
- 쓸모없어 보이는 취미가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순간들.
- 게임으로 '연민'을, 캠핑으로 '사랑'을, 독서로 '지식'을 배우다.
- 취미의 쓸모를 통해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기록한 안내서.
우리는 종종 취미를 '쓸모없는 것'이라고 치부합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이 브런치북은 평범해 보이는 게임, 캠핑, 독서를 통해 취미가 지닌 진정한 가치를 탐구합니다. 취미가 어떻게 저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었는지, 그 여정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당신의 취미는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누군가의 기억과 책들의 숨결을 간직한 나만의 책방을 꿈꾸게 되었다.“
"책방은 단순히 책을 파는 곳이 아니었다. 그곳은 책과 문화라는 실로 사람들의 마음을 엮어내는 공간이었다.“
아버지는 과묵하신 분이었다. 어릴 적엔 그런 아버지가 어려웠다. 주말이면 도시의 우리를 찾아오시곤 했는데, 아버지 손을 잡고 늘 향하던 곳은 동네 책방이었다. 책을 보러 간 것이 아니라 '주얼 게임 CD'를 사러 갔던 것이다.
책방에 들어서면 나는 책은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매대의 게임 CD들을 만지작거렸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한숨을 내쉬셨다. 나는 아버지 마음을 읽고 수학 문제집을 가져와 게임 CD와 함께 건넸다. 그러면 아버지는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고, 그 손길이 따스하게 느껴졌다.
책방은 게임으로 엄격한 아버지와 마주할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곳이었다. 그 후 책방은 내게 아버지와 같은 품을 지닌 곳이 되었다. 말없이 조용하지만 언제나 나를 지켜보며 보듬어주는 공간, 어둠 속에서 빛을 비추어 안전한 길을 알려주는 등대 같은 곳이었다.
아버지와 함께 다녔던 그 책방도 이제는 사라졌다. 추억의 장소들이 시간 속으로 흩어져 갔다. 이런 사라짐을 멈추고 싶어서일까, 책과 글쓰기를 좋아하게 되면서 누군가의 기억과 책들의 숨결을 간직한 나만의 책방을 꿈꾸게 되었다.
책방 운영은 단순히 책을 좋아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일'일 것이다. 하지만 게임을 좋아해 직업으로 삼은 나에겐 이미 익숙한 여정일지도 모른다. 좋아하는 것과 그것이 직업이 되는 것의 차이를 이미 경험했으니 말이다.
나는 그 세계를 탐험해 봤고, 그 길을 걸어갈 방법을 알고 있다. 언젠가 나만의 책방을 열고 싶다는 꿈을 안고, 책과 사람들의 기억을 품은 책방들을 탐방하기 시작했다.
지난 여름 제주 휴가 중 동네 책방 탐방을 했다. 제주시에서 일주서로를 따라 애월과 협재를 지나 서귀포로 내려가는 길, 짙은 녹색 나무 사이로 단층 회색 기와지붕 건물이 나타났다. 벽면에 '책'이란 글자와 '작은 마을의 작은 글'이란 뜻의 '책방 소리소문'이 한자로 쓰인 간판이 있다.
문을 열자 빼곡한 책들이 조용히 인사를 건넨다. 안쪽엔 별도로 큐레이션 된 서가가 있다. 책방 주인이 세심히 고른 책들이 누군가 읽어 주길 기다리며 숨 쉬고 있다.
서가는 "어떤 책을 읽고 싶으세요?"라고 묻는 듯하다. 책방 주인의 생각이 묻어 있는 이곳은 평온했다. 무엇 하나 충돌하지 않고 거스르지 않는 고요한 공간이었다.
책방의 가로로 긴 창은 제주의 녹색과 태양의 은색을 담아 내부를 은은히 비추고 있었다. 좋은 풍경과 책들이 있는 이곳이 마음을 따뜻하게 만든다는 걸 알게 되었다. 구석 창가에는 필사할 수 있는 작은 책상이 마련되어 있어, 책을 보며 든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왼쪽에는 흔치 않은 점자 도서가 진열되어 있었고, 옆으로는 여성, 노인, 아동 관련 사회 인문학 서적들이 자리했다. 전체적으로 비슷한 계열의 책들이 한자리에 알맞게 구성되어 있었다. 서가에 꽂힌 책들의 배열과 서가 구조의 배치가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만약 나의 책방이 생긴다면, 이 책방의 '배열'을 닮고 싶었다.
여행을 다니면서 해당 지역의 책방을 방문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작년 가을, 박준 시인의 시 <묵호>를 읽고 바다와 항구가 그리워져 묵호역으로 무작정 떠났다. 가을에 익어가는 단풍만큼 익어가는 바다를 보고 싶었다.
역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작은 동네 책방이 있었다. 파란색 은행 간판과 하얀색 미용실 간판 사이로 '잔잔하게 BOOKS'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유리문에는 책방에서 열리는 다양한 문화 행사 포스터들이 붙어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익숙한 차임벨 소리가 울렸다. 입구에는 '여행 책방'이라는 글자가 작은 표지판에 쓰여 있었고, 그 옆으로 각종 여행 소품이 정겹게 놓여있었다.
책방 주인은 동네 사람으로 보이는 남성 손님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내가 들어서자 반갑게 맞이하며 편히 둘러보라 했다. 여행 책방답게 세계 각국 관련 책들이 가득했다.
남성 손님이 책 한 권을 집어 결제를 요청했다. 주인은 벽면 포스터를 가리키며 이번 주 작가 북토크를 알렸다. 남성은 고맙다며 인사하고 떠났다. 책방 주인은 유리문을 닫으며, 나에게 넌지시 지역 주민들을 위한 문화 행사를 자주 연다고 말했다. 그때 나는 책방이 단순히 책만 파는 곳이 아니라, 문화를 파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책방이 생긴다면, 이 책방의 '문화'를 닮고 싶었다.
독서모임 장소였던 마포구 합정은 문화예술의 중심지로, 크고 작은 서점들이 골목마다 자리했다. 그 사이엔 북카페와 북 칵테일바도 있었다. 모임 후 자주 찾던 곳이 북 칵테일바였다.
합정역에서 성산중학교 방향 좁은 골목을 지나면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에 '문학살롱 초고'라고 적혀 있다. 계단을 내려가면 은은한 조명 아래 위스키, 보드카와 시집들이 벽면을 채운 아늑한 공간이 나온다. 작은 테이블마다 사람들이 책을 읽고 있고, 크리스털 잔의 다양한 칵테일이 반짝였다.
테이블에 앉아 메뉴를 살폈다. '문학 칵테일' 아래 장 그르니에의 『섬』과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등 문학 작품이 적혀 있었다. '이방인' 설명에는 '커피와 시가, 아니 시나몬.'이라고 쓰여 있었다. 소설 『이방인』의 뫼르소와 알제리의 분위기를 표현한 듯했다.
문학을 맛으로 표현한 점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고민 끝에 '이방인'을 주문했고, 시나몬 스틱이 꽂힌 칵테일과 함께 민음사 판 『이방인』을 받았다. 책을 읽으며 칵테일을 마시다 보니, 흐릿해지며 책 속으로 빠져드는 듯했다.
좁은 법정에서 무표정한 뫼르소가 시가를 물며 물었다. "당신도 이방인입니까?" 칵테일 덕에 뫼르소를 만나고 돌아온 기분이었다. 나의 책방이 생긴다면, 이 책방의 '표현'을 닮고 싶었다.
지역의 책방들을 돌아다니며, 나는 나의 책방을 그려 나갔다. 책방은 단순히 책을 파는 곳이 아니었다. 그곳은 책과 문화라는 실로 사람들의 마음을 엮어내는 공간이었다. 나의 책방도 그러하기를. 책을 찾아오는 이들과 사람을 만나러 오는 이들로 북적이는 곳. 그 생각만으로도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어린 시절 게임에 설렘을 느꼈듯, 이제는 책이 게임처럼 느껴졌다. 책방을 만드는 일이 게임을 만드는 것과 비슷하게 여겨지는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둘 다 공간을 창조하고, 그 안에서 사람들이 자유롭게 꿈꾸고 모험하길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으니까. 이제 나의 책방, 그 미래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어머니의 고향 한적한 마을 한쪽에 외갓집이 자리하고 있다. 단층집과 작은 헛간, 소박한 마당이 어우러진 공간이다. 깊은 우물은 여전히 시간이 멈춘 듯하고, 장작을 태우던 아궁이는 옛 추억을 간직한 채 그대로다.
아궁이 옆으로는 사과나무 두 그루와 석류나무 한 그루가 계절의 변화를 기다린다. 이곳은 우리의 유년 시절과 어머니의 어린 날이 겹쳐는 시간의 교차점이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외갓집은 이제 텅 비어 고요하다. 그러나 간간이 외삼촌들의 발길이 이어져, 뒷밭의 배추와 고추들이 외로움을 달래 주곤 한다. 비록 사람의 온기는 사라졌지만, 이곳에는 여전히 우리 가족의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어느 날 어머니께 조심스레 여쭈었다. 먼 미래에 내가 책방을 연다면, 외갓집 터를 사용해도 되겠냐고. 어머니는 잠시 생각하시다가, "외삼촌들에게 물어보고 그러라"고 하셨다. 외갓집을 허물어야 할지도 모르는데, 그렇게 쉽게 허락하실 줄은 몰랐다. 그곳엔 가족의 추억과 손길이 남아있었으니까.
책방 이름을 무엇으로 하면 좋을지 여쭈자, 어머니는 담담히 "무엇을 하든 상관없다"고 하셨다. 그 말씀 속에 어머니의 마음이 느껴졌다. 외할아버지를 먼저 보내고, 불편한 몸의 외할머니를 극진히 보살피신 어머니. 젊은 시절 시집살이에 외가를 돌보지 못했던 아쉬움이 묻어났다.
곰곰이 생각하다 결심했다. 이곳에 책방을 연다면, 외할머니의 이름을 따서 짓고 싶었다. '해선 책방'. 외할머니의 성함이자, 나의 꿈이 담긴 이름이었다.
비용을 고려하지 않은 상상 속 나의 책방은 이러했다. 외갓집을 허물지 않고 증축하는 방식으로 구상했다. 마당을 중심으로 'ㅁ'자 형태로 외벽을 세우고, 중앙에는 사과나무와 석류나무를 옮겨 심어 유리로 감싼 중정을 조성한다.
큰 방과 화장실을 터서 북 큐레이션용 서재로 만들고, 내가 직접 읽고 선별한 책에는 손 글씨로 감상평을 첨부한다. 부엌에는 테이블을 놓아 독서 공간으로 활용한다. 판매하는 디저트와 음료의 이름은 책에서 영감을 얻어 짓는다.
아궁이와 우물은 외할머니의 유산이므로 그대로 보존한다. 책방 뒤편 밭에는 타프와 의자, 빔프로젝터를 설치해 주말마다 낭독회, 음악회, 영화제 등 문화 행사를 연다. 사람들은 이 책방에서 책을 둘러보며, 외할머니의 공간, 어머니의 공간, 그리고 우리의 공간을 사유하며 즐긴다.
책방은 아직 꿈결 속에 머물지만, 그 윤곽은 날로 선명해져 가슴을 뛰게 한다. 제주의 '소리소문 책방'에서 마주한 책들의 배열이 주는 아름다움, 묵호의 '잔잔하게 책방'에서 체험한 지역 문화의 힘, 그리고 합정의 '문학살롱 초고'에서 느낀 문학적 표현이 조화롭게 녹아든 공간을 그려본다.
여기에 우리 가족의 세월이 켜켜이 쌓인 이야기와, 따스한 기억의 온기를 더하고 싶다. 책과 사람, 그리고 시간이 서로의 손을 잡고 춤추는 특별한 공간을 만들고 싶다. 언젠가 상상이 현실의 문을 두드릴 때, 나는 설렘 가득한 마음으로 그 문을 열어젖힐 것이다.
책은 사춘기의 혼란 속에서 나를 위로해 주었고, 죽음의 그림자 앞에서는 살아갈 용기를 주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나는 외로움의 본질을 들여다보고, 삶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며 사랑의 깊이를 가늠할 수 있었다.
독서는 내 안의 작은 씨앗을 키워, 글쓰기라는 꽃을 피워냈고 혼자만의 정원에서 벗어나 독서모임이라는 숲으로 나아가게 했다. 그리고 이제 나의 책방이라는 열매를 맺고 꿈꾸게 하고 있다.
책은 내 세계의 지평을 넓혀주었고 타인의 마음으로 가는 다리를 놓아주었다. 나에게 책은 더 나은 '나'를 만드는 도구이자, 더 풍요로운 삶으로 이끄는 이정표가 되어주었다.
취미의 쓸모 : 3부 독서편 끝.
+마지막 이야기, 취미가 준 의미를 되새기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