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동나동 May 23. 2022

무덤이 대체 뭐라고

7살, 봄에 서울로 이사 왔다. 다니던 유치원을 그만뒀다. 농사짓는 것 말고는 특별한 재주가 없던 엄마와 아빠, 인간관계도 그다지 믿을 만한 사람이 별로 없던 엄마와 아빠. 우리들의 서울살이는 고단했다. 가게 주인은 철물점이 큰돈은 안 돼도 별 기술 없이 그냥 할만하다고 했단다.    


재래시장은 언제나 북적거렸다. 생산적인 활기만은 아니었다. 늘 어디선가 다투었고, 누군가는 사기를 당했으며, 항상 소문이 무성했다. 욕망이 꿈틀거리는 그곳에서 엄마와 아빠는 늘 주눅이 들어 보였다. 엄마와 아빠는 빨리 늙었다. 나와는 삶의 방식도, 사고방식도 너무 다른 부모였지만 그들을 외면할 수 없었던 건 어릴 적 유난히 불안해 보였던 그들의 얼굴이 떠올라서다. 얼마나 무서웠을까? 그 시간들을 의지할 곳 없이 견뎌내는 일이. 더구나 둘 끼리도 서로 크게 의지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당신들의 고단했던 삶을 안아주지 못해 미안하다. 그러기엔 난 너무 어려서 아무것도 몰랐다. 


그렇게 엄마는 할머니가 되었다. 아빠는 할아버지가 되었다. 

엄마는 병든 할머니가 되었다. 할머니가 되기 전부터 이미 침대 신세를 면치 못하는 환자가 되었다. 

아빠는 그런 엄마를 병시중 드는 일이 죽기보다 싫었나 보다. 아픈 엄마를 보면서도 화를 자주 냈다. 엄마가 쓰러진지도 23년이 되어간다. 


아빠는 무덤이 제일 중요했다. 


가끔 명절 때 사촌 형들이 놀러 왔다. 혼자 오기도 했고, 대개는 가족과 함께 왔다. 그때마다 아빠는 무덤 이야기를 했다. 자기가 묻힐 곳이 어디라고 거듭거듭 위치를 확인시켰다. 가끔은 아빠가 고향에 직접 다녀오는 일도 있었는데 그때도 늘 빠지지 않는 퍼포먼스는 종산에 들러 자신이 묻힐 곳을 확인, 또 확인하고 오는 일이었다. 종산에 묻힐 당사자나, 누군가를 그곳에 묻어야 할 사람들에게 보내는 메시지였다. 내가 누울 곳은 이곳이라고. 


그러다 사달이 났다. 큰아버지가 먼저 돌아가셨고 마침 아빠가 봐 두던 자리에 묏자리를 쓰고 싶었으나, 아빠가 장지까지 따라가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문제는 아빠가 봐 두던 그 자리가 큰 아버지보다 지리적으로 더 위쪽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큰어머니가 이건 경우에 없는 일이라고 말했고, 그 말을 신호로 사촌 형들이 더 이상 찾아오지 않았다. 


아빠는 아빠대로, 큰집은 큰집대로 서로 자존심을 굽히지 않았다. 아빠는 가끔 나에게 "이번 명절에도 사촌 형들에게서 연락이 없었는지"를 물었다. 나는 친척들에게 먼저 연락하지 않는다. 내 성정을 잘 아는 친척들도 어지간해서는 나에게 먼저 연락하지 않는다. 사촌 형들이 나에게 연락을 한다는 것은 아빠의 동향을 살핀다는 뜻이다. 그런데 큰집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큰집이 제시한 유일한 화해책은 그나마 아빠가 죽은 후에 큰아버지와 같은 높이에 묻히는 것이었다. 


이 소리 없는 다툼을 지켜보는 나는 어이가 없었다. 어디에 묻히는지가 뭐 그리 중요해서 평생 유지해왔던 관계를 끊는 걸까? 딱하기도 하고, 한심하기도 했다. 이럴 때마다 나는 그냥 관심을 끊고 평가를 멈춘다. 저들이 살았던 세계는 내 세계와 너무도 다르다. 나에게 죽은 후의 세계 같은 것은 아무래도 의미가 없었다. 집안 내에서 나의 위치와 체통 같은 것도 도통 의미가 없었다. 이미 와해되어버린 저 환영의 공동체에서 무덤 위치 같은 게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명절 때마다 형들에게 연락 없었냐고 간을 보면서도 절대 형들에게 먼저 연락은 하지 않는 아빠, 그러면서도 한편 그들과의 관계 개선을 그리워하는 아빠, 하지만 타협책은 받아들일 맘이 없는 아빠, 그리고 그에 못지않게 고집을 꺽지 않는 큰집의 구성원들. 


헛되고, 헛되고, 헛되다. 


정말 대단하다. 


매번 나에게 메신저 역할을 요구하거나, 자신의 올바름을 강요하는 아빠가 너무 딱해서 성인이 되고 처음으로 고향에 같이 간 적이 있었다. 나는 스무 살 이후로 고향에 가지 않았다. 어릴 적에는 엄마, 아빠가 고향에 두고 온 채권자들 때문에 우리가 고향에 가는 걸 막았다. 그리고 우리는 너무 어릴 때 서울로 이사와 고향 같은 것은 별 의미가 없었다. 그러던 내가 큰 결심을 한 것이다. 죽이 되든, 밥이 되는 형들을 만나기로 한 것이다. 그래서 관계가 끝났음을 선포하든, 중간에서 해법을 찾든 결론을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처음으로 아빠가 그렇게 늘 말하던 종산엘 다녀왔다. 그냥 너무나 평범한 뒷동산이었다. 아빠는 자기가 봐 둔 자리가 어쩌고 저쩌고 한참을 이야기하는데 아이고 아빠야 조금 위에 묻히고 말고, 좋은 위치에 묻히고 말고 뭐 중요하다고 그 오랜 관계마저 끊었나? 좋은 위치라는 것도 내 눈에 대체 뭐가 좋다는 건지도 모르겠고. 


내려오는 길에 큰집엘 들렀다. 마당 댓돌 위엔 다양한 크기의 신발이 놓여 있었다. 사촌 형들이 가족을 끌고 큰어머니를 보러 내려온 게 분명했다. 아빠는 주저주저했다. 내가 대신 소리 내 사람을 찾았다.


"아무도 없어요?"


사람이 있는 게 분명한데 몇 번을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아빠는 돌아가자고 했다. 담벼락을 돌아서는데 안에서 수군수군 소리가 났다. 나는 이렇게까지 와서 그냥 돌아갈 수 없었다. 이때다 싶어 다시 소리를 질렀다. 안에 사람 있는 거 아니까 나와 보시라고. 머쓱해하며 문을 여는 사람들. 


그렇게 어렵게 대화가 시작됐다. 서로 평소 하던 똑같은 이야기만 반복했다. 나는 둘 중 하나를 명확히 하라고 서로에게 말했다. 관계를 끊던가, 서로 합의 가능한 자리배치를 찾던가.


결국 아빠는 형들에게 졌다. 아마도 관계를 복원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런데도 형들은 다시 연락을 해오지 않았다. 


아무리 불러도 대답 없던 그 집의 공기, 일시적으로 사람 없음을 연기했던 그 모의의 순간이 떠오를 때면 소름이 돋는다. 이런 게 정말 사람 좋고, 점잖고, 예의 바르다던 소리를 듣는 사람들이 연출해내는 살풍경인가. 당신들에게 질려버렸다. 대체 당신들은 평생을 하하호호 웃으며, 명절 때마다 술잔을 기울이고 덕담을 나누며 무슨 가치를 공유하고 살았던 건가. 


헛되고, 헛되고, 헛되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만의 곡소리는 무엇일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