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지 않아도 괜찮아!
그날은 사회로 다시 돌아가기 위한 3년 만의 면접이 있던 날이다. 새근새근 잠든 아이 품을 몰래 빠져나와 간신히 씻고 화장을 마쳤다. 아이가 꼼지락거릴 때마다 행여 깨어날지 몰라 엄지발가락에만 잔뜩 힘을 주고 살푼살푼 걸어 다녔다. 외줄 타기를 하듯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경찰 특공대보다 민첩하고 빠른 행동으로 무사히 고비를 넘긴 후 현관문 앞에 섰다. 신발에 발을 끼워 넣으며 남편에게 신신당부하자, 전날 읊어대던 이야기를 또 한다며 볼멘소리 해대는 남편. 시간 없으니 빨리 나가야 한다고 등을 떠밀었지만 왠지 모를 불안감에 발걸음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는다. 집 안을 찬찬히 둘러보는데 갑자기 벌떡 일어난 아이와 눈이 딱 마주쳤다. 아뿔싸! “엄마 갔다 올게”뒷감당은 남편의 몫이라 여기며, 일방적인 인사를 마치고 문밖으로 튀어나왔다.
어렵사리 도착한 미용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쿵쾅거리는 음악 소리와 코끝에 닿는 샴푸 향기에 순간 황홀함을 느꼈다. 이게 얼마 만에 맡아보는 냄새란 말인가. 잠시 그 공기에 취해 있다가 점원의 안내로 자리에 앉았다. 기다란 거울에 비친 모습. 듬성듬성 빠져버린 앞머리, 희끗희끗 올라온 새치, 힘없이 쭉 늘어진 긴 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그간의 고생을 증명이라도 하듯 초라한 내 모습과 정면으로 마주했다. 갑자기 조바심이 났고, 나는 서둘러 달라지고 싶었다. 그런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하듯, 디자이너가 다가와서 변신할 포인트를 조목조목 짚어주었다. 그 야무진 손길에 신임하는 눈빛을 연신 쏘아대며 대대적인 작업에 들어갔다. 새하얀 새치는 갈색 옷으로 갈아입었고, 늘어진 머리카락은 생기를 불어넣듯 탱글탱글한 곡선이 완성되었다. 양손으로 거울 손잡이를 들고 왼쪽, 오른쪽, 뒤통수 머리 모양까지 꼼꼼히 살펴보고선 이내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다시 비춰본 거울 속 내 모습은 덕지덕지 붙어있던 초라함 딱지가 말끔히 떨어졌고 예전처럼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기쁨에 젖어있던 순간 중요한 일이 번쩍 떠올랐다. 이럴 때가 아니지. 촉박한 시간을 확인하고서 면접 시간에 늦을세라 힐을 신은 발가락에 힘을 꽉 주고 잰걸음으로 뛰어나갔다.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던 중에 도저히 외면할 수 없는 청량한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하늘은 마치 바다인 양 에메랄드 빛깔을 띠며 구름 한 점 없이 반짝이고 있었다. 살랑이듯 스치는 바람도 두 볼과 머리카락을 산뜻하게 적셨다. 하늘도 바람도 기분 좋게 맑은 빛깔을 뽐내던 날, 온 우주의 기운으로 반드시 붙을 거라는 확신이 내 몸을 타고 번지는 듯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후두두 두둑!!
순식간에 머리와 어깨 위로 끈적이는 액체가 떨어졌다. 순간, 머릿속에 물음표가 가득해졌다. 판단이 불가한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이내 구린 향기가 코끝에 닿았고, 물음표는 순식간에 느낌표로 뒤바뀌어버렸다. 설마... 설마가 사람을 잡는 날도 있었다.
살아가면서 새똥을 맞을 확률이 얼마나 될까. 매우 희박한 확률일 것이다. 오죽하면 새똥을 맞으면 복권을 사야 한다는 말이 생겼을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복권을 사볼까도 잠시 고민했던 것 같다. ‘젠장... 오늘은 뭔가 억세게 운이 좋으려나 싶었건만. 새똥을 맞을 기우였나 보네.’ 속으로 신세 한탄을 하면서 곧장 집으로 뛰어 들어갔다. 어쨌든지 일과를 무사히 마쳐야만 했고, 주어진 시간 안에 모든 것을 잘 마무리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다시 돌아온 내 모습에 남편과 아이는 어안이 벙벙했다. 달라진 머리 모양에 대해 놀라움과 새똥을 맞은 몰골에 기가 막힌 듯했다. 애석하게도 마주 앉아 이렇고 저렇고를 이야기할 시간은 없었다. 우선 새똥이 내려앉은 몸의 일부를 씻었고, 새 옷으로 갈아입은 후 황급히 미용실로 달려갔다. 디자이너께 믿을 수 없는 전후 사정을 토로하여 간신히 드라이를 마쳤고, 나는 급하게 면접을 보러 갔다. 택시 안에서 1분 1초의 사투를 벌인 끝에 드디어 면접장에 도착했다. 다행이었던 건, 안달복달했던 마음에 비해 약속 시간에는 10분 정도만 늦었다. 그간에 있었던 어마어마한 일들을 떠올리면, 상대적으로 양호한 지각을 한 편이었다. 이쯤 되니 조급함보다는 에라 모르겠다 싶은 심정으로 비장하게 회사 문을 열고 들어갔다.
최대한 화사한 미소를 뿜으며 “죄송합니다. 늦었습니다.”라고 인사를 건네자, 면접을 안내하는 직원이 의외로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괜찮아요. 대표님께서 급하게 미팅 중이시라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어요.”하는 것이었다. ‘휴... 다행이다.’ 잠시 옅은 숨을 몰아쉬고선, 직원이 건네준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넘기며 타던 속을 진정시켰다. 5분 정도의 대기 시간이 주어졌고, 면접장 안으로 들어서자 친근하게 인사를 건네는 대표님이 계셨다. 늦은 건 나인데, 갑자기 잡힌 미팅으로 대기하게 된 것을 더 미안하게 여기는 듯했다. 나는 마음에 여유가 생겼고, 나에게 주어진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여유 있는 시선을 가진 사람. 그의 앞에서 오늘 있었던 이야기를 조곤조곤 풀었다. 그리고 이 이야기가 재미있었는지 면접 자리가 꽤 유쾌하게 흘러갔다. 그리고 일주일 뒤 새똥을 맞은 경험은 나에게 복권 당첨 대신 합격 통보를 안겨주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을까. 모든 게 다 좋았던 행복한 날에 갑자기 찾아온 불청객으로 인해 피해를 본 상황. 신기하게도 나와 같은 똑같은 상황을 맞닥뜨린 토끼 이야기를 만날 수 있었다. <<다시, 좋아질 거야>> 그림책의 표지에는 주인공 토끼가 등장한다. 노란 꽃 한 송이를 손에 들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걸어가고 있다. 햇살이 반짝반짝, 바람은 살랑살랑, 꽃향기가 솔솔, 참 기분 좋은 날 토끼는 향긋한 꽃향기를 친구와 함께 나누고 싶어서 길을 나선다. 그런데 느닷없이 하늘에서 새똥이 뚝. 그 좋던 기분은 온데간데없고, 토끼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햇살이 반짝반짝. 바람이 살랑살랑. 기분이 참 좋아
갑자기 하늘에서 새똥이 툭! 이 바보, 똥개야!
화가 나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어.”
어느 날 느닷없이 머리에 새똥을 맞으면서 시작된 토끼의 불행은 친구와의 단절, 개떼들의 출현, 무시무시한 물고기의 공격으로 계속된다. 그러면서 토끼는 세상에 홀로 남겨진 듯한 극한의 외로움과 두려움을 경험하게 된다. 결코 끝날 것 같지 않던 토끼의 불행은 상상하지도 못했던 곳에서 그 끝을 맞이하게 된다. 토끼는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와서 생각하게 된다. 결코 혼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언제든 다시 좋아질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다시 햇살이 반짝반짝. 바람이 살랑살랑. 옷도 바짝 말랐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말이야.”
인생에서 괜찮지 않은 날들도 분명히 있다. 괜찮지 않은 순간에는 괜찮지 않아도 된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도 있듯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시간은 상처를 낫게 하고 힘든 감정을 옅어지게 해 줄 것이다. 하지만 괜찮아질 때까지의 시간이 너무 길어서 충분히 행복할 수 있는 날들까지도 그렇지 못하다면, 그런 시간은 삶의 아까운 날들이 된다. 그럴 땐 괜찮아질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미리 괜찮아져 보면 어떨까. 불청객이 찾아왔을 때는 잊지 말아야 한다. 잠시 머물고 가는 손님이라는 걸.
✅ 그림책 정보 <다시, 좋아질 거야!>
✍️ 홍찬주 글. 그림 / 북멘토
햇살이 반짝반짝, 바람은 살랑살랑, 꽃향기가 솔솔, 참 기분 좋은 날이다. 토끼는 향긋한 꽃향기를 친구와 함께 나누고 싶어서 길을 나선다. 그런데 느닷없이 하늘에서 새똥이 뚝. 그 좋던 기분은 온데간데없고, 토끼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새똥으로 시작으로 꼬리에 꼬리를 무는 나쁜 일들이 생겨나고, 토끼는 어떻게 이 위기에서 헤어날 수 있을까?
✅ 함께 보면 좋은 그림책 <어스름 나라에서>
✍️ 아스트리드 린드 그렌 글. 마리트퇴른크비스트 그림 / 창비
다리가 아파서 걷지 못하는 나는 온종일 침대에 누워서 지낸다. 하지만 해가 지기 시작하면 백합 줄기 아저씨가 내 방으로 찾아온다. 아저씨는 똑똑 창문을 두드리고 들어와 나를 어스름 나라로 데려간다. 나는 버스를 신나게 운전하고, 나무에 열린 달콤한 사탕을 따 먹고, 커다란 사슴과 이야기하고, 아름다운 궁전에서 왕과 왕비를 만난다. 어스름 나라에서는 다리가 아픈 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나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