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나는 '자연스러움'이었다.
12월 둘째 주 일요일이었다.
청소하다 말고,
앞 베란다에 비친 나무를 바라보며 깜짝 놀랐다.
'지금은 분명 겨울인데 이게 무슨 일이람.'
놀란 것도 잠시,
작년 이맘때를 떠올려보니 그때도 이랬던 것 같다.
가을을 한창 만끽하려 들 땐 빈약한 물들음에 갈증을 느끼게 하더니만, 다 포기하고 돌아서던 순간에 이렇듯 화려한 컬러를 뽐내는 나무였다. 앞 베란다에 있던 녀석만 청개구리인가 했더니만, 식탁 방향으로 자리 잡은 나무 역시도 울긋불긋 화려한 물들음을 과시하고 있었다.
우리 집에서 바라보는 나무들은 매년 한 템포씩 늦게 물들곤 했다. 쌀쌀한 계절 겨울이 되어서야 겨우 늦잠에서 깨어나, 가을 내내 미뤄두었던 숙제인 나뭇잎 염색을 끝내곤 했으니... 어딘지 모르게 집주인의 삶과 닮은 구석이 있는 건가 싶기도 했다.
이왕 늦게 물든 거, 예쁨이 길게 유지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부터 잠들기 전까지 틈틈이 바라보았다. 하지만 풍성했던 잎은 하루가 다르게 수가 줄어들었고, 휘리릭 맥없이 떨어진 잎들은 있어야 할 곳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가장 낮은 밑바닥에 풍성하게 깔려있었다.
아름다움을 늦게 뽐낸 만큼, 더 오랫동안 아름다웠으면 하는 나의 기대를 고작 일주일 만에 저버린 나무였다. 물든 지 딱 일주일째 되는 오늘, 끝끝내 앙상한 가지만 남겨둔 채 화려한 멋을 전부 잃어버리고 말았다.
가장 예쁘게 물든 시간이 고작 일주일이라니.
하루아침에 다 떨어져 버린 낙엽을 보며,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순식간에 지나버리는 세상 이치에 씁쓸함을 감출 길이 없었다. 이것은 비단 나무뿐만이 아닐 터. 꿈꾸는 삶과 아름다운 순간. 그런 것들은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지만, 올해의 나는 여전히 그런 순간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잠깐의 예쁨을 뽐낸 후 그것을 몽땅 날려버린 집 앞의 나무를 바라보자, 만 가지 상념에 잠겨버린 나였다. 한참 뒤 다시 고개를 들어 측은한 마음으로 나무를 바라보는데 갑자기 이런 생각도 든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아름다움이 끝난 것은 아니잖아.
다시 펼쳐지는 아름다운 순간.
그 순간으로 가는 모든 과정에서 뿜어내는 자연미.
나는 여전히 아름다운 순간을 꿈꾸며 살아가려 하지만, 상상했던 아름다운 순간은 어쩐지 예전과는 살짝 다른 느낌이다. 또다시 나무에 빚대 표현하자면, 예전에는 울긋불긋 화려하게 물든 순간만이 아름다운 것이라 여겨왔던 것 같다. 하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아름다움에 대한 기준이 달라지고 있음을 느낀다.
누가 봐도 입이 떡 벌어지는 화려한 물들음 만이 아름다움은 아니지. 꽃의 탄성이 터져 나오기 직전의 아슬아슬한 봉긋함, 내리쬐는 태양볕 아래 푸르른 반짝임, 가지마다 맺힌 하얗고 포슬포슬한 차가움... 나무는 가장 아름다운 순간으로 가는 모든 과정에서 자연미(美)를 한껏 뽐내왔던 것이다.
이제부턴 자연스러움으로 거듭나는 거야.
요즘 말로 꾸안꾸 스타일 말이지.
나무를 보며 또 한 번 느낀다. 찰나의 아름다움을 만끽하기 위해, 나는 여전히 아름다운 순간을 꿈꾸며 살아가지만, 내가 꿈꾸는 아름다움은 결과가 아닌 과정에 더 집중되어 있다. 서둘러 아름다워지기 위해 억지로 잘하려 들지 않는다. 조금 느리더라도 마침내 아름다울 그때를 기다리며, 억측스럽기보다 자연스러운 걸음을 추구한다.
어차피 바닥으로 떨어질 낙엽이라면, 내게 벌어지는 일들을 하나하나 음미하며 자연스럽게 흘러가도 좋지 아니한가. 반드시 물들어야 한다는 의무에 얽매이지 않고, 울긋불긋 덕지덕지 붙어있는 치장에 가져지지 않는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싶다. 요즘 흔히 말하는 '꾸안꾸'(꾸민 듯 안 꾸민 듯한 느낌) 스타일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올해 나를 표현하는 단어는
natural '자연스러움'인 것 같다.
꾸안꾸 느낌의 자연스러움을 추구해서 그런가. 이 가치관이 글쓰기에도 반영되어, '어떻게 하면 더 잘 쓸까. 메인에 노출시킬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한 글보다는 되도록 진솔한 글을 쓰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억지로 잘하려 들지 않고,
할 수 있는 것을 그저 묵묵히 하는 것.
다소 느리지만 내게 벌어지는 일들을
하나하나 천천히 음미하며 글을 쓰는 것.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꾸안꾸 글쓰기이다.
(가끔은 꾸가 없고 안꾸만 있어서 문제지만)
아마 내년에도,
나는 이런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며 살아갈 것 같다.
글쓰기로 우주정복을 꿈꾸는 브런치 작가들이 모여 팀라이트가 되었습니다. 팀라이트 매거진에는 매월 한 가지 주제를 선정하여 각양각색 이야기를 작가들의 다른 시선과 색깔로 담아 갑니다. 이번 달 주제는 <나를 표현하는 단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