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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글향 Jan 25. 2024

글자로 그리는 풍경

송정 바다, 해변열차, 달맞이 고개로 이어지는 산책 코스


"또 거기야?"


사실 몇 번이나 싫다고 했다. 모처럼 여유로운 날, 시간도 공간도 아무 제약 없이 훌훌 떠날 수 있는 하루인데, 남편은 전혀 새롭지도 않고 너무 익숙해서 지겨운 그 길을 또 걷자고 한다.


다른 곳을 생각해 보자고 반박했으나 이내 침묵했다.


하루를 보낼 방안에 있어 대전제는 건강을 위한 운동이었다. 소화불량을 달고 살기에 숨쉬기 운동 다음으로 좋아하는 걷기 운동을 틈틈이 했고, 이날도 나에게 주어진 하루를 건강하게 보내야겠다는 의지가 있었다. 그렇게 운동하겠다는 전제를 깔면서 멋들어진 드라이브 코스를 생각하는 것도 모순적이고, 그만한 거리와 뷰를 대처할 적당한 장소를 찾지 못했다. 이곳저곳을 검색해 보다가 결국 지겨운 그 길을 또 걷기로 한다.


주섬주섬 옷가지를 챙겨 입으며 갈까 말까. 신발에 발을 꾹 넣으며 갈까 말까. 현관문 손잡이를 밀며 갈까 말까... 그렇게 밖으로 어물쩍 나와버린 몸뚱이를 한탄하며 어려운 걸음을 뗀다.

   

차를 두고 대중교통을 이용할라치면 가는 길도 쉽지 않다. 한번 보내고 나면 뜸적한 경전철이기에 시간 계산을 했음에도 행여 놓쳐버릴까 발걸음을 재촉하게 된다. 전철 안에서는 몰려드는 인파에 이리저리 치이다가 겨우 안전한 구석에 자리할라치면 어느새 도착해 있다.


경전철에서 내리면 사람의 손길과 발길이 닿지 않아 가꿔지지 않은 음산한 길을 따라 10분가량 걷는다. 관광객들은 알지 못하는 송정 바다로 가는 지름길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질서 있게 고정된 고기잡이 배와 빨간 등대, 그리고 새파란 하늘과 맞닿은 바다를 만날 수 있다.    

이 풍경이 눈에 들어오면, 이제부터 본격적인 걸음이 시작됨을 알아차린다. 익숙한 산책코스를 따라 분주히 몸을 움직여 앞으로 나아간다.




송정 바닷길



바다가 고요한 시간.

사람들로 붐비지 않는 평일, 중천에 떠 있던 해가 점점 아래로 내려올 무렵이다. 이 시간에 모래사장을 거닐면 파도 소리를 BGM 삼아 손이 닳을 것 같은 위치에 떠 있는 황금빛 태양, 그리고 젖은 모래 위를 통통거리며 몰려다니는 갈매기를 만날 수 있다. 특히 갈매기들의 복작복작한 움직임을 바라보면 나도 모르게 배시시 웃게 된다. 별거 아닌 것들이 주는 사소한 기쁨이다.




해변열차길



송정 바닷길을 따라 걷다가 철로가 보이면 옆길로 샌다. 길게 이어진 철는 부산 관광지로 나름 핫한 해변 열차길이며, 이 철는 해운대까지 쭉 연결되어 있다. 관광객이었다면 해변열차를 타볼 법한데, 우리는 현지인들이라 탑승보다는 옆길을 따라 걷기를 택한다.

'정지' 표지판을 마주할 때면, 한 번 쉬어가면 좋다. 걷기도 생각도 인생도. 이 표지판은 나에게 펼쳐진 모든 길을 점검해 볼 시간임을 알려주는 것만 같다. 오늘도 그만두지 못하고 계속해야 하는 것들을 떠올리며, 아주 잠깐이지만 멈추어 서서 이곳에 머물러본다. 그리고 다시 또 느리게 발걸음을 옮긴다.


한 걸음 한 걸음 음미하며 걷던 내 뒷모습을 사연 있어 보인다며 남편이 몰래 기록했다. 때마침 타이밍 좋게 열차가 지나가고, 번쩍번쩍 열차 창문을 햇살이 훑고 지나가는 풍경은 꽤 근사해 보인다.  


 


달맞이 고개



원래는 해변열차 길을 따라 쭉 걸어가면 부산에서 가장 높은 아파트 엘시티가 나온다. 하지만 현재 공사 중인 관계로 '청사포'라는 역에 당도하면 방향을 틀어야 한다. 덕분에 달맞이 고개로 가는 산책코스로 접어들 수 있다. 말 그대로 달을 맞이하는 고갯길. 이곳을 걷다 보면 산속에서 바라보는 바다 절경이 합을 이루어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다. 더 좋은 표현을 찾지 못한 것이 그저 안타까울 뿐.


내가 이 고개를 좋아하는 이유가 또 있다. 1월의 새해를 맞이할 때면 대게는 새롭게 떠오르는 태양에 주목하기 마련인데, 이곳은 나로 하여금 저물어가는 태양을 넋 놓고 바라보게 한다. 뜨는 태양 못지않게 지는 태양도 뜨겁게 활활 타들어 간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처럼.  


태양 앞에 서있는 이 순간,

익히 알고 있었던 세상 이치를 다시금 떠올려본다.  

언제나 소중한 것들은 가까이 있다는 말.

가까운 곳에 이렇듯 훌륭한 산책 코스를 두고, 지겹다는 표현을 뱉었던 것에 대해 반성한다.


늘상 바라보았던 산과 바다, 해변열차, 저무는 태양...

이맘때쯤이면 떠오르는 풍경들을 글로 그려보니 더없이 소중한 것들이었다.





글쓰기로 우주정복을 꿈꾸는 브런치 작가들이 모여 팀라이트가 되었습니다. 팀라이트 매거진에는 매월 한 가지 주제를 선정하여 각양각색 이야기를 작가들의 다른 시선과 색깔로 담아 갑니다. 이번 달 주제는 <이맘때쯤 떠오르는 풍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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