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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철원 Nov 01. 2019

대한민국 공직사회의 특징 I

9급은 정말 여섯 시에 퇴근하는가

정치인들이 현장을 방문한 사진이 신문 기사에 등장할 때가 있다. 신문 기사에 등장할 만한 정치인이라면 대통령, 장관, 국회의원, 지방자치단체장 정도의 지위를 갖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활짝 웃고 있는 사진이 있다면, 이들을 수행하는 사람들의 표정을 살펴보라.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자신이 수행하는 보스가 활짝 웃으면, 수행원들도 활짝 웃는 경우가 많다.


한국 직장문화의 수직성·경직성·폭력성을 다루면서 직장 민주주의가 이 시대에 필요함을 역설한 ‘민주주의는 회사 문 앞에서 멈춘다’*1라는 책이 있다. 저자는 ‘여직원이 억지로 웃지 않는 것’, 그것이 자신이 생각하는 직장 민주주의라고 말한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런데 하급자가 상급자를 모시는 과정에서 억지 웃음보다 더 진일보된 현상이, 한국의 직장 현실에서는 종종 발생하곤 한다.


앞서 언급한, 보스가 웃을 때 짓게 되는 하급자의 웃음은 억지 웃음이 아니다. 이는 억지로 웃는 것을 넘어, 상급자와 심리 공동체를 이룬, 의전 또는 생존의 높은 경지에 오른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나 역시 일찍이 그 경지에 올랐다. 상급자가 웃으면 왜 내가 기쁠까. 상급자의 기분은 하급자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상급자가 기분이 좋으면 하급자인 내게 안 좋은 일이 발생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줄어든다. 따라서 상급자의 기분이 좋을 때 내 기분도 함께 좋아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한편으로는, 나의 고유한 심리가 상급자와 일치될 정도로 직장에 몰입되어 있는 모습에 씁쓸함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단적인 예일 뿐이다. 이제 대한민국 공직사회의 특성을 살펴보자.





최고 의사결정권자에게 집중된 권한

정부 조직의 장은 해당 조직에 있어 의사결정, 정책결정, 예산 편성과 집행, 재무와 회계, 그리고 인사와 조직에 관한 권한을 갖는다. 업무 범위가 폭넓으면서도, 결정 권한은 장에게 집중되어 있다.


지방정부의 행정을 맡아 일하는 지방자치단체장―특별시장, 광역시장, 도지사, 특별자치시장, 특별자치도지사, 시장, 군수, 구청장―의 예를 들어보자. 이들은 해당 지방자치단체의 지방세 부과와 징수, 예산의 편성과 집행, 주민 복지, 청소와 폐기물 수거, 상․하수도 관리, 도로 관리, 지역개발․도시계획․건축에 관한 허가, 산하 공기업 관리, 그리고 전 조직원의 인사 권한을 갖는다. 실로 막강한 권력이다. 특히 모든 조직원의 인사―승진, 징계, 전보(轉補)―에 미치는 단체장의 막강한 영향력은 단체장의 지위를 조직의 정점에 올려놓는다.


원래 단체장은 지방정부 조직의 정점에 있는 것이 맞는 것이지만, 하급자들이 자신들의 인사상 이익을 위해 밑에서 지나치게 떠받들다 보니, 이상한 일이 많이 발생한다. 1995년 한국에서 지방자치가 시작된 이후 20년 동안 선출된 민선 단체장 1,230명 중 102명이 형사처벌로 물러났다.*2


내가 몸담고 있는 서울 자치구의 예를 들어보자. 자치구의 최고 의사결정권자는 구청장이다. 구청장 휘하에 있는 간부들의 대다수는 구청장의 지시에 따라 최선을 다해 일한다. 웬만해서는 토를 달지 않는다. 구청장의 비효율적인 지시에 소신 있게 반대 의견을 내는 사람은 그 자리를 지키기 어렵다. 빛의 속도로 다음 인사에서 좌천(左遷)된다. 의도적으로 쓴소리를 하는 참모를 곁에 둔 지도자의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중국 역사에서 당 태종이 그렇게 위징이라는 충신을 곁에 두었다. 아직 보고 들은 것이 많지 않아서일 수도 있겠지만, 스스로의 마음을 다잡기 위해 일부러 쓴소리를 하는 간부를 자신의 측근에 두고 행정 업무를 한다는 구청장 이야기를 들어 본 일이 아직은 없다. 짧은 4년―길게는 8년, 12년―이라는 임기 동안 말 잘 듣는 사람들로만 팀을 이뤄도 일이 될까 말까인데, 반대 의견을 내는 사람을 팀 구성원으로 영입해서 일을 하는 것이 부담스러울 수도 있을 것이다.


정약용은 '목민심서(牧民心書)'에서 용인(用人), 즉 인재 활용과 그 과정에 있어서 수령을 견제․보좌하는 이들과 정사를 의논해야 함을 강조했다. 간부회의에 들어가 본 일이 많지 않아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재직 중에 견제, 합의, 양방향 의사소통, 반대 의견 청취…… 이런 민주주의의 미덕을, 구청장이 주재하는 회의에서 느껴 본 적은 없다.


구청장에게 사랑받고 예쁨 받기 위한 간부들의 노력은 그야말로 드라마틱하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척박한 환경에서 일궈 내는 성과는 자신을 돋보이게 한다고 믿으면서, 마른 수건을 쥐어짜는 방식으로 조직원들을 이끌었다. 누구를 비난하랴. 우리 하급자들 역시 간부들에게 싫은 소리 듣지 않기 위해, 인정받기 위해, 조직에 누가 되지 않기 위해, 튀지 않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해 왔다. 나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구청장과 간부가 이상한 일을 시켜도 무리해서 임무를 완수해 왔다. 잠 잘 시간, 가족과 함께할 시간, 자기계발과 취미에 투자할 시간을 줄여가면서, 그리고 건강을 잃어가면서 말이다.




수직적․경직적 조직문화

공직사회는 말 그대로 ‘계급제’다. 일반직 공무원은 1급부터 9급까지의 계급으로 구분되고(국가공무원법․지방공무원법 제4조), 직무를 수행할 때 소속 상관의 직무상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국가공무원법 제57조, 지방공무원법 제49조). 정부 조직은 명령과 복종 관계로 계층화된 계선조직(系線組織)이다. 계선조직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계선조직은 행정조직 단위의 장으로부터 국장, 과장, 계장, 계원에 이르는 명령․복종 관계를 가진 수직적인 조직형태로서 명령적․집행적 기능을 가지고 있다. 즉, 조직의 최고 책임자를 정점으로 하여 수직적 권한관계로 이어지는 집행조직으로서, 구체적인 집행과 명령권을 행사하고 조직의 전체적 집행과 명령권을 행사하고 조직의 전체적 집행에 대해 직접적인 책임을 지게 되며, 권한의 계열화 내지 등급화는 모든 조직 속에 간단(間斷)없이 이어지는 사다리꼴의 단계적 연속으로 나타난다.*3


명령, 복종, 최고 책임자, 정점, 수직적 권한관계, 집행, 등급……. 이따금 존댓말이 있을 뿐, 군대와 똑같다는 얘기다.


품의제(稟議制)라는 제도가 있다. 상관에게 여쭤보고 논의하는 제도라는 뜻이다. 담당자가 계획의 초안을 세우고―즉 기안(起案)하고―, 상관이 이를 승인하는 방식의 의사결정 제도이자 문서 생산 방식이다. 문서 생산도 정부는 계선, 즉 라인을 밟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서울 자치구의 경우, 모든 문서의 결재권자는 원칙적으로 구청장이다. 하지만 구청장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모든 문서를 검토하고 결재하는 일이 물리적으로 가능한 일이겠는가? 결국 구청장의 권한을 하부 조직에 위임하게 된다. ‘어떤 일을 어느 부서의 누구에게 위임해서 의사결정 권한을 행사하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공식적으로 자세히 규정하게 되는데, 이 규정이 ‘사무 위임 전결(專決) 규정’이다.


사안의 경중에 따라 결재권자가 달라진다. 동 주민센터에서 주민등록증 재발급, 전입신고, 주민등록표 등․초본 발급, 인감증명서 발급, 가족관계증명서 발급 등의 민원 창구 업무가 상관 보고를 거치지 않고, 담당자 처리로 끝나는 이유는 사무 위임 전결 규정에 이들 업무의 기안․전결권자가 6급 이하 업무 담당자로 지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동장이나 과장의 결재로 문서가 생산된다. 그보다 가벼운 사안은 팀장 전결로, 그보다 무거운 사안은 국장이나 부구청장 전결로, 가장 무거운 사안은 구청장 결재로 문서가 생산된다. 용도지역, 용도지구, 도시계획시설, 지구단위계획과 같은 도시계획 입안 업무가 이에 해당된다.


원칙적으로 정부 조직의 모든 일은, 일을 시작할 때는 계획서를 작성해야 하고, 일이 다 끝나면 보고서를 작성해야 한다. 역시나 마찬가지로 계선, 즉 라인에 따라 차례로 결재를 받아야 한다. 정형적인 일이든, 비정형적인 일이든, 대부분 상관의 결재를 받는다. 문서뿐만이 아니다. 휴가, 휴직, 전보, 행사, 특이한 민원, 나중에 말썽이 될 것만 같은 사안 등 업무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은 상관에게 구두로든 문서로든 보고해야 한다. 업무 공유라고 이해해도 좋다.


장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품의제에 대한 최근의 인식은 매우 부정적이다. 행정 조직과 절차는 복잡해졌고, 시민들의 요구는 다양한데, 윗사람들에게 보고하느라 시간을 다 잡아먹는다는 비판이 존재한다. 의사결정의 속도가 느리다는 말이다. 담당자, 중간 관리자, 최고의사결정권자 등 결재선에 이름을 올린 각 개인의 가치 판단이 다를 경우, 나중에 책임 소재의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한국의 수직적․경직적 조직문화와 결합함으로써 하급 실무자의 창의성과 업무 권한은 줄어들고, 상급자의 뜻대로 모든 결정이 이루어진다는 비판이 있다. ‘최악의 의사결정을 반복하는 한국의 관료들’이라는 부제를 붙인 '똑똑한 사람들의 멍청한 짓'이라는 책에서, 저자는 책 전체 분량의 1/4을 할애해서 이 제도를 맹렬하게 비판한다. 그 내용을 여기에 일부 소개한다.


품의제도야말로 우리 민족을 파멸로 이끌고 가는 가장 핵심적 장치의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 조직 내에서 의사결정 권한이 일부 사람들에게 집중되어 있고, 대부분의 구성원들 각자가 실질적이고 독자적인 의사결정 권한을 갖지 못하는 경우에 그 조직은 반드시 부패합니다. …… 서구인에게 의사결정이란 각 개인이 독립적으로 자신의 권한과 책임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결재받는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

교육부 차관을 만나기 위해 교육부 청사에 갔었습니다. 나이 든 공무원들 대여섯 명이 결재 서류판을 들고 장관실 앞에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장관에게 보고하고 결재를 받기 위해서였습니다. 관료들에게 일하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상관에게 결재를 받는 일입니다. 처리해야 할 업무의 권한과 책임이 하위직에 고유하게 배분되지 않은 채 거의 모든 업무가 윗사람에게 몰려 있기 때문입니다. …… 조직사회에서 권한이 상위층으로 집중되는 현상은 하위층의 자율성을 제거하여 창의력을 이끌어 내지 못하고 활기 없는 병든 조직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어떤 조직이든 권한이 한 사람에게 집중되면 그 조직은 반드시 부패하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권한의 적절한 분산을 통한 견제와 균형이 이루어졌을 때 비로소 조직 구성원들이 독립적인 인격체로서 홀로서기를 할 수 있습니다.*4


시간이 흐를수록 부정적 인식이 강해지고 있는 현실에 비해, 품의제를 혁신적으로 개선했다는 정부 조직의 소식을 들어 본 적은 없는 것 같다. 하급자와의 의견 충돌이 심각하다면 상관 입장에서는 자신이 직접 공문을 기안하면 그만이다. 자신이 직접 기안하고 자신이 책임을 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례는 거의 없다. 워낙에 긴 시간 동안 품의제가 정부 조직의 문서 생산 방식으로 이어져 왔기 때문일 것이다. 개인에게도 민간기업에게도 관성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인데, 하물며 정부 조직이야 오죽하랴.


휴가 가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자. 지방정부의 경우, 일반적으로 복무 조례에 휴가 규정이 있다. ‘소속 공무원으로부터 연가원의 제출이 있을 때에는 공무수행상 특별한 지장이 없으면 승인하여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휴가 규정이다. 여러분이 현실에서 밟아야 하는 휴가 프로세스는 대략 다음과 같다. 내가 없을 때 나 대신 일해 줄 동료 직원에게 먼저 말하고, 다음으로 서무주임, 팀장, 부서장(동장이나 과장)의 순서로 보고하는 것이다. 최근에는 휴가 간다고 할 때 눈치 주지 말자, 왜 휴가를 쓰는지 묻지 말자, 어디로 가는지 묻지 말자, 하는 바람직한 운동이 일반화되어서 큰 문제는 없다. 다만, 앞서 말한 것처럼 휴가 간다고 말하는 것 역시 품의제처럼 라인을 밟아 보고해야 할 정도로 이 조직은 매우 수직적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전 못하겠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 

서울 자치구에서 구청장은 왕이다. 다른 정부 조직에서 일한 적은 없지만, 아마도 서울특별시에서는 특별시장이 왕이고, 경기도에서는 도지사가 왕일 것이다. 자신은 왕이 아니라고 해도, 간부들과 직원들이 알아서 왕으로 떠받들어 준다. 남 얘기 할 것도 없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나 역시 그렇게 하고 있다. 구청장이 왕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그 누구도 구청장에게 ‘그건 안 됩니다.’라고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부에서 견제가 거의 없다.



과거에는 상사의 말이 부당하다 해도 가급적 상사의 말에 순응하는 것이 개인에게 이익이었다. 불이익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괴롭힘, 따돌림, 인격 모독, 승진 배제……. 은근하게 벌어지기도 했고, 대놓고 벌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시대가 변했다. 인터넷, 전자문서, 스마트폰, 카카오톡이 있는 현 시점에는 모든 정보가 개방되어 있어서 나중에 모든 일이 다 드러난다. 부당한 갑질이 세상에 많이 공개되었고, 노동자의 인권에 관심이 많은 시점이다. 이 책을 쓰고 있는 가운데, ‘직장 내 괴롭힘 금지’를 규정하는 근로기준법이 2019년 7월 16일 개정되어 시행되었다. 부당한 상사의 지시를 따르지 않는 것이 이제는 개인과 조직에 이익이 되는 분위기로, 사회가 변화하고 있다. 게다가 공직자에게 ‘청렴’은 언제나 당위적으로 추구해야 하는 덕목이다. 따라서 상관의 부당한 지시에 따라서는 안 된다. 이를 따르는 것은 사회의 건강을 해치는 행동일 뿐 아니라 여러분의 고용 안정성에 악영향을 미치는 행동이다.


문제는 정부 조직에 상명하복의 수직적․경직적 조직문화가 만연해 있다는 점이다. 분위기가 절대 복종인데, 나 혼자 “싫어요.” 하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지시가 부당하다고 판단했을 때 상관의 명령에 불복종하는 것은 적지 않은 ‘용기(勇氣)’를 필요로 한다. 있을지도 모를 불이익을 감수해야 한다. 수직적인 조직문화와 직장문화가 사회 전반을 휩싸고 있는 한국의 상황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뿐만 아니라 현실에서 상관의 지시가 부당한지 정당한지 하급자가 판단하는 일 역시 쉽지만은 않은 일이다.


다행스럽게도, 여러분이 신분 보장에 부담을 느낄 만한 수준으로 상관이 부당한 업무 지시를 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양심에 부끄럽지 않도록, 그리고 훗날 자신의 결정에 후회가 없도록 부당한 업무 지시를 거절할 수 있는 용기를 준비해 두는 것이, 이 조직에서는 필요할 것 같다. 부당한 업무 지시를 분별할 수 있는 능력도 키워 두는 것이 좋겠다. 여러분의 고용 안정성을 높이기 위해, 그리고 여러분의 상사와 여러분의 조직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러하다. 무엇보다 여러분의 양심을 저버리지 않기 위해, 그리고 건강한 사회에 기여하기 위해서 그러하다. 수직적․경직적 조직문화에 흔들리지 말고, 소신을 지켜 주길 바란다.




그런 일이 없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여러분의 신분을 흔들 정도로 무게감 있는 부당한 지시가 여러분에게 하달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이를 물리치고 싶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첫째, 상관의 눈을 바라보면서 그의 지시를 의문문 형식으로 분명하게 복창(復唱)하면 효과가 있을 것 같다. 가능하다면 그 사안을 공개된 장소에서, 뚜렷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구체적으로 표현한다면 더 효과적일 것이다.

“그러니까 찬성 의견서를 시민들로부터 한 장, 한 장 받는 게 아니라, 제가 임의로, 직접 만들어 내라는 말씀이세요? 공장에서 대량 생산하는 것처럼?”

“문서를 조작하라는 말씀이세요?”

“저 보고 가짜 사인을 하라고요?”

“서명을 위조하라는 말씀이신가요?”

하급자로부터 자신의 부당한 지시를 자신의 귀로 뚜렷하게 듣게 되면, 상사도 꺼리는 마음이 일어날 수 있다. “아니, 그렇게 말할 게 아니라…….”라면서 한 발 뒤로 물러서는 상사가 있을지언정 “어, 그래. 내 말이 딱 그 말이야. 내 지시를 정확하게 이해했어.”라고 말하는 상사는 아마 많지 않을 것이다. 상급자의 부당한 명령을 이런 방식으로 하급자가 구체적으로 제시하게 되면, 나중에라도 ‘나는 그런 지시를 한 적이 없다’는 변명을 하기가 어려워진다.*5 따라서 이 방법이 효과가 있을 것이다. 부당한 지시 복창에 이어서는 “팀장님은 하셨나요?” 같은 대사도 효과가 괜찮을 것 같다. 물론 팀장이 했다고 해서 따라 해선 안 된다.


둘째, 실무자의 이러한 대응에도 굴하지 않고 부당한 지시를 이어 가는 상관에게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 좋겠다. 낯설고 힘든 일이 되겠지만, 이 대사가 대답으로서 제일 좋은 것 같다.

“전 못하겠습니다.”

“공정한 직무수행에, 지장이 될 일인 것 같습니다.”


‘공정한 직무수행을 해치는 지시에 대한 처리’와 ‘위법한 회계관계행위 지시’에 대해 관계 법령은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공무원 행동강령 제4조 제1항: 공무원은 상급자가 자기 또는 타인의 부당한 이익을 위하여 공정한 직무수행을 현저하게 해치는 지시를 하였을 때에는 그 사유를 그 상급자에게 소명하고 지시에 따르지 아니하거나 제23조에 따라 지정된 공무원 행동강령에 관한 업무를 담당하는 공무원과 상담할 수 있다.

∙회계관계직원 등의 책임에 관한 법률 제8조 제2항: 회계관계직원은 상급자로부터 법령이나 그 밖의 관계 규정 및 예산에 정하여진 바를 위반하는 회계관계행위를 하도록 지시 또는 요구받은 경우에는 서면이나 이에 상당하는 방법으로 이유를 명시하여 그 회계관계행위를 할 수 없다는 뜻을 소속 기관의 장에게 표시하여야 한다.


3군(三軍)의 총지휘자인 대장군은 빼앗을 수 있으나, 일개 필부(匹夫)의 뜻은 빼앗을 수가 없다고 했다. ‘논어’에 나오는 말이다.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우리 같은 하급 공채생도 뜻을 세운다면 3군의 총지휘자보다 더 강해질 수 있다는 말이다. 멋지지 않은가.


부당한 지시 받는 일을 ‘예방’하고 싶다면, 입직 후 곧바로 여러분이 소속된 조직의 노동조합에 조합원으로 가입할 것을 권한다. 좋은 예방책이 될 것이다. ‘송곳’*6이라는 만화를 읽어 본 독자라면 왜 이렇게 이야기하는지 잘 알 것이다.




*1 우석훈. 2018. ‘민주주의는 회사 문 앞에서 멈춘다’. 한겨레출판사.

*2 한국경제. 2014. 지방개조가 먼저다. 강경민 기자. 6. 11. A13.

*3 서울대학교 교육연구소. 2011. ‘교육학용어사전’. 하우동설.

*4 최동석. 2014. ‘똑똑한 사람들의 멍청한 짓: 최악의 의사결정을 반복하는 한국의 관료들’. 21세기북스. pp.195-209.

*5 ‘나는 그런 지시를 한 적이 없다’라는 말은 부당한 업무 지시를 한 상관들이 훗날 문제가 발생했을 때 자주 하는 대사라는 사실도 이 기회에 알아 두자. 상사로부터 부당한 업무 지시를 ‘모호하게’ 받고서, 실무자가 ‘알아서 기어서’ 그 명령에 따른다면, 훗날 그 상사로부터 이 대사를 듣게 될 수 있다. “열심히 하라고 했지, 내가 언제 그렇게 규정을 어겨가면서까지 일을 하라고 했나.”

*6 최규석. 2017. ‘송곳’. 창비. 6권 완결. 2013년 12월부터 2017년 8월까지 네이버 웹툰에 연재되었던 웹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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