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궐은 임금과 신하들이 나랏일을 논의하는 국정 수행의 장이자, 왕실 일원의 생활공간이었다. 다수의 인원이 이용하고 거처하는 만큼 많은 전각들이 필요했으며, 동시에 국왕의 위엄도 적당히 드러내야 했다. 그러므로 허투루 지을 수 없었다. 궁궐에도 급이 있어서 으뜸이 되는 법궁(法宫)과 보조 역할을 하는 이궁(離宮)으로 나뉘었는데, 조선에서는 경복궁이 법궁 역할을 하였다. 따라서 경복궁은 여타 궁궐들보다 더 크고 웅장하게 지어졌다.
문제는 우리의 궁궐이 목조라는 것이다. 때문에 화재에 취약하다. 수많은 백성을 동원하여 어렵게 지은 궁궐인데, 불이나서 타버리면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다시 짓기 위해 백성들을 동원하는 일도 만만치 않지만, 그만한 목재를 구하기도 어렵다. 따라서 궁궐을 화마로부터 지키기 위한 여러가지 노력이 이루어졌다. 과학이 발달한 현대의 시각으로는 다소 유치할 수도 있겠으나, 이런 지식도 소소하게 알아둔다면 궁궐을 보는 재미가 더해질 것이다.
관악산의 화기를 차단하라
일설에는 한양 천도를 계획하는 과정에서 정도전과 무학대사 간의 의견 대립이 있었다 한다. 주된 문제는 새로운 궁궐의 배치를 남향(南向)으로 할 것이냐, 동향(東向)으로 할 것이냐였다. 정도전은 사대부였으므로 유교적인 예법에 충실한 남향을 주장했고, 무학대사는 풍수적인 이유를 들어 동향을 주장했다. 결국 정도전의 주장대로 남향으로 건설하는 안이 확정되었다. 그러나 관악산이 불기운을 머금고 있으니 이를 피해야 한다는 무학대사의 주장은 정도전에게도 상당히 골치였던 모양이다(사진1).
무학대사의 주장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현재 남아있는 흔적들을 통해 그가 관악산의 화기를 막기 위한 여러 조치를 취하였음을 알 수 있다. 흥선대원군 역시 고종대에 경복궁을 다시 지으면서 화마를 막기 위한 조치를 추가적으로 시행하였다.
사진1. 관악산의 모습. 봉우리가 뾰족뾰족 한게 불꽃이 타는 모양 같기도 하다.(출처 : 위키백과)
먼저, 관악산 정상에 물 웅덩이를 팠다고 전한다. 정도전이 실제로 이를 실행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고종 대 작성된 『경복궁영건일기』에 유사한 내용이 기록되어있다.
“패장을 관악산 상봉上峰으로 보냈다. 당일 사시(巳時)에 벌목하여 숯을 만들었는데 산 정상 자방(子方, 북쪽)에 가마를 만들었으며, 6가마의 숯을 얻었다. 이달 26일 사시巳時에 근정전의 술해방(戌亥方, 서북쪽), 경회루 연못 북쪽 제방 위를 감괘(坎卦) 형태로 파고, 숯을 묻어 관악산의 화기를 씻어내려고 했다. 대개 술戌은 불의 곳간이며, 해亥는 불을 겁살(胞絶)한다. 관악산의 정상에 역시 우물을 파는데 돌을 파서 6각지(角池)를 만들었으며, 직경 3척이며, 깊이는 2척쯤이다.”
- 경복궁영건일기 권4, 1865년 1월 6일 -
내용을 살펴보면, 관악산 정상의 나무를 벌목한 뒤 6가마의 숯을 만들고, 감괘(☵를 두번 겹친 괘, 물을 상징) 모양으로 땅을 판뒤 이를 묻었고, 또한 육각형 모양의 연못을 팠다고 한다. 관악산에서 만든 숯을 감괘 모양으로 묻었다는 것은 관악산의 불을 물로 제압하겠다는 의미로 여겨진다. 산 정상에 6각지를 팠다는 것도 같은 맥락인데, 6은 오행에서 물(水)을 상징하는 숫자이다.
둘째, 숭례문 앞에 남지(南池)라는 연못을 조성했다. 지금은 남지가 사라졌으나 조선 후기의 생활상을 그렸던 그림을 통해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사진2). 또한 1926년 남지 터에 건물을 짓기 위해 공사를 하던 도중 땅에 묻어놓았던 청동 용두가 발견되었는데, 이 속에는 팔괘와 함께 '水' 자를 잔뜩 적어놓은 종이가 들어있었다. 화기를 진압하기 위한 주술적인 용도로 묻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사진2. 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 소장 <남지기로회도>의 일부분, 숭례문 앞으로 남지가 보인다.(출처 : 데일리안, 연합뉴스, 정책브리핑)
셋째, 숭례문(崇禮門) 현판이다. 여기서 현판에 적은 '숭례崇禮' 는 단순히 예를 숭상한다는 의미로 해석하면 안된다. '崇(숭)'은 불꽃이 타오르는 모습을 본뜬 글자이며, '禮(예)'는 오행에서 남쪽이자 火(화)를 의미하는 글자이다. 이는 불기운에 맞불을 놓아 대응하겠다는 의도로 읽힌다. 현판을 세로로 적은 것 역시 그러한 의지의 표현이라 하겠다(사진3).
사진3. 토지 보상에 불만을 품었던 채종기 씨가 불을 질러 전소된 숭례문. 2013년 복구되었다.
넷째, 숭례문에서 광화문에 이르는 길을 틀어놓았다. 옛날 사람들은 좋든 싫든 특정 기운이 대문과 도로를 통해 들어온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화마가 경복궁에 직접 닿지 않도록 광화문과 숭례문을 곧장 연결하지 않았던 것이다. 숭례문도 잘보면 정남향으로 세우지 않고 약간 서쪽으로 틀어놓았다(사진3).
사진4. <수선전도>에 표시된 숭례문과 광화문 사이. 붉고 푸른 표시는 필자가 했음(사진출처 : 위키백과)
다섯째, 광화문 앞에 해치 석상을 설치하였다(사진5). 해치는 불의한 사람을 보면 들이받는 강직한 성격을 지녔으며, 불꽃을 먹는 습성이 있다고 한다. 따라서 궁궐로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몸과 마음을 경건히 할 것을 주문하고, 화기를 제압하려는 의도로 읽을 수 있다.
사진5. 광화문 앞에 놓여있는 해치 한쌍. 촬영 당시는 월대 복원 이전이라 담장 바로 앞에 놓여있다.
여섯째, 흥례문과 근정문 사이에 금천(禁川)을 흐르게 하였다. 불은 물에 약하므로 다시한번 물을 통과하도록 만든 것이다. 이 금천은 궁궐의 명당수 역할도 겸한다(사진6).
사진6. 근정전으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이곳 영제교를 통과해야 한다. 영제교 밑에는 금천이 흐르고 있었으나 지금은 말라버렸다.
일곱째, 상량문과 함께 물의 상징물을 봉안하였다. 과거 근정전을 수리하려고 해체하던 도중 상량문과 함께 '水'자를 가득 적은 육각형 은판과 물 '水'자 부적, 용 모양의 부적이 발견되었다. 용은 구름을 몰고 다니며 비를 뿌리는 서수이며, 물 수자 부적도 자세히보면 용 '龍'자를 빽빽하게 적어놓은 것을 알 수 있다. 이들 역시 물과 용을 통해 화기를 제압하려는 주술적인 의도로 읽혀진다(사진7, 8).
사진7. 용 모양의 부적과 물 水를 6번 써놓은 육각형 은판 5개.(사진 출처 : 경향신문)
사진8. 물 水자 부적은 자세히 보면 용 龍자를 작게 써서 완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사진 출처 : 경향신문, 구글 아트앤 컬쳐)
여덟째, 경회루 연못에 청동으로 된 용을 주조하여 넣었다. 『경복궁영건일기』권2에 의하면 이 용은 별간역 김재수가 1865년 8월 30일 임술(任戌)에 반을 만들고, 나머지 반은 9월 10일 임신(任申)에 만들어 합쳤다고 한다. 천간에서 '임(任)'은 북쪽, 물과 뜻이 통한다. 그러므로 특별히 물의 기운을 왕성히 받으라는 의미에서 임술과 임신일에 만든 것으로 보인다. 본래 한 쌍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현재까지 발견된 것은 용 한마리 뿐이다.
사진9. 1997년 경회루 연못에서 발견된 청동 용. 고궁박물관 상설전시실에서 볼 수 있다.
아홉째, 각 전각의 현판을 검게 칠하였다.『경복궁영건일기』권7 1867년 4월 21일 자에는, 교태전과 강녕전의 현판을 ‘묵질금자(墨質金字, 검은 바탕에 금색글자)’라고 하고 세주(細註, 세부설명)에 “각 전당은 모두 흑질(黑質, 검은바탕)로 했으며, 불을 제압하는 이치를 취한 것이다.”라고 적혀 있다. 절이든 궁이든 대부분의 목조 건축이 흑색 현판을 달고 있어서 막연하게 생각했었는데, 이를 통해 화마를 제압하려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사진10).
사진10. 근정전과 현판.
이번 글을 쓰기 위해 자료를 찾아보면서 조상들이 화재를 정말이지 두려워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그만큼 화재가 자주 발생하였다는 방증일 것이다. 이는 궁궐 뿐만 아니라 민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몇몇 유서 깊은 사찰에서는 지금까지도 화재 방지를 위한 의례를 행해오고 있는데, 다음 글에서 살펴보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