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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샘 Nov 11. 2019

대물림받은 '이방인'

대구가 고향인 할아버지는 소년기 때 강제징용으로 끌려가 이방인이 되었다. 일본에서 태어난 아버지는 ‘조센징’이 되었다. 할아버지, 아버지, 나, 그리고 나의 딸로 이어진 이 씨 가족은 한 세기 동안 어디에도 귀속되지 못하고 이방인으로 살아왔다.
태어나 보니 내 신분은 ‘귀국자’라는 꼬리표가 달린 이방인이었다. 귀국자라는 말은 일본에서 태어나 북한에 온 사람을 부르는 말이다. 나는 일본에서 태어나지 않았는데 왜 귀국자일까.


인민학교(초등학교) 2학년이 되면 학생은 조직생활을 시작하고 그 증표로 ‘소년단원’이 된다. 소년단에 입단하면 빨간 타이를 목에 메고 다닐 수 있다. 선생님은 공부 잘하고 조직생활을 잘하는 순으로 입단시키겠다고 가입조건을 설명했다. 그 말에 너무 신나서 엄마에게 자랑했다.
“엄마, 선생님이 나는 수학 문제도 1등으로 풀고 짧은 글짓기도 잘해서 1등으로 소년단원이 될 수 있대.”
하지만 1차에 올라간 내 이름은 번번이 떨어져 맨 마지막에야 넥타이를 받았다. 아버지가 서럽게 우는 어린 딸에게 잔인한 사실을 알려주었다.
“공부 잘해도 소용없어. 네가 귀국자여서 안 된 거야. 그건 네 잘못이 아닌데도 말이야.”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인이 되어서도 ‘귀국자’ 꼬리표는 의사결정의 중요한 순간마다 불이익으로 나를 괴롭혔다.
탈북했다가 북한에 잡혀갔을 땐 ‘귀국자’ 외에 다른 꼬리표가 하나 더 붙었다. ‘배신자’였다. 고난의 행군시기 인민들이 나라를 지키다가 굶어 죽을 때 같이 죽지 않고 도망갔으니 배신자라고 경멸했다. 이제는 '귀국자'에도 들지 못하고 더 고립되었구나 생각했다.
나는 조선 사람으로 태어났지만 조선에 들지 못하고 철저하게 배제되었다.


탈북하고 중국으로 도망간 10년은 또 다른 이름표가 붙었다.'도망자' ‘탈북자’였다. 불법으로 남의 나라에 숨어들었으니 억울할 것 없다고 생각했다. 나 혼자 살겠다고 나라를 탈출한 내 죄가 크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한국에 입국하고 한국사람이 되었지만 ‘탈북자’ 꼬리표는 사라지지 않고 더 커졌다. 이 나라도 원래 내 것이 아니었고 잘 사는 형제 집에 얹혀사는 입장이니 ‘국민’ 자격을 받은 것에 만족하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인가. 태어난 고향에도, 몸 담고 살고 있는 남한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하는 나는 누구인가?


통일되어 고향에 돌아가면 그땐 또 어떤 꼬리표가 붙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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