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진술인 17화

진술인(3/5)

by 유재영

3


진영이 자라는 동안 제가 아이에게 바란 것은 정직과 진실이었습니다. 아이의 귀여운 장난, 사소한 거짓말에도 정색하고 꾸짖어 진영을 난처하게 만든 일이 종종 있었습니다. 때로는 진실의 무게를 감당하지도 못하면서 솔직하게 털어놓으라고 몰아세운 적도 있었지요. 막상 진영에게 솔직하지 못한 건 저였을 겁니다. 정운의 존재를 알리지 않았으니까요. 진영이 말을 시작할 무렵 그 사람의 모든 흔적을 지웠습니다. 이삿짐에선 더 이상 정운의 물건이 섞여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그 사건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던 건 아닙니다. 이사를 하고 직장을 옮겨도 사람들의 시선과 목소리에 깃든 악의를 헤아리기 바빴습니다. 사람을 사귀는 것은 물론이고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일조차 버겁던 시절이었죠.

마침내 그 사건과 떼어졌다고 느낀 건 태인 시로 이주하면서였습니다. 토지주택공사의 국민임대아파트 모집공고를 보고 신청한 것이 요건에 들었던 겁니다. 새로 시작하겠다는 마음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진영의 중학교 입학에 맞춰 태인 시로 왔습니다.

보험설계사 일도 태인 시에서 시작했습니다. 진영의 명의로 실손 보험을 들기 위해 지역 보험사무소를 직접 방문한 게 인연이 되어 업무를 배워 볼 생각을 했던 겁니다. 낯선 사람을 만나는 일이 힘겨울 때였지만, 저를 수많은 서류 중 하나라고 생각하면서 견딜 수 있는 상황으로 바꿔 나갔습니다. 보험약관과 새로 나온 상품 목록을 달달 외우며 한 장의 계약서, 하나의 보험 상품, 한 권의 약관으로 둔갑하는 법을 익혔던 거지요. 신뢰란 인간 대 인간의 관계에서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 서류와 서명 사이에서 탄생하는 일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그 효력이 새삼 놀라웠습니다. 거기에도 법은 있었습니다. 저는 상품을 소개하고 판매했습니다. 심사하고 승인하고 지급하는 일은 저마다의 부처에서 진행했습니다.

개척. 보험업계에서는 저의 업무를 그렇게도 불렀습니다. 그 말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개척이란 단어는 진영에게 더 어울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중학생이 된 진영은 어느새 저보다 강인한 아이로 자랐습니다. 집안일부터 공과금 납부까지 혼자서도 못 하는 일이 없었고 제가 설계 프로그램을 익히는 데 애를 먹고 있으면 곁에 다가와 도와주었습니다. 때로는 고객으로 분해 상담 업무를 돕기도 했습니다. 짓궂은 고객의 역할도 마다하지 않았죠. 진영이 가르치고 돌보는 일을 전공으로 삼은 데에는 저와 함께한 시간이 조금이나마 영향을 끼쳤겠지요. 대학 졸업반이 되자 진영은 보육교사 자격을 수료했습니다. 어린이집 취직을 염두에 두고 도움이 된다는 자격증 시험도 준비했습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저는 진영의 선택을 조용히 지켜볼 따름이었습니다.


우편함에서 그 사람의 편지를 발견했을 때,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 이름을 잊기 위해 그토록 많은 층계를 차곡차곡 밟아왔는데 떨어지는 건 한순간이었습니다. 감옥에서 보내온 편지였습니다. 가방 속에 편지를 찔러 넣고는 우편함을 샅샅이 살폈습니다. 지역 케이블 업체의 전단지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죠. 진영보다 먼저 발견한 게 얼마나 다행인가 생각했습니다. 고객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고 계약 성사가 목전이었기에 편지는 열어 보지 않았습니다. 약속 시각에 늦는 고객을 기다리는 동안에는 고객의 요구에 맞춰 설계해 온 문건을 펼쳐 두고 잘못된 부분이 없는지 점검했죠. 항목별로 설계된 금액을 확인했습니다. 암 진단비, 7대 질병 수술비, 질병 입원 치료비, 급성심근경색증 진단비……. 서류에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고객이 떠난 뒤 편지를 읽었습니다. 말끔하게 정서한 글씨가 무척 이질적이었습니다. 그 사람의 글씨를 언제 본 적이나 있나 싶더군요. 편지지는 한 장. 밑으로 갈수록 글씨는 더 작아지고 빼곡해졌습니다. 그 사람은 편지의 절반 이상을 수인의 일상을 담담히 서술하는 데 할애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엔 이런 말이 적혀 있었습니다.

‘매년 당신과 아이에게 연하장을 써왔어. 집과 당신 회사에 똑같은 편지를 보냈지. 대개는 반송되어 돌아왔고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달랐어. 어제 신부님에게 들었던 말 때문일까. 휴일을 맞아 종교 행사에 참여하는 날이었어. 지난주엔 교회를 찾았으니 이번에는 성당에 갈 차례였지. 고해소에서 신부님에게 물었어. 용서를 구하지 않는 사람은 천국에 갈 수 없느냐고. 신부님이 말하더군. 그들은 처벌받지 않는다고, 참회하지 않는 사람은 용서받을 수 없고 그냥 사라질 뿐이라고 말이야. 그렇다면 나는 그냥 사라지는 걸까. 내가 하지 않은 일로 대신 형을 살고 있는데, 그마저도 부족한 일이 되는 걸까. 이제야 그게 궁금해졌어.’

그 사람에게 주소를 알려준 적은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태인 시에 오면서 기존에 알던 누구와도 연락을 끊었으니까요. 그렇다면 어떻게 주소를 알았단 말일까요. 미루어 짐작한 바로는 누군가 저를 미행했던 것 같습니다. 이주 초기에 낯선 사람이 따라오는 것을 보고 경찰에 신고해야 하나 고민한 적이 있었으니까요. 공연히 경찰서로 찾아가면 일이 불거질까 걱정이 되어 전전긍긍하던 기억이 있었습니다. 편지에 담긴 기묘한 살기 때문에 양손이 오랫동안 떨렸습니다. 떨림이 멎기까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집에는 진영이 있었고 할 말이 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진영의 말을 들으면서 비로소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지요.

“아르바이트하기로 했어.”

“어떤 아르바이트?”

“수요일 저녁이랑, 일요일 오전에 아이를 돌보는 일이야.”

“몇 명이나?”

“한 명. 좀 아픈 애거든.”

진영은 어린이집 보육교사 공고를 보고 면접을 갔다가 제안 받은 일이라고 했습니다. 지체 장애가 있는 원장의 아이를 돌보는 아르바이트였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방학 때마다 쉬지 않고 아르바이트를 했던 터라 이번에도 진영의 선택을 믿었습니다. 제 근심은 단 하나였습니다. 다른 사람의 집에서 일한다는 점이었습니다. 누군가의 집은 누군가의 카페나 프랜차이즈 햄버거 가게와는 다른 의미이니까요. 걱정을 지우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진영은 새로운 아르바이트를 아주 잘 해나가는 것 같았습니다. 진영이 저와는 다른 사람이라는 걸 인정했고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거라고 안도했습니다. 하지만 더 나은 삶의 기준이 저마다 다르다는 걸 그때의 저는 알지 못했습니다. 공감하고 애도하는 삶이 제게는 멀고 먼 이야기였으니까요.


그 사람의 편지는 보험사무소 제 책상 서랍에 보관했습니다. 다른 고객의 서류와 나란한 편지를 보면서 그 시절 제가 보상받을 수 있는 보험이 있었을까 궁금했습니다. 지금은 가입할 수 없는 상품 목록까지 살폈습니다. 모두 모아 건강하게, 행복한 건강 파트너, 자녀를 위한 보험, 연금보험 아름다운 생활, 가정 종합보험 살다 보면…… 배우자가 살인을 저질렀을 때를 감안한 보험 상품은 없었습니다. 만약 그런 보험이 있다면 저는 어떤 보상을 받을 수 있을까요. 이른 아침 보험사무소에서 회의를 준비하며 세상에 없는, 존재하지 않을 보험 상품을 떠올렸습니다.

이후 계절이 바뀔 때마다 그 사람은 편지를 보냈습니다. 수인의 일상을 이야기하고 이쪽의 안부를 물었습니다. 편지를 꼼꼼히 읽어야만 했습니다. 무언가 알아 두어야 할 내용이 있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서였습니다. 주소를 알아낼 정도라면 그보다 더한 일을 하지 못하리라는 법도 없을 테니까요. 그런데도 표면으로 드러난 위협은 없었으므로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고 답장도 보내지 않았습니다. 어느덧 보험사무소 제 책상 서랍에는 그 사람이 보낸 편지 다섯 통이 쌓였습니다. 보험금 청구를 준비하는 사람처럼 수신한 날짜를 포스트잇에 적어 봉투 겉면에 붙여 보관했습니다. 다섯 번째 편지에서 그 사람은 진영의 이름을 물었습니다. 정운에게는 여전히 ‘아이’인 진영. 그 물음에도 저는 답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여기까지의 일을 오랫동안 생각하면서 살았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당시의 일을 거의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당신께서 이미 잘 알고 계시겠지요. 다음은 진영이 남긴 편지입니다. 원본은 제 손에 없지만, 그 내용은 한 글자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한동안 그 편지를 매일 읽었으니까요.

keyword
이전 16화진술인(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