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진술인 22화

증강현실

by 유재영

알람음에 깨어나 침대 끝에 앉아 있는 너를 봤다. 내가 기척하면 너는 가만히 본 것들을 말했다. 옥상 난간 끝에 서 있는 아이의 맨발과 기울어가는 건물에서 붕괴를 기다리는 부부의 나란한 어깨, 심야의 도로를 횡단하는 고양이에게 드리운 헤드라이트 불빛이라든지, 불어난 강물에 떠다니는 개의 등에서 시작하는 이야기였다. 하나의 세계가 오롯이 닫히는 장면이었다. 그곳에 너의 손과 목소리는 닿을 듯 닿지 않았다. 너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저 본 자로서 이야기할 뿐이었다.

폭발이 있었어. 화염이 높이 솟았지. 매캐한 냄새와 함께 분진이 날렸는데, 꼭 눈 같았어. 종이를 찢어 만든 눈. 공원 벤치에서 폭발이 일어난 곳을 바라보는 나를 봤어. 나를 내가 본 거야. 내 볼에 손을 댔어. 열기가 느껴지더라. 괜찮으냐고, 내가 말했지. 나는 듣지 못했어. 그냥 그렇게 마주 앉아 나를 봤어.

어제도 너는 본 것을 말했다. 나는 너의 등에 손을 올렸고, 내게 닿을 수 있도록 한발 다가섰다. 그리고 우리의 시간을 셈하며 그곳이 아니라, 이 세계에서 너와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고 말했다.

그 일이 지금 네가 겪는 일과 관련이 있을까. 네가 사고를 당한 것은 지난봄이었다. 나는 먼저 퇴근해 집으로 왔다. 밤 10시에 한 번, 11시에 다시 한 번, 너에게 메시지를 남겼지만 너는 회신하지 않았다. 전화를 걸어도 연결음만 흐를 뿐 너의 목소리는 들을 수 없었다. 택시를 타고 네 직장으로 향한 건 자정 무렵이었다. 너는 회사 근처 주택가 골목에서 발견됐다. 새벽녘이었다. 네 몸에는 아무런 흔적이 없었다. 어딘가에 긁힌 상처나 멍 자국조차 없었다. 경찰관은 길을 걷다가 쓰러졌을 가능성을 말했다. 빈혈이나 간질의 징후를 확인하는 일이 수사의 전부였다. 병실로 자리를 옮긴 너는 줄곧 잠들어 있었다. 병실에서도, 아침마다 침대 끝을 살폈다. 금방이라도 네가 일어나 이야기할 것 같았다. 담당 의사는 네가 깨어나기를, 스스로 눈을 뜨고 입을 열기를 기다리는 방법밖에 없다고 했다.

어느 날 기자가 다가와 내부고발 이후 네가 직장에서 감당해야 했던 스트레스와 인사상 불이익을 물었지만, 내가 답할 수 있는 건 우리가 함께 보내고, 약속한 시간뿐이었다. 병실 한편, 깨어나지 않는 너를 볼 때마다 네 몸에서 구두점처럼 작은 조각이 하나씩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반면 내 언어는 온통 괄호 안에 묶였고, 그 안에 담긴 나는 점점 희미해져갔다.


그동안 꽃이 졌다. 유래 없이 긴 장마가 왔고, 여느 해와 다름없는 폭염이 시작됐다. 거리의 색이 변했으며 드물게 눈이 내렸다.

나 역시 보기 시작한 건 최근의 일이다. 흔들리는 지반 위에서 아이를 찾는 남자의 떨림과 어둠 속에서 마지막 편지를 적어 내려가는 이의 그림자, 폐쇄된 지역의 동물들에게 먹이를 주는 젊은 여자와 돌아오지 못하는 아이들의 뒷모습. 어제는 노란색 방호복을 입은 사람들이 마스크 쓴 아이의 등을 쓸어주는 모습을 지켜봤다.

비가 왔어. 몇날며칠 그치지도 않고 쏟아졌지. 산이 무너지고 강물이 넘쳤어. 물에 잠긴 자동차가 떠내려가고 축사 건물 위로 올라간 소는 울지도 않더라. 건물 옥상에서 나를 봤어. 나를 내가 본 거야. 내 볼에 손을 댔어. 물기가 느껴지더라. 괜찮으냐고, 내가 말했지. 나는 듣지 못했어. 그냥 그렇게 마주 앉아 나를 봤어. 언젠가 너도 그런 것처럼.

나는 아주 천천히 너에게 말했다. 네가 그곳에서도 들을 수 있도록, 혹은 그곳에 있는 너를 볼 수 있기를 바라며. 너와 닿을 수 있도록 이만큼 다가서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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