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진술인 21화

둘은 하나의 단단한 단위(2/2)

by 유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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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2월 16일, 나는 결혼 생활을 함께하는 나의 동지와 함께 하바롭스크 행 비행기를 탔다. 소설 속에 등장한 배경을 탐사하고 오류를 체크하여 증쇄 때 반영하겠노라는 작가적 욕심이 아니라 2018년 가을, 모스크바에서 3개월간 체류하면서 먹었던 홍차와 메도빅 그리고 조지아산 와인과 샤슬릭이 그리웠기 때문이다. 물론 「하바롭스크의 밤」 속 두 인물이 그랬듯 아무르강 유역을 걷거나 김 알렉산드라의 기념비를 찾아갈 일정도 마련해두었다.

하바롭스크 공항에서 숙소가 있는 아무르가 40번지까지 오면서 나는 우리의 데이터베이스에서 갱신할 단어가 있다고 생각했다. 추위였다. 차들은 눈을 싣고 달렸고, 바람에선 살기가 느껴졌다. 김이 서린 안경을 닦기 위해 입김을 불면 그 즉시 렌즈 위로 살얼음이 꼈다. 도착 다음 날, 아무르강 유역을 걸으면서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저기, 꽁꽁 언 강을 봐. 소설을 쓰기 전에 오지 않길 잘했어. 여기엔 아무것도 없잖아.’ 혀뿌리에서 얼어붙은 말은 끝내 뱉어지지 못했다. 시간을 두고 카페에서 홍차와 메도빅, 커피로 육체의 불을 지핀 뒤 마르크스가 24번지, 붉은 벽돌집 아래에서 김 알렉산드라의 기념비를 봤고, 2020년을 환영하는 얼음 조각이 전시된 레닌 광장을 경유하여 부엌과 화장실, 거실 겸 방이 있는 세르게이의 집으로 돌아왔다. 언 몸을 녹이면서 국제적 정세와 정치적 견해를 두고 동지와 갈등을 빚었는데 정확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추위 때문인지 꽤 열을 올렸다. “우리는 끝났다”고 말하지 않는 선에서 다툼은 휴지기에 접어들었고 나는 비염이, 동지는 식도염 증세가 발발하여 각각 플로라딘 한 정과 개비스콘 두 정을 삼키고 안정을 취했다. 시간이 흘렀고, 동시에 허기를 느낀 시각은 오후 여덟 시 무렵이었을 것이다. 나는 먹을 만한 걸 포장해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휴대폰과 신용카드, 여권만 손에 쥔 채 홀로 길을 나섰다.

어두운 주택가 끝 모퉁이에 버스 안에서 보았던 로컬 식당이 있었는데 보이지 않았다. 여기라고 생각했던 곳은 막다른 길이었고, 벽이 있던 자리엔 길이 나 있었다. 휴대폰은 추위 탓에 방전된 지 오래, 나는 되돌아갈 길조차 잃기 전에 그만 발길을 돌리려고 했다. 그때, 길목 어딘가에서 익숙한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너무도 친숙하고 분명한 리듬에 실소가 흘렀다. 「아리랑」이었다. 어둠과 추위 속에서 그 목소리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이윽고 불 켜진 음식점 하나가 보였다. 간판은 읽을 수 없었지만, 문틈으로 새콤하면서 달곰한 보르시 특유의 냄새가 새어 나왔다. 건물에 들어선 뒤 식당 입구를 찾아 계단 몇 개를 내려갔다. 그사이 노랫소리는 멎었고 어두운 복도를 따라 걷다가 두어 번 걸음을 돌리려 했으나 그때마다 냄새가 짙어졌다. 이내 테이블 여남은 개가 보이는 작은 홀이 나타났다. 구석진 자리에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앉아 있을 뿐, 조금 전까지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적막했다. 나는 주방 쪽으로 가서 포장이 가능한 음식이 뭐냐고 물었다. 보르시와 샤슬릭을 향하여 왼손과 오른손 검지를 치켜들어 각기 1인분을 주문하고 주방 쪽과 가까운 테이블에 앉아 기다렸다. 주위를 둘러보며 전기 콘센트를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숙이자 건너편 테이블에서 말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영어와 중국어 사이에서 ‘아리랑’이란 우리말이 연달아 들렸다. 그리고 ‘데스’와 ‘빅토리’도 들을 수 있었다. 그건 김산이 「아리랑」을 두고 님 웨일스에게 말했던 구절과 비슷했다. “이 노래는 죽음의 노래이지, 삶의 노래가 아니다. 그러나 죽음은 패배가 아니다. 수많은 죽음 가운데서 승리가 태어날 수도 있다”고 김산이 말했던가. 잠시 뒤, 두 사람 중 노란 머리 여성이 출입문으로 나가고 동양인 남자가 자리에 남았다. 그제야 나는 그의 얼굴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는 김산과 닮은 듯 달랐다. 내가 본 그의 모습이라곤 베이징 교도소에서 찍은 사진뿐이었으니, 당시 안색이 평소와 같을 리 없었다. 그렇지만 그가 하바롭스크에 왔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었으니 나는 믿을 수 없었다. 그에게 다가가 말을 붙였다.

“조선인입니까?”

“그렇습니다만.” 그는 흥미로운 듯 미소 지으며 나를 바라봤다.

“좀 전에 「아리랑」을 부른 게 선생이었군요.”

“맞습니다.”

그의 대답과 동시에 자리를 비웠던 이가 돌아왔고 나는 어정쩡한 자세로 테이블에서 한 걸음 물러선 채로 그를 바라봤다.

“당신도 조선인이군요! 반갑습니다.” 그는 나를 반대쪽 자리에 앉히고 옆 테이블 의자를 가지고 와서 귀퉁이에 놓고 앉았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노트를 제 앞으로 옮겨와 어서 말해보라는 듯 손바닥을 좌우로 휘저었다.

“하바롭스크에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내가 말했다.

“시베리아는 새로운 사상의 주요 원천지이니까요. 그리고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누굽니까?”

“극동인민위원회의 외무위원장 김 알렉산드라 동지입니다. 그런데 너무 늦었더군요.” 그는 금방이라도 일어날 것처럼 주먹 쥔 두 손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말했다. “선생은 혼자 오셨습니까?”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왔습니다.”

“사랑이라… 김 알렉산드라 동지는 ‘사랑이 혁명’이라고 말했다던데, 나는 그 말을 믿을 수 없었소. 사랑이 어떻게 혁명인가, 그 둘은 명확히 다르지 않소.”

“어떤 사랑은 혁명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대화를 들으며 무언가 써내려가던 이가 불쑥 힘주어 말했다. “혁명은 하나의 추상물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살아 움직이는 인간이 만들어내는 것이죠. 인간적인 요소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함께 있으면 우리는 튼튼할 겁니다. 둘은 하나의 단단한 단위니까요. 혁명이란 그런 결속을 만들어 내는 거 아니던가요.” 말을 마친 그가 나를 보며 그렇지 않으냐고 물었다.

“그렇죠… ” 그의 문어체적 언변에 감탄하여 말을 맺지 못하고 있을 때 보르시와 샤슬릭이 담긴 봉지를 들고 주인장이 다가왔다. 내가 마스터 카드를 내밀자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카드는 받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노란 머리 여성이 루블인지 달러인지 모를 지폐 한 장을 건넸고 주인장은 주방 쪽으로 걸어갔다.

“카드가 안 되는 줄 몰랐네요.” 나는 켜지지도 않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페이팔 번호 알려주시면 숙소에서 송금해드리겠습니다.”

“괜찮아요. 선생이 말한 이야기를 책에 수록하는 값이라고 해두죠.”

이후로도 몇 마디 말을 더 주고받았지만, 보르시와 샤슬릭이 너무 식어버리면 어쩌나 걱정하느라 대화에 집중할 수 없었다. 서둘러 작별을 고하고 숙소에 돌아왔을 때 동지는 곤히 자고 있었다. 나는 홍차를 마시기 위해 커피포트로 물을 데웠는데, 그 물이 채 끓기도 전에 잠이 들었다. 그들이 누구인지는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다음 날 아침, 전날 사 온 보르시와 샤슬릭을 데워 먹으며 지난밤 이야기를 동지에게 전했다. 아무래도 김산과 님 웨일스를 본 것 같다고. 홍차 한 모금을 삼킨 뒤였다. 그들과 김 알렉산드라에 관해 이야기했는데, 그 기억이 가물가물하다고. 그 자리에 너와 함께 있지 않아서 아쉬웠다고 말했다. 동지는 말없이 창문을 내다보며 홍차를 마셨다. 나는 조금 더 말을 이었다. 매번 가보지 않은 세계에 나 혼자 가서 미안하다고. 그러자 동지가 답했다.

“네가 그랬잖아. 둘은 하나의 단단한 단위라며. 네가 갔으면 됐지.” 동지가 테이블 맞은편으로 자리를 옮겨와 계속 말했다. “그런데 어젯밤에 네가 나갔을 때 말이야. 여기 누가 왔었는지 알아?”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가로젓고 입술을 달싹이며 그가 보여줄 세계를 기다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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