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진술인 10화

당신의 갤러리(2/6)

by 유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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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밤 이후 여섯 달이 지난 뒤였다. <빛과 어둠> 서울전 오프닝을 앞두고 선배와 나는 밤이 깊도록 사무실을 지키는 일이 잦았다. 서류 작업 중 좀처럼 숫자가 맞지 않는 항목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던 날, 나는 탕비실을 들락거리며 주전부리를 찾아내기 바빴다. 초콜릿과 크래커를 접시에 담아 선배에게 가져다주기도 했다. 선배는 도록에 들어갈 자료 정리를 마치고 전시장 평면도가 담긴 이미지 파일을 살피는 것 같았는데, 자리를 비우는가 싶더니 커피가 든 종이컵을 들고 내 앞에 나타났다.

“같은 전시를 준비한 적 있어요.” 책상에 비스듬히 걸터앉으며 선배가 말했다.

특별전이 성사될 수 있었던 배경을 수석 큐레이터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그는 선배의 인맥과 조용한 추진력을 언급했다. 그 점이 두 번이나 계약을 갱신한 원동력이 되었다고.

“런던전 말씀이시죠? 수석 큐레이터님이 말씀해주셨어요. 그때 작품은 거의 다 왔나요?”

“몇 개는 못 왔어요.”

“그래도 대표작은 왔잖아요.”

“그 작품 때문에요.”

“네?”

“갤러리를 찾아서.”

“그 작품이 왜요?”

“예전에 런던에서 근무할 때 그곳 도슨트에게 들은 말이 있거든요. 화랑이 담긴 유화 작품을 전시할 때 특별히 조심해야 할 게 있다고요. 자정이 되면 그림 속 인물이 화폭에서 빠져나와 다른 그림을 살펴보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거죠. 그중에는 다소곳한 관람객도 있지만 고집 센 비평가도 섞여 있다면서.”

“엉뚱한 분이네요.”

“재밌는 사람이죠. 근데, 그 사람이 경험한 일은 그렇지 않았어요.” 선배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다음 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하루는 숙직실에서 관장의 전화를 받았대요. 기획전시실에 불이 켜져 있다고요. 커튼 뒤로 검은 실루엣이 보인다나? 당시 관장은 갤러리 창문을 여닫는 일조차 직접 하는 법이 없었으니 전화 자체는 새로울 게 없었다는데, 그날만큼은 예감이 좋지 않았다더라고요. 왜 그런 날 있잖아요. 종일 쓸데없는 말을 너무 많이 하지 않았나. 문은 잠그고 나왔던가. 전등불 하나가 어딘가에 켜져 있지 않나. 의심이 들 때요. 그래서 전화를 끊고는 숙직실이 있는 사무동에서 전시실까지 헐레벌떡 뛰어갔다는 거예요. 몇 달간 준비했던 <빛과 어둠> 런던전이 이틀 앞으로 다가왔을 무렵이었다고 하니 한창 예민한 시기였겠죠.”

“딱 지금이네요.” 나는 우유 거품을 후, 밀어내고 말했다. “정말 사람을 봤대요?”

“네. 기획전시실에 불이 켜진 걸 확인하고는 조용히 문을 열었는데, 검정 턱시도를 빼입은 중산모 쓴 남자가 팔짱을 끼고 느릿느릿 그림을 살펴보는 뒷모습을 봤대요. 큐레이터가 저만치서 소리치며 다가가자 그 남자는 반대편으로 줄행랑쳤고요. 도슨트가 묘사한 그곳 전시실이 여기랑 비슷한 거 같아요. ㅁ자요. 꼬리잡기 같은 추격전이 시계 반대 방향으로 이어진 거죠.” 선배는 오른손 검지를 펼쳐 쓰다듬듯 왼손 손바닥 윤곽을 따라 그으며 계속 말했다. “남자와의 거리는 쉽사리 좁혀지지 않았고 그렇게 한참을 달린 뒤에야 남자를 놓쳤다는 걸 알았대요. 조금 전까지 분명 저 앞에 있었는데…… 그때 도슨트가 멈춰 선 자리에 걸려있던 그림이.”

“갤러리를 찾아서?”

“맞아요. 다음 날 정오가 되어서야 관장이 묻더래요. 도둑맞거나 상한 그림이 없느냐고 말이죠. 그렇다고 하니까 관장이 슬며시 웃었다는 거예요. 「갤러리를 찾아서」 속 중산모를 쓴 남자는 세계 곳곳의 갤러리라면 안 다녀본 곳이 없는 만큼 그림에도 조예가 깊은데, 형편없는 그림에는 기필코 얄궂은 장난을 부린다는 거죠. 그 섬세한 손길을 피해갔으니 이번 전시는 성공할 모양이라고.”

“그 관장, 무서운 사람이네요.”

나는 짧은 감상평을 내놓았다. 선배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두세 번 작게 끄덕였다.

“그런 그림 속 인물과 만났다니 퍽 아름다운 이야기네요, 하고 제가 대꾸하자 그는 고개를 가로젓더라고요. 그 일이 있고 난 뒤 관리 소홀의 책임을 물어 해고당했다면서…….”

“미친놈. 그런 건 바로 고소 아닌가요? 그래도 영국이잖아요.” 나는 커피잔 겉면에 인쇄된 로고를 확인한 뒤 문득 떠오른 것을 말했다. “하긴 켄 로치 감독이 은퇴 못 하는 이유가 그거겠죠.”

“맞아요. 다니엘 블레이크 씨랑 상황이 비슷하죠? 감독이 실제 사건에서 모티브를 얻었다는 인터뷰를 봤는데 겹칠지도 모르겠네요. 그분, 몇 년간 지방법원을 들락거린 뒤에야 복직할 수 있었거든요. 기이한 밤의 추격전이 지워지지 않는 상처로 남은 듯싶었죠.”

“진짜 사이코패스네요. 그 관장.”

“은영 씨는 사라지고 싶은 적 없어요?”

선배는 팔짱을 끼고 사무실 벽면에 걸린 그림을 바라보며 물었다.

“어디로요?”

“어디든. 가까운 곳은 아니겠죠?”

“실은, 가끔요. 밤에…… 갤러리를 구경할 때가 있어요.”

“익숙한 취미네요, 그거.”

“그렇죠? 그림을 보는데, 감상이 좀 다르더라고요. 가만히 보고 있으면 저 안으로 들어가면 좋겠다. 그런 생각도 들고.”

“어떤 그림?”

“주로 3층에 있는 그림들이요. 모네나 르누아르? 마리안의 작품들도요. 선배 말 들으니까 화랑이 담긴 그림은 피해야겠네요.”

“아, 전공이 회화라고 했죠? 지금도 그려요?”

“아니요. 손 놓은 지 꽤 됐어요. 어떻게 그리는지도 기억나지 않을 만큼.”

“왜 안 그려요? 그림.”

“그리고 싶은 게 없다는 걸 알았거든요.”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켜고 덧붙여 말했다. “무언가 만들어낸다는 게 좀 겁나기도 하고.”

“난 그림 못 그려요. 대신 보는 건 좋아하지. 누군가에 의해 그려지는 건 어떤 기분일까, 생각해본 적 있어요. 그림 속 인물의 생애라면 이보단 아름답지 않을까 싶어서.”

“제대로 못 그리면 불만이 많겠죠?”

“신도 천지창조 이후에 좀 무서웠을 거예요. 해석도 안 되고, 수습도 어렵고…… 확, 날리고 다시 시작하고 싶은데 마감은 코앞이고.”

“커피가 필요했겠네요.”

“모든 걸 원래 자리로 돌려 두고 싶었겠죠.”

“그래서 큐레이터가 생긴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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