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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서 등이 번쩍인 건 1층 전시장을 절반쯤 지났을 무렵이었다. 불빛은 2층 복도에서 새어 나왔다. 나는 서둘러 계단을 올랐고 그곳, 2층 기획전시장 입구에서 낯선 남자를 발견했다. 그는 검정 양복을 갖춰 입은 채로 연두색 사과를 먹고 있었다. 사과를 한입 베어 문 남자는 나를 발견하고는 뒷걸음치더니 이내 전시장 끝을 향해 내달렸다. 그가 화랑을 지날 때마다 주홍색 센서 등이 환하게 밝아졌다. 저 불빛을 당장 멈춰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때였다. 얼굴이 주홍색으로 달아오르던 선배가 떠올랐다. 회한에 잠긴 표정도 함께였다. 그 색과 표정만큼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선연했다. 나는 기필코 저놈을 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일종의 복수라고 믿었던 것 같다. 창가 옆 벽면에 기대어 있던 접이식 철제의자를 집어 들고 힘껏 던졌다. 의자는 날카로운 직선을 그리며 날아갔고, 남자의 스텝을 무너뜨렸다. 놈은 균형을 잃고는 앞으로 고꾸라졌다. 다가가보니 정신을 잃은 채로 엎어져 있었다.
“미술관인데요. 여기, 도둑놈이요. 빨리요. 빨리 와주세요. 여기가 어디냐면 한남동 이태원로…….” 나는 숨을 몰아쉬며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이 도착할 때까지 그는 깨어나지 않았다. 경찰차 뒷좌석에 실려 한남파출소에 도착한 뒤에야 남자는 정신을 차렸다. 그는 몇 가지 지명과 이름을 댔지만 억양이 독특한 영어 발음으로는 그의 신원을 증명할 수 없었다. 신분증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도, 경찰도 난감한 표정이었다. 남자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경찰은 그가 불법체류자일 가능성에 대해 말했다. “나죠?” 경찰은 그의 몸에서 이상한 악취도 난다고 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떠들어대는 건 흔한 수법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런 것 같네요.” 나는 경찰의 말에 일부 동의했지만, 그 냄새가 미술관 복원실에서 흔히 맡을 수 있는 화학제품(바니쉬와 시아노아크릴레이트 계열의 접착제) 냄새와 비슷하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았다. 대신 명함을 건네며 신원이 확인되면 관이 아닌 개인 번호로 연락을 달라고 당부했다. 관이 안팎으로 시끄러운 때에 협조 좀 부탁드린다는 말에 경찰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는 택시를 타고 미술관으로 돌아왔다.
동트기 전이라는 사실에 안도하며 2층 전시장을 정리해나갔다. 조각난 손전등 부품을 찾아 치웠고 접이식 의자는 원래 위치에 세워두었다. 그림을 훔치러 온 악질 산업스파이를 미술관 직원이 때려잡았다는 미담 정도라면 홍보에 나쁘진 않을 거라고도 생각했지만, 관장을 비롯해 그 누구에게도 간밤 일은 밝히지 않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했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말끔히 치워진 통로 끝에 서서 안도의 숨을 내쉬며 내일부터 공개될 그림을 한 점 한 점 뜯어봤다.
이번 전시에서는 국내에선 처음으로 공개되는 작품이 대다수였다. 특히 마지막 작품인 <갤러리를 찾아서>로 말할 거 같으면, 작가의 말년 화풍이 두드러진 작품으로 화랑에 선 남자가…… 남자가, 사라졌다. 나는 그림 앞에서 여러 번 눈두덩을 문질렀다. 중산모 쓴 남자가 보이지 않았다. 그의 자리가 정교하게 뜯겨나가 있었던 것이다. 캔버스에는 회백색 얼룩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나는 여러 각도에서 그림을 관찰했다. 관찰 끝에 발견한 것이라곤 화폭 아래 떨어진 검은색 중산모뿐이었다. 새것처럼 날이 선 중산모는 길을 잃은 채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중산모를 들여다보며 지난달부터 출근한 복원실 수습 직원에게 전화했다. 여러 번 신호가 울렸으나 받지 않았다. 신호가 울리는 동안 그 모자를 써보았다. 머리에 꼭 들어맞았다. 중산모에 퍽 어울릴 만한 옷이 떠올랐다. 사무실 옷장에 걸려 있는 직원용 유니폼. 검정과 감색이 적절히 배합된 정장이었다. 그 옷이라면 감쪽같으리라는 걸 알았다. 간혹 내가 복무하는 이 세계가 한 점 그림이라면 어떨까, 상상할 때도 있었다. 그림 속 인물의 생애라면 이보단 아름답지 않을까. 나는 모양이 변형되지 않도록 중산모를 두 손으로 고이 받쳐 들고 사무실 쪽으로 걸으며 빛과 어둠에 관해 생각했다. <끝>